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8/17 주일설교, "이가봇"

강대식 2014. 8. 17. 23:17

본문: 삼상 4: 19-22

 

1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고, 말씀, 곧 법도의 상징이었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9:3-5)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었고, 앞쪽 2/3가 성소, 안쪽 1/3이 지성소였다.

이 지성소 안에 금 향로와 함께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었다.

그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 둘이 있었다.

 

이 돌판(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의 거룩한 언약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으므로,

언약의 돌판으로 말해졌다(9:11). ‘증거의 궤’, ‘하나님의 궤’, ‘주 여호와의 궤라고도 했다.

 

이 궤에 대한 최후의 기록은, 3:16이다. 그 후 그 소재에 대해서는, 후대의 전승에 의하면(마카2:4-8),

바벨론 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때 예레미야가 언약궤를 느보산의 동굴에 숨겼다고 한다.

그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때까지,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으로 말해져 있다.

11:19에서는 하늘의 성소에 있어서의 언약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언약궤는 장방형 조각목으로 길이 2규빗 반(1.1m), 높이와 넓이 각 1규빗 반(67cm)이었다.

그 궤를 덮는 덮개를 속죄소(은혜의 보좌, 시은좌)라 하였고

그 위에는 그룹 둘이 날개를 펴고 있게 새겼다. (그룹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

백성을 만나주시고 백성의 죄를 사해 주시는 보좌의 상징이었다.

 

지성소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지만 언약궤는 또한 그 지성소의 지성소였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자체의 상징이었고,

그 하나님은 언약의 법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상징하였다.

 

이 지성소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자기와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짐승의 피를 언약궤 앞에 뿌림으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다.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음을 시청각적으로 훈련하여 십자가의 피흘림을 예표하였다.

 

지성소 안에는 빛이 없었고, 오직 성소로부터 희미한 등불 빛이 휘장을 통해 비칠 뿐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니 다른 빛이 필요 없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영광의 빛과 더불어 살 것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1:23)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들의 사이를 막고 있던 그 두꺼운 휘장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 상하로 찢어져 개방되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15:37-38, 27:50-52)

 

그 이후 우리는 어느 때고 긍휼과 은혜를 받기 위해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 죄를 속량할 뿐 아니라,

언약궤 위 속죄소(은혜의 보좌,시은좌) 앞에 긍휼과 은혜를 받기 위해

언제고, 아무 때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4:25,5:1-2)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평, 은혜, 영광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특권을 가진 존재가 되었음을 감사하고 기를 펴자.

 

2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우리를 택하셨다.

언약궤는 이 관계와 함께 하심의 상징이었고, 임재와 거함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성막을 짓게 하고 그 중심에 지성소와 그 지성소의 중심에 언약궤를 두게 하셨다.

성막이 완성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영광의 구름으로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존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40:3-38)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하였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 동일하게 함께 하셨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매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7:6-11)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삶으로, 사랑하고 경외할 때,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의 성전에 우리의 가정에 사업장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유진할 때는 열 두 지파의 중심에 두게 하셨고,

행진할 때는 선두에 나아가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앞서 가시는 분이시요, 우리의 중심에 계시는 분이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요단을 건너게 하실 때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셨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 새”(3:11, 15-16)

 

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셨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6:3-5)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고 선두에 설 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났지만

이스라엘이 범죄하였을 때 그 영광과 능력은 함께 하시질 않았다.

여리고성에서 아간의 범죄가 그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어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7:11-12)

 

아간이 범죄하여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훔쳤다.

그로 인해 아이성 전투는 패했고, 아간은 그 이름따라 아골골짜기에서 돌로 쳐서 죽게 하였다.

 

이 거룩하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생활 가운데서 구별하게 하셨고

죄악과 더러운 것을 제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거룩은 사람의 죄악과는 함께 하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세상 따라 사는 것을 본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멀리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왜 언약궤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법도는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은 그분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를 드렸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에게도 분향을 했고

그분과 분리될 수 없는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무시하고 탐심과 방탕으로 살았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이중이 삼중이 다중이가 되다가 결국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절을 당했고

겨우 남은 자들을 포로로 잡혀 가고 기업으로 주신 땅은 황폐하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청종하지 아니하고

포도원 밖으로 끌고가 십자가에 처형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남은 유다는 결국 온 세계로 흩어지고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고 우리를 축복하신다.

고난도 축복과 영광을 위한 방편이요 준비이고 훈련이다.

 

광야의 훈련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훈련이었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마음으로 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의 시험과 훈련이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은 법도에 순종하는 성결한 삶이 없이는 함께 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을 수 있다.

고난과 함께 하신 영광이 축복과 함께 하신다..

이 땅에서 고난 중에도 천국을 산 사람이 가서도 영원한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3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때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과 불순종이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올라오며 그 앞에서 춤추는 것을 보고

멸시하다가 저주를 받았다. 그것은 언약궤를 멸시한 것이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삼하6:16,20,22)

 

다윗도 그 전에는 여호와의 법도대로 언약궤를 옮기지 않다가 혼쭐이 났다.

언약궤는 오직 레위인이 채에 꿰어 어깨에 메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였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옮기려 했다.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쳐서 궤 곁에서 죽었다.

 

엘리 제사장도 40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였지만

언약궤보다도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다가 함께 멸망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29-30)

 

그러나 엘리는 회개할 줄 모르고 하던 대로 하다가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그는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며누리는 해산을 하다가 죽고 말았다.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고 그녀는 죽었다.

그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보다 언약궤 빼앗긴 것을 더 크게 여김을 보면

그녀는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4:20-22)

 

사실은 언약궤를 빼앗겼기에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성전에서 여호와의 제물과 예물을 짓밟았고, 엘리는 이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고, 하나님을 멸시하였기에 영광이 이미 떠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다가 전쟁에 지게 되니 언약궤만 가져가면 승리할 줄 알았는데

미신 믿듯이 언약궤가 요술을 부리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다.

언약궤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임하게 하는 것은 경외와 법도가 지켜질 때였다.

 

성품과 삶으로 하나님과 법도를 멸시할 때, 언약궤는 영광의 상징이 아니고 멸망의 상징이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패배했고 두 아들과 엘리와 며누리는 망하고 말았다.

언약궤를 빼앗겨서 영광이 떠난 것이 아니고, 범죄의 결과 영광이 떠난 것의 확인이고 선포였다.

 

그 언약궤를 빼앗아간 블레셋 진영은 그들의 우상 다곤의 목이 부러지고

독한 종기 재앙으로 블레셋 다섯 지역을 휩쓸어 손을 들고 되돌려 보내게 하였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고 머물게 하는 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한 성품, 거룩한 삶 가운데 거하실 수 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지 않도록, 우리의 옷깃을 다시 여미는 계기가 되자.

영광의 구름이 가득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