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형벌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의 차이/ 존 칼빈

강대식 2014. 3. 17. 12:57

형벌의 심판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향하여 복수하시는 심판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항하여 그의 진노를 발하시고,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고, 흩으시고, 완전히 멸절시키신다. 형벌에 그의 진노가 합쳐져서 나타나는 것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심이 그렇게 심하지 않고, 완전히 멸망시킬 정도로 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형벌 혹은 복수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정과 훈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형벌을 위한 심판은 재판관의 행동이요, 징계를 위한 심판은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행을 범하는 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 범죄의 경중을 따져서 범죄 그 자체에 형벌을 적용시킨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아들의 잘못을 교정하는 경우에는 그에게 보복을 한다든가 그를 해치려는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가르치고 그리하여 더욱 조심하도록 하기 위하여 벌을 주는 것이다. 크리소스톰,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채찍으로 맞는다. 그러나 노예의 경우는 자기의 과실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요, 아들의 경우는 자유인이요 아들로서 징계가 필요해서 맞는 것이다. 아들에게는 매를 맞는 것이 시련을 통한 교정의 계기가 되지만, 노예에게는 그저 징벌과 형벌뿐인 것이다.”

 

두 가지 심판의 첫 번째 차이는, 형벌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거기에 드러나지만, 신자들의 경우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징계를 위한 심판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축복이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욥5:17,잠3:11-12,히12:5-6). 불경한 자들이 현재의 삶에서 당하는 모든 괴로움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괴로움 속에서 멀리서 자기들의 영원한 저주의 상태를 이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거기서 유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예비적인 고통거리로 말미암아 마지막에 그들에게 다가올 그 처참한 게헨나의 상태를 준비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그들을 사망에 내어주시지는 않는다(시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에 맞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요 그것을 통해서 참된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시119:71). 그들은 또한 언제나 형벌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10:24-25).

 

주께서 성도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채찍을 내리실 때에 그들을 항하여 진노하시는 것으로 말씀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모순이 아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사12:1).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다고도 말씀하지만(사47:6), 우리가 아는 대로 영원토록 그렇게 욕되게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 표현은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나 목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렬하신 징계를 당하는 자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진노보다는 그의 긍휼하심에 대한 증거를 더 분명히 보여 주신다.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는 아니하리라”(시89:30-33). 그의 긍휼하심을 더 확실히 깨닫도록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솔로몬의 자손을 징계하실 매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일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사48:10). 은처럼 연단 받았다면 완전히 불에 타버렸을 것이다(사43:2참조).

 

두 심판의 두 번째 차이가 있다. 악인이 하나님의 채찍에 맞는 경우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심판에 따르는 형벌을 이미 당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형벌을 당하면서도 정신을 바르게 차리는 일도 없고, 오직 엄청난 괴로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심판자요 처벌자이심을 깨닫게 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는 채찍으로 맞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그들의 죄의 형벌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은 과거보다는 오히려 미래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크리소스톰, “그가 우리에게 벌을 가하시는 것은 과거의 죄를 벌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교정시키셔서 미래의 죄를 미리 예방하시기 위함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여러분이 당하고, 여러분이 고통을 토로하는 것은 여러분의 형벌이 아니라 여러분의 양약이다.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징계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상속인에서 내어쫓기기를 바라지 않으면 채찍을 마다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나라를 빼앗으셨을 때에, 그는 형벌의 심판을 가하신 것이었다(삼상15:23). 그러나 다윗의 어린 아들을 그에게서 빼앗으셨을 때에는 교정을 위하여 그를 징계하신 것이었다(삼하12:18).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징계를 받는 신자의 자세.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 신자는 이런 생각을 가져서 자신을 굳건하게 해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렘25:29)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벧전4:17)는 것이다. 하나님의 채찍에 맞음으로 결국에 가서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악행에 대해서 진노하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기에 대해서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하신 분이시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내리시는 채찍을 맞을 때에, 신자들이 눌림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94:12-13).

 

다윗에게 징벌을 내리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살인과 간음을 극히 노여워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신실한 종에게 그러한 큰 노여움을 친히 선포하심으로써, 다윗이 다시는 그런 범죄를 감히 범하지 못하도록 확실한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었지, 지은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무슨 보속을 하기 위해서 받는 형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후 오는 세대를 위하여 공적인 모범을 세우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63-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