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었던 세 가지 중대한 교리 내지 원리가 있다.
1 성경의 충분성과 우월성
2 개인적 판단의 권한
3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만일 우리가 이 세 원리들 중 하나라도 포기한다면, 우리는 설 자리를 잃게 되고 만다.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힘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조만간 우리는 무기를 버리고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개인적 판단의 권한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자기 앞에 종교적인 진리로서 제시된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 여부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해 볼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개인적인 판단의 필요성이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고 기만당하지 않으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권한을 행사하고 이 의무를 수행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개인적인 판단을 무시할 때에 언제나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엄청난 악의 요인들이 발생하였음을 여러 경험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헤아리라”(살전5:21)라는 주목할 만한 말씀으로써, 이 세 가지 사항 모두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모든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것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교훈적인 표현이다. 그는 “너희에게 진리라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복음 전도자들, 목사들, 선생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의 감독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 목회자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 “범사에 헤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보편적인 교회가 참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너희는 따라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부과된 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헤아리라. 모든 목회자들, 모든 가르침, 모든 설교, 모든 교리, 모든 복음전도, 모든 저술, 모든 견해, 모든 실행을 검증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측정해 보라. 성경의 표준에 의해 모든 것을 비교해 보라. 성경의 저울에 모든 것을 달아보라. 성경의 조명에 의해 모든 것을 비추어 보라. 성경의 도가니 안에서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 그리하여 성경의 불을 견뎌 낼 수 있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지키고 믿고 따르라. 그러나 성경의 불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은 부인하고 거부하고 질책하고 던져버리라”.
바로 이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행사해야만 하는 권한이다. 우리는 단지 교황이나 추기경의 말이라는 이유로, 감독이나 사제들의 말, 장로나 집사의 말, 교회나 평의회, 혹은 무슨 종교적인 회의의 발표라는 이유로, 절개가 곧은 자들이나 청교도들, 혹은 종교개혁자의 말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인 어떤 사항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나는 다베넌트 감독과도 견해를 같이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의 가르침이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해 주의해야 하며 진지하게 검증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서도 제시된 바 있는 교리이다. 이사야의 말씀들은 이 땅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직접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대에 쓰였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리라”(사8:19-20).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적이 있는 원리이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은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5).
사람들이 저희의 열매가 어떠한가에 관하여 개인적인 판단을 행사하지 않고, 이 거짓 선지자들을 알아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게 되는 베뢰아 성도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저희에게 설교하였을 때에 그의 말을 곧바로 용인하여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말한다(행17:11-12). 이것 역시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10:15).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질할까 주의하라”(골2:8).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일1:10).
한때 기독교계 전체가 아리우스 이단설을 받아들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 있어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인정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또한 종교개혁 이전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어두움이 유럽 전체를 뒤덮었던 때가 있었다. 교회의 종교회의는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완벽한 곳이 아니다.
오늘날 에베소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사데 교회가 남아 있는가? 우리의 잘못이 교회와 더불어 행해진 것이라고 해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전가되겠는가? 확실히 교회와 더불어 잘못을 행하고 잃어버린 바 되기보다는 사람이 홀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구원받는 것이 천 배나 더 낫지 않은가? “나는 도저히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범사에 헤아려”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목회자들 역시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완벽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기껏해야 단지 인간일 뿐이다. 교황들이든 탁월한 포로테스탄트들이든 마찬가지다.
루터는 공재설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권면하였다. 그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 크랜머와 리들리는 예복에 관한 사소한 논쟁 때문에 후퍼를 감옥에 집어넣기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었다. 휘트기프트는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그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지난 세기에 웨슬리와 토플레디는 칼빈주의에 대하여 격심한 언쟁을 벌였다. 그것 역시 중대한 잘못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목회자들을 붙들고 있다면, 그 신앙은 상한 갈대를 의지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결코 목회자들을 교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목회자들이 그리스도를 좇는 한 그들을 좇아야 한다. 그보다 간발의 차이라도 더 나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그들이 성경으로부터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단 한 마디라도 더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께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진실임을 생활을 통해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91-100
'존 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조의 교리가 없다면, 단지 고운 깃털을 가진 허울 좋은 신앙이다/ 존 라일 (0) | 2014.06.25 |
---|---|
[스크랩] 그분을 소유하고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존 라일 (0) | 2014.06.19 |
[스크랩] 진실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다/ 존 라일 (0) | 2014.06.06 |
[스크랩] 존 C. 라일, 『오직 한 길』, 박영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0) | 2014.06.02 |
[스크랩] 세례 예식과 기도의 밀접한 연관성/ 존 라일 (0) | 201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