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자들 사이에서 “형상”과 “모양”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그들은 두 단어가 사실 서로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은 차이를 찾느라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히브리인들에게는 한 가지 사실을 두 번씩 반복하여 표현하는 예가 매우 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 자체를 보아도 거기에 전혀 모호한 점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는 것일 뿐 다른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 좀 더 교묘하게 철학적인 논리를 늘어놓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은 첼렘, 즉 형상을 영혼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데무트, 즉 모양을 그 본질의 성질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아니면 좀 더 색다른 해석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것이 다소 설명이 희미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한 설명을 위하여 “그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을 반복하신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을 닮은 표지들을 새겨 놓으셔서 하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잘 반영해 줄 그런 사람을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도 바로 뒤에서 동일한 사실을 다시 반복하여 기술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 반복하면서도 “모양”이라는 단어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창1:27).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의 일부분- 말하자면, 영혼과 그 모든 기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흙에서 취하여져졌을 때에 그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이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 전체를 가리켜 죽을 인생이라고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죽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을 가리켜 “이성적 동물”이라 부른다 해도, 사람의 이성이이나 지성이 육체에만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물론 영혼이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람의 영혼을 염두에 두고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른다 해도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본성을 모든 생물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그의 탁월함 전체에까지 확대된다는 원리를 그대로 고수한다. 그러므로 아담이 올바른 이해를 충만히 소유했고, 그의 감성을 이성의 경계 내에 유지하였고, 그의 모든 감각들을 올바른 질서대로 통제하고 있었고, 자신의 탁월함을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특별하신 은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을 당시에 아담에게 부여되어 있던 순전함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된 좌소는 물론 아담의 정신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기능들에 있었지만, 사람의 모든 부분 가운데- 심지어 육체조차도- 그 형상이 어느 정도라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뛰어나며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종의 말없는 선언인 셈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2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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