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저술가들의 글들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문구가 한때 교회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교리를 정리하여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중요한 문제에 관한 아주 유용하고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비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각각 해석은 다르지만, 교부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降下)를 언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문구를 누가 언제 삽입했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사도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것은, 거기에 우리의 신앙의 요체가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세세히 들어 있고, 또한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서 나온 것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조항이 삭제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많은 은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3:19). 전후의 문맥을 볼 때에 우리는 이 구절을, 그 이전에 죽은 신자들이 우리와 함께 동일한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게 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이, 심지어 죽은 자들에게까지- 그들이 간절히 기다렸었던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경건한 자들의 영혼이 눈으로 보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에- 미쳤다는 식으로 그 능력을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들이 모든 구원에서 배제되었음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의 말씀은 다만 두 그룹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똑같이 인식하였음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뿐이다.
“지옥에 내려가사”는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영적 고통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도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더 확실한 해명을 구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저 육체의 죽음만 죽으셨다면, 그것은 효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동시에 하나님의 보응의 처절함을 그대로 받으셔야 했고, 그의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지옥의 군대들과 영원한 죽음의 쓰라림을 친히 당하여야 했던 것이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그리스도께서 행악자들을 대신하여 보증물과 담보물이 되셨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저주에 굴복시키셨고- 그들이 받아야 마땅할 모든 형벌들을 친히 다 당하셨다는 뜻이다. 단 한 가지 예외의 사실은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행2:24)이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하심으로 악인들에게 가하셨던 그 죽음을 그가 친히 당하셨으니 말이다.
요점은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일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당하신 눈에 보이지 않고 깨달을 수도 없는 심판을 적절히 언급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구속의 값으로 드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도 정죄받고 버림받은 사람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더 크고 더 훌륭하게 값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성경 본문의 증거들을 본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그저 죽음만을 말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비롯되는 바 죽음의 고통- 곧, 죽음의 근원에- 붙잡혀 계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말씀도 동일하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두려워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우리 번역은 “두려워하심”을 “경건하심”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는 어법에서는 물론 사실 그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두려워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죄인으로 죽음에 삼키운 바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는 거기서 우리의 본성을 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깊은 고뇌 가운데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시22:1)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그렇게 버림을 당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 깊이 드러워져 있는 고뇌에서부터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극심한 형벌의 위중함을 다 당하셨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손으로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으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보응을 모두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라리스는 이렇게 논리를 전개한다. 곧, 그가 지옥에 내려가심으로써 우리는 그가 죽음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얻는다는 것이다. “십자가, 죽음, 지옥- 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올림을 받는다.” 사도는 이러한 승리의 열매를 상고하면서 동일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곧,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이 이로써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다(히2:15).
그러므로 그는 본질상 모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고 짓누르는 그 두려움을 이기셔야 했고,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 두려움과 싸우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슬픔과 고뇌가 그저 보통의 슬픔이나 사소한 원인 때문에 생겨난 고뇌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더 확실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의 고통과 친히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이기시고 개선하셨고,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죽음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왕께서 이미 삼켜 버리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참조 벧전3:22).
몇 몇 무식한 사람들이 무지보다는 악의에 휩싸여서, 내가 그리스도를 끔찍스럽게 모욕한다고 외쳐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두려워하셨다는 것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사악하게도 복음서 기자들이 그렇게도 분명하게 보도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논쟁을 제기한다. 죽음의 때가 다가오기 전에, 그는 “심령이 괴로워” 하셨으며(요13:21) 슬픔에 싸이셨고, 죽음이 다가올 때에는 그는 더욱 강렬한 두려움으로 떨기까지 하셨음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마26:37).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가 올바로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슬픔을 확신을 갖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의 영혼이 형벌을 함께 당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그저 육체의 구속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절망에 빠진 자들을 일으키기 위하여 싸우셔야 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리스도의 연약하심에 그렇게 경계심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는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향하신 사랑으로 또한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모든 일을 당하셨다 할지라도 그의 권세가 조금도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이 훼방꾼들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순종의 범주 속에 자신을 지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연약하심은 순결했고 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 때에 과연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곧, 그 기도는 괴로움의 시작이었고, 우리는 그 기도에서 그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범죄자로 서실 때에 그가 견디셔야 했을 그 괴로움이 얼마나 처절하고 끔찍했는가를 추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영의 신적인 능력이 잠시 동안 감추어져 있어서 그의 육체의 연약함이 역사하였으나, 고통과 두려움의 느낌에서 나오는 시련이 믿음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그는 그를 그의 하나님으로 부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고, 자신이 버림 받으셨음을 그에게 토로하셨으니 말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629-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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