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교리 / 에드워드 힌슨
청교도주의의 위대성은 진실한 교리와 올바른 실행의 유일한 출처로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실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전인격을 통합시키는 생활철학이었다. 이와같이 청교도들은 과학, 논리학, 철학을 두려 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각 분야와 연관시켜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학문적 추구의 분야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성경이 이성과 학문으로 더불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단순한 이성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모든 분별있는 진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의 관계에서 실체를 분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 모든 현대 신학자들이 하는 것과는 달리 자연신학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만이 인간의 필요에 대한 유일한 분별있는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락한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들에게 그들의 불신앙의 비합리성을 보여주어야 하며,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해 버릴 때 그는 또한 법, 정의, 교육, 그리고 철학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마저 버리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단지 공허하고 무의미한 우주에 남게 되며, 그의 유일한 선택권은 자기보존과 자아만족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말하기를 20세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혁자들이 매우 잘 파악하였던 진리, 즉 「신앙과 이성」은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서라고 하였다.「하나님의 진리」는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에만 비합리적이다. 현대 인간의 절망에 대한 기독교의 해결책은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하게 된다면, 통합되고 합리적인 진리가 유효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 중심적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도되어지고 지배되어졌다. 성경의 해석이란 철저하게 연구되어지고, 주의깊게 다루어져야만 될 심오한 기술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퀘이커의 광신적 방법론들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런데 퀘이커는 신앙과 이성을 정열과 감정에게 종속시켰다. 존 코튼은 “열정이 없는 지식은 더이상 지식이 아니긴 하지만, 지식이 없는 열정은 성난 불길과 같다”고 기술하였다.
청교도주의는 「정통신앙과 열정적인 헌신의 건전한 결합」이었다. 이 두 요소는 후대에 청교도주의의 두 파생 교단 즉 유니테리안파와 신앙부흥운동으로 분리되어졌다. 유니테리안들은 그들의 권위와 완전히 세속화된 종교로서 성경의 진리에 이성만을 대치시켜 버렸다. 한편 신앙부흥운동가들은 감정을 너무 강조했었다. 1740년대에 있었던 대각성운동은 아직까지는 본질적으로 청교도운동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었던 신앙부흥운동은 단련된 성직의 개념까지 포함하여 청교도주의의 거의 대부분의 자취들을 포기해 버렸다.
청교도들은 영감에 의한, 그리고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맡겨졌다. 그들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며 인간이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따라서 그 자신을 구원시킬 수 없으며, 그 결과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그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죄없는 피를 인간에게 흘려주셨고, 그를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 구원은 완전한 은혜의 산물이며,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것을 얻거나 완성시킬 수 없다. 인간은 그를 대신한 하나님의 독립적인 역사로 구원함을 받은 것이다.
청교도들은 추상적인 신학자들이 아니라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고 철저하게 연구하였으며, 그리고나서는 그 진리를 그들의 청중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능력있는 설교자들이었다. 윌리암 틴데일은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올바른 신앙은 인간의 환상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자유로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우리는 받을만한 자격도 없고 정말 그것을 찾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은사와 은혜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청교도들을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 어떻게 복음주의 교회에게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들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의 교리들을 다시 받아들이도록 용기를 북돋워준다. 우리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세목을 다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 중 몇 가지 점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과 그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돌아서기 위해서 진지하게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설교하였다(행26:20). 죄인은 그의 죄와 그 자신의 의와 사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러한 회개는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것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이기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진정한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나타내져야 한다. 우리의 열정은 숫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의 깨어진 마음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적극적인 설교를 게을리해 왔다.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드러나 있는 복음들과, 그의 본성과 속죄사역이 나타나있는 기독론으로부터 설교되어져야 한다. 죠셉 알레인은 “불완전한 개종은 그리스도를 반만 받아들인다. 구원의 그리스도는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개종은 그리스도 전체를 받아들인다. 그는 그를 아무런 예외도, 한계도, 보류도 없이 모든 계획과 목적에 있어서 받아들인다”고 기술하였다.
매우 건전한 교리와 열의있는 성도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며 지욱으로 가는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 에드워드 힌슨, 『청교도 신학』, pp 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