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24장 성령의 세례 혹은 인침

강대식 2012. 9. 17. 12:37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본문을 두 가지 중요한 노선에 비추어 강해를 해나가야 한다.

첫째,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건전하고 중요한 성경 해석 원리로 어떤 진술의 의미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하면 병행적인 진술을 찾아보아야 한다.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께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거기서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을 발견하고 또한 신자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보게 된다.

 

또 로마서 5:5에서 ‘넘치도록 부어주심’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우리에 대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이 너무나 흘러넘치게 된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오순절날 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사 속에서, 사도행전 4장 23-33절,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외 그 가정의 이야기, 사도행전 19장 바울이 안수했던 에배소에 있는 제자의 경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여기 로마서 8:16에서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한 실례들이다.

 

요한계시록 2:17, 2:28에서도 같은 개념이 발견된다.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여기 1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다르게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님을 순종하며 기쁘게 했던 사람들이 ‘감추인 만나’, ‘흰돌’, ‘새벽별’이라는 말로 표현된 주님이 기뻐하시는 표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선입관 없이 읽을 때 누구든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두드러진 방식으로 그들을 뛰어나게 하는 어떤 통찰력과 이해력이 있었음을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벧전 1:8)

 

둘째, 기독교회의 다음 역사로 이 본문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의심이 간다면 여러분 자신이 체험한 바 있을 수 있는 일로 그것을 국한시키고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전기나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어떤 비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믿었고 상당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들이 “전에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전에는 결코 가지지 못했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성경 진술 외에도 우리는 성도들의 생애에 있어서 이 특별한 확증과 부흥시대의 교회사에 나타난 이 특징적인 확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인가?

첫째, 이것이 분명히 성령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시나니”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14절에서 성령의 역사는 ‘증거’임을 알았고 또한 15절에서 결정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양자의 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 16절에서 바울은 성령 자신이 친히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을 다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 자신의 증거요, 증언이다. 저는 이것이 ‘성령세례’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15절을 다룰 때 ‘양자의 영’이 성령세례의 일부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상 성령세례의 제1차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않고서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의 영을 가지고도 이 더 나아간 부가적인 체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고 진수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이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는 ‘인침’이라는 말이 세 번 언급된다.(고후1:22, 엡1:13, 4:30) 이러한 진술들은 이 16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인침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후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며, 성령의 보증은 내 기업에 대한 일차적인 계약금으로 나머지를 지불하겠다는 보증금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지와 마음과 영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우리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이 특별한 성령 자신의 행동을 성화와 관련하여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를 돕고 촉진시키지만 성화 자체는 아니다.

 

성령 자신의 증거는 ‘양자의 영’과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부가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은밀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받은 자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요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며 ‘흰돌’이고 ‘새벽별’이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가능한 가장 고차원적인 확신의 형태이다. 명백하게 명시된 성경의 진술들을 통한 추론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옳은 일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체험에 적용시키는 성경 진술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연역해내고 있다. 두 번째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15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것을 발견한다. 더 높은 단계로 전적으로 성령 자신의 행동으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들어 올려서 그에게 입을 맞추는 행동(토마스 구드윈)이 16절을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어느 것에서든지 그에게 범죄하지 않으려는 크고 위대한 사모하는 열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한다. 또한 그렇게 할 권능과 능력을 수반하게 한다. 이 체험은 여러 은사를 동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성령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을 다루신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며 어떤 방식으로 조정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축복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일반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들리는 소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영의 귀에 들리는 소리만큼 분명하다. 그것은 때때로 성경을 고요히 읽을 때 오기도 하고 설교하는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확신이 언제나 성경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 조명’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 비성경적이다. 정상적으로 이러한 간증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말씀 없이도 주어질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계획된 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