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30장 성령이 친히 증거하는 체험을 위한 기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롬 8:16 )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은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받았으며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부요’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사랑은 확신을 요구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은 사랑의 관계요, 그러므로 다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자녀가 자기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신약의 교훈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주장한다. 같은 주장으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 어디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지면마다 묘사되어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을 크게 부어주시는 시대에 일어났음을 기억한다. 에베소서 1:13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때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위대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그러한 축복을 받으라는 권면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 가지의 지나친 결과들로 인해서 위험 속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권면하는 말씀들을 대하게 된다.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는(1961) 고린도전서를 쓸 필요가 있는 교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구약 아가서 5장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사모하고 있는 신자의 체험에 대한 전형적인 진술이 있다. 신부가 어리석게도 신랑의 제안을 무시했으나 후에 신부는 깨달은 다음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가버렸다. 그녀는 밤에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찾기 시작하지만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는다. 그녀는 순행하는 자들에게 그 신랑을 만나거든 자기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이 축복을 찾는 신자의 전형적인 진술이다.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 1:10, 누가복음 11:11-13의 말씀 속에 있는 진술 속에서 대하게 된다.
그들은 “그것은 오순절 전에 그러하였지 더 이상 그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서 영 단번에 부어지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을 받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 로마서 8:9이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 구절에 대해 그런 식의 세대주의적인 관점을 취급한다면 어째서 복음서에 있는 모든 구절들을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는가? 그들은 주장하기를 복음서들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복음서들은 주님이 죽으시기 전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논리가 맞게 하자면 그들은 복음서 전체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야 될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서의 교훈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요한복음 7:37-39의 진술은 성령께서 오순절날 오신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설명하고 약속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강수가 그들의 속에서 흘러나올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한 진리가 아니다.
어떻게 그 축복을 추구해야 되느냐?
-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말하는 교훈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사모하고 간구할 따름이다. 믿음은 축복 그 자체에 매달려 있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축복을 주시는 분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며 그분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혼란은 궁극적으로 믿음에 관해서 오해를 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믿음은 우리 속에 긴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산출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 축복된 선물을 받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바로 그것이 믿음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러한 은사를 받고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느낌에 의해서 압도당할 것이고 이제까지 있었던 경험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체험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축복을 믿음으로 취할 수 있으니 느낌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체험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사상을 혼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 단순히 집회에 참석하거나, 그 집회의 지도자들에게 안수를 받거나, 어떤 ‘분위기’ 가운데 있음으로 해서만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카톨릭의 ‘견진성사’(안수례)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점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새로운 교훈은 주로 20세기에 대중화 되었다. 문제는 그러면 오랜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인가? 그 권능은 분명히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위해서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행8:18-19) 왜냐하면 전도자 빌립마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 특별히 아나니아에게서 주어졌던 것 같다.(행 9:17) ‘사도적 계승’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졌노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받기 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사실상 자기가 그것이 오는 때를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축복은 어떻게 오는가?
첫째, 우리는 이 체험의 성격과 본질에 관하여 명심하도록 하자. 요한복음 7:37-39, 14장의 말씀에 대한 성취된 은혜로운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즐길 수 있다고 믿으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인식하라.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라.(엡3:18-19)
둘째, 단순히 어떤 체험만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 여러분이 “그를 알기 원하며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라. 거룩해지기를 추구하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셋째, 최선을 다해서 그를 기쁘시게 하라. 베드로후서 1:5-7에서 말한 바를 행하라.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묵상하라. 그런 다음에 모든 열심을 다하고 난 뒤 끊임없는 기도를 드려라. 여러분의 사모하는 바를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에게 알리라. 만일 아직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계속 문을 두드리고 망치로 두드려 나가라.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30장의 제목은 '성경적 보상'으로 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