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희락주의는 확신들 위에 세워진 삶의 철학이다 / 존 파이퍼
나는 기독교 희락주의자로 회심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오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기뻐하라고 했는지 주목하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자신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고 했다.
파스칼이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
“이제는 공허한 흔적과 표시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한 때는 인간 안에 참된 행복이 있었다. 인간은 현존히는 것들에서 얻을 수 없는 도움을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추구하며, 지금은 사라진 그 행복의 자리를 자기 주변에 있는 것들로 채우려고 하지만 허사다. 그 무한한 심연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 즉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기에, 이련 시도들은 모두 적절하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기뻐하는 것으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으로 인한 그 기쁨과 찬양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지, 결코 외식이 아니다. 에드워즈가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말한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피조물을 향해 스스로 지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첫째,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나타나심으로써. 둘째,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피조물의 마음에 전하시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현시(manifestation)를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만끽할 때 ......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때뿐 아니라 그 영광을 우리가 기뻐할 때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그냥 그 영광을 보기만 할 때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 영광을 기뻐하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다함없는 기쁨의 원천이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16:11).
내가 기독교 희락주의라는 용어를 쓸 때, 이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속적인 쾌락을 가져다주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기독교 희락주의가 추구하는 쾌락은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이다. 하나님은 우리 탐색(search)의 목적이지 더 나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바로 주님이시다. 결코 황금 길이나 친척들과의 재회나 다른 하늘의 축복이 아니다.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을 금이나 은의 보고를 여는 열쇠로 축소하지 않는다. 도리어 기독교 희락주의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욥22:25) 되시도록 도와줄 것이다.
기독교 희락주의는 다음의 다섯 가지 확신들 위에 세워진 삶의 철학이다.
1 행복을 갈망하는 마음은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며 선한 것이지 죄가 아니다.
2 우리는 그것이 나쁜 충동이라도 된 듯이 행복해지려는 갈망을 부정하거나 저항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이 갈망을 더욱 강화하려고 하고 더 깊고 더 오래도록 지속되는 만족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으로 이 갈망을 키워야 한다.
3 가장 깊고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from)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in) 있다.
4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행복은 그 행복을 다양한 사랑의 방식으로 이웃과 나눌 때 완성된다.
5 우리 자신의 기쁨 추구를 포기하는 한 그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못하게 된다. 이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표현하연 다음과 같다. 기쁨의 추구는 모든 경배와 미덕의 필수 요소다. 즉,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by)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 존 파이퍼, 『하나님을 기뻐하라』, pp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