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은 청정무흠으로 살기를 원했던 신학의 실천자들이었다/ 박영호
오늘의 한국 기독교회를 개혁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참된 기독교적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오늘의 세상 형편을 보고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할 기독교인의 삶이 빛을 잃은 암흑이라면 그 암흑세계는 얼마나 어둡겠는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율법이 타락하고 은총이 남용되며 진리가 하찮은 교리(敎理)가 되고 있지 않는가? 인간적인 실천기술, 인간적인 경험. 정신분석학, 임상학적인 과학적 방법,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시한부 종말론과 이단들의 사설까지도 성경의 계시와 동일 선상에 놓인 것을 우리들이 보고 있지 않는가? 목회자들이 메시지 자체보다는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아부하는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는가? 목회자들이 성경 언어보다는 행동과학적인 언어에 더욱 젖어 들어 있지 않는가? 목회자들을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이름으로 더욱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보다는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를 더 가깝게 느끼고 있지 않는가? 오늘날의 교회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인들의 숫자를 불리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욕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고 있는 것이다. 비성경적인 신관과 인간관이 판을 치며, 혼돈되고 잘못된 신학사상과 목회 방법이 교회를 주식회사처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왜 옛날이 오늘날보다 더 신앙심이 깊었는가?’라고 묻고 싶다. 지난날 하나님께서 이룩하시고 성취하신 역사를 부인하는 것은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과 여러 복음운동을 일어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작업은 그의 말씀을 당시 세대에게 설명하여 주셨고 적용시켰던 것이며, 또한 암시적으로 오늘 우리들의 세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하신다. 성경적인 신관과 인간관 위에 성경적인 위로 지도 실천을 원칙으로 적용하시기를 바라셨다. 이러한 일에 하나님께서 통로요 도구요 매개체로 사용하셨던 사람들이 청교도들이었으며 그러한 신앙운동이 청교도주의(淸敎徒主義)였다. 그래서 ‘토마스 매콜리’는 “청교도들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나온 사람들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주목할 만한 집단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청정무흠(pure and clean)으로 살기를 원했던 신학의 실천자들이었다. 오늘날 신학적 변질·사상적 변질이 난무하고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과 전통적 정통 신앙과 진리가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이때에 순수한 성경적 신학과 신앙생활을 전인격적으로 실천하고 추구했던 이들의 실천신학이 참으로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모든 진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는 세계관 아래서 신학병행(神學竝行體)의 실천이론과 실천훈련을 통합시킨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은 언어·삶·행위를 통해서 정경 66권에 이어 67권 째의 메시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영적 거인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맑은 정신에서 나오는 치열함과 따뜻한 가슴에서 나오는 열정이 있었다. 청교도들은 이상가·실천가·꿈쟁이·산 소망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pp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