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적인 이성은 믿음의 가장 지독한 원수이다 / 토마스 굿윈
믿음이 작용할 때까지는 육적인 이성이 최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 원리를 폐하고 억제하며 심지어는 그것과 모순되기도 한다. 믿음은 육적인 이성이 문제 처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조언을 배제시킨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육적인 이성의 적의가 깊고 심하기 때문에 믿음의 가장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의 특별한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를 바꾸고 우리를 칭의의 상태에 두며 그것에 대해 확신시키는 것이다.
거기다가 육적인 이성은 믿음에 대해 특별한 적의를 보인다. 즉 육적인 이성은 믿음의 역사를 반대한다. 이 적의는 믿음이 역사하기 전후에 드러나며, 또한 육적인 이성은 믿음을 예증해 준다. 왜냐하면 믿음이 역사하기 이전에 육적인 이성이 상황이 좋다고 설득함으로써 믿음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가 믿음을 추구하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의 상황을 바꾸거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가 없게 만들고 그런 식으로 믿음을 완전히 차단한다.
따라서 정복자가 모든 견고한 성과 이론(고후10:5)을 파하듯이, 믿음의 첫번째 역사에서 성령은 육적인 이성이 오랫동안 견고하게 쌓고 요새화한 성을 무너뜨리고 강제로 믿음을 투입시킨다. 그리고 나서 그 폐허 위에 믿음의 보좌를 세운다. 믿음이 이런 식으로 역사한 후에도 육적인 이성은 진압되지 않고, 멸망하리라는 위협과 적의를 피하고서 여전히 믿음을 반대한다. 육적인 이성은 잠시 휴전하고 새 힘을 기르며 모든 화기(火器)들을 새 것으로 교체한다. 즉 전에는 그의 상황이 좋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그의 상태가 나쁘다고 온갖 반론을 제기하여 사람들을 설득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의 위대한 업적을 모독한다.
믿음의 직무와 일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 외에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그의 은혜를 받도록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에(롬5:1) 육적인 이성은 온갖 이유를 들어 그 반대로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쓴다. 그 일환으로 육적인 이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평화를 맺고 있지 않다, 혹은 아직도 우리와 화해할 생각이 없다, 따라서 믿음이 우리를 설득하는 것과 모순된다는 등의 매우 의심스럽고 허울 좋은 주장을 펼친다. 육적인 이성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 대해 거짓된 논거를 제시하여 그들의 형편이 좋다는 견해를 견지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믿음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육적인 이성은 이 원리에 입각하여 거듭난 사람에게는 형편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육적인 이성은 믿음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고 더 나은 기반 위에 있다. 다윗이 말하듯이,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고 빛이 없는 어둠 속을 헤맬 때 특히 그렇다. 이런 상황은 육적인 이성이 반론을 제기하기에 가장 완벽한 주제를 제공하는 상황이다. 육적인 이성이 열심히 이런 점을 이용하여 혼란에 빠져 있는 영혼에게 강력하게 반론을 제기하도록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토마스 굿윈, 『어둠 속을 걷는 빛의 자녀들』, pp 5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