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제4권의 제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회’는 ‘거룩한 공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동일한 실체를 가리킨다는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선택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불가시적인 교회는 구성원들을 서로 알고 있는 지상의 가시적인 조직 교회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않는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묘사한 키프리안의 비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교회는 그러한 자격으로 그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며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가시적 교회에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믿음을 고백하고 삶으로 실천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판단하여” 교회의 구성원들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참되게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청종하는 것, 성례전의 바른 집행, 그리고 그것들보다는 하위에 있지만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공동체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을 시행하는 것 등, 그러한 표지들로서 교회가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의 위험이 아주 깊이있게 다루어진다. 우리들은 누구나 결함이 있고, “눈을 흐리게 하는 무지”라는 병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시적 교회는 그것이 성취한 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발전과 목표 면에서 거룩하다. 말씀과 성령의 사역은 왜곡되고 훈련이 실패한 바로 그때에만 그리스도인들이 그 조직을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칼빈은 교황권을 고집하는 교회내에도 참된 교회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떠나도 좋은 이유들을 발견하였다. 카톨릭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권위를 말씀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부패한 교회와 그 위원회가 차지하였다. 교황 지배하에서의 상황은 마침내 “교회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칼빈은 또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훈련과 성례전을 건설적으로 다루고 있다. 훈련이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그것은 지체들을 결집시키는 끈, 또는 자제를 위한 고삐, 혹은 아버지의 징계 회초리와 같은 것이다. 누구도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훈련 과정을 면제시켜 줄 수 없다. 훈련을 통하여 얻으려 하는 목표들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교회의 이름을 더렵혀서는 안 된다는 것, 선을 부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위반자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훈련은 엄격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드러워야 한다. 칼빈은 바울, 키프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크리소스톰이 위반자들을 다루면서 형제애를 가지고 신중하게 처신하였던 예들을 깊이 상고한다. 우리들은 완고함 때문에 출교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포기하거나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그들을 멸망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존 멕네일 편집) 1권, pp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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