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송영: ‘아멘!’이라고 말하기
교리를 그 극적인 이야기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말문이 막혀 송영(찬앙)에 잠기게 된다. 우리는 지배하기는커녕 지배받으며 진리를 사로잡는 대신 진리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선물에 사로잡혀 거기에 오직 ‘아멘!’, ‘주님을 찬양하라!’ 라고만 말할 수 있다. 이런 패턴은 사도들의 서신에서도 식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보존하시는 은혜라는 높은 산의 정상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간 뒤 놀라움 속에서 그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탄생을 지른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에 대해 또 다른 추가 설명을 한 뒤 이렇게 외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극적인 줄거리와 그것의 교리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 우리의 송영은 초점이 없어진다. 우리의 찬양은 깊이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 이유마저 없어진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반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내가 인용한 이 송영에서 하나님의 위엄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묻거나 대답하지 않고 다만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한다.
D 제자도: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길
우리의 지성이 하나남의 말씀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로 잡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드라마에서 새로운 등장인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진다. 신학은 세례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민자들은 시민권 선서를 하자마자 새 나라의 언어와 풍습을 배우기 시작한다. 세례에서는 하나님의 맹세가 먼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그리스도안에서 언약에 따른 자비의 수혜자로 선포하실 때 우리는 사라져 가는 죄와 사망의 제국에서 은혜의 나라로 옮겨진다. 세례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가시적인 표시이자 인장으로써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의 반응을 (한 번뿐이 아니라 순례의 여정 내내)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를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이라고 한다. 즉, 우리의 ‘옛 사람’(아담 안에 있는 아무 가망 없는 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고 우리의 ‘새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교리까지 포함하여-배우는 일은 우리의 새로운 시민권에 따르는 타협할 수 없는 의무다. 세례 받은 이들은 시온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특권과 배워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사라져 가는 이 시대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정체성으로 옮겨져 이 새로운 대본의 함의를 이해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의 제자도는 도덕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본받기만 하는 것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 연합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과는 다르다.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세상 속에서 우리 이웃에게 분명하고 진심어린 사랑과 섬김과 증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신조다. 실천과 단절된 교리는 죽은 것이며 교리와 단절된 실천은 또 다른 형태의 자기 구원 내지 자기 향상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신학을 배우는 학생이다. 성경적인 제자도 개념은 분명 공부 이상의 것을 뜻하지만 공부 이하의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공식적, 비공식적인 일상적 가르침을 받기 위해 랍비(‘선생’을 뜻히는 말)를 따르던 일반적 관행이 예수님의 사역 패턴이었다. 제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디사이플’(disciple)은 사실 ‘학생’을 뜻하는 라틴어 명사 ‘디스키플루스’(discipulus)에서 나왔다
이 놀라운 복음을 이해하고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제자도를 위한 올바른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뭇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앞의 열한 장에 걸쳐서 바울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받은 정죄라는 반역의 골짜기와 그그리스도 안에 있는 숨막힐 듯 아름다운 구원의 고본준령을 탐험해 왔다. 그 과정 내내 바울은 송영의 탄성으로 교리적 논증에 방점을 찍었다. 이제야 비로소-하나님의 자비에 비추어-제자도로의 부르심이 단지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합당한 예배’가 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속죄의 죽은 제사가 아니라 감사의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다. 우리는 교리를 하잖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하나님이나 성경에 관심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제자에 대한 신약의 관점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본받으라고 요구하신 하나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이해하기를 요구하신 유일무이한 메시아적 사역이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 증인이 되도록, 즉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말씀을 가리켜 보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E. 결론: 하나님의 연극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밭으신 새 역할
내러티브 드라마, 교리, 송영, 제자도 사이를 오가는 이 움직임은 신약 서신서 곳곳에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은 성경의 찬송가인 시편에서도 분명하다. 시편에서 우리는 종종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에게 감사의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그 다음에는 믿음과 순종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능하신 일에 대한 극적인 기술을 발견한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드라마에서 제자도로 일직선상에서 움직인다는 뜻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은 우리가 이 전에 실제로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며, 때때로 우리의 실천은 우리의 교리적 확신을 만들어 가거나 잘못 만들어 간다. 종종 구속의 드라마에서 반만 배운 교리나 반만 기억된 에피소드는 기도와 찬양 속에서, 특히 위기나 즐거운 경이로움의 순간에 더 충분히 깨달아진다. 교통은 이 좌표들 사이에서 모든 방향으로 앞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속에 닻이 내려지고 사랑 속에서 우리의 이웃에게로 뻗어 나간다.
개별적인 신자로서,그리고 교회로서,우리가 성령님께 이끌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께 의존하며 그 말씀에 근거를 둔 신학이 필요하다. 기독교 교리 연구는 언제나 온 교회의 믿음과 실천을 위한-학자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체 성도들의 교제를 위한-필수불가결한 기획이다. 신조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늘 신조의 깊이와 함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신조가 없으면 행위는 모호한 도덕주의에 굴복한다.
세상의 이야기를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끈기 있는 목회자들과 교사들에게서 배워 세상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방향을 사라져 가는 이 시대와 목적 없는 줄거리, “헛된 말”(엡5:6),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2:8)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기업으로 새롭게 바꾸어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이 일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기적인 모임-설교와 성례를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배역 선정 공고-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새로운 정체성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이 기업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기본 설정치는 언제나 현재 이 시대의 우상 숭배를 지배하는 대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부터 언약적인 피조물로-하나님과 서로와의 관계, 그리고 이 외부 지향적인 정체성을 회복 시켜주는 구속과의 관계에서-창조하셨기 때문에 신학은 홀로 떨어져서 하기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대화하면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신학은 언제나 교회를 위해, 교회에 의해 이루어진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 pp 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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