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락방’(행1:13)은 유아기 기독교 교회의 요람이요 모든 예배행위가 시작된 곳이었다. 이 다락방에서 영원한 복음의 물길이 처음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온 세계에 편만해졌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계보를 이 작은 다락방 너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모든 교회는 이 ‘다락방’의 후손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킹 제임스역과 달리 헬라어 원문에는 다락방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붙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 다락방에서 우리 주님이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을 베푸셨을 것이고, 사도들은 이 다락방에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시고 “이것을 마시라—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는 그 유명한 말씀을 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 말씀은 권능에 찬 위로의 근원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 방에서 제자들이 부활절과 오순절 사이의 기간 즉 50일 동안 거했을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 예배 처소에 모였던 예배자들을 본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바돌레매(나다나엘),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예루살렘의 첫 번째 교회 회의 주도, 교회의 기둥), 셀롯인 시몬, 다대오라 불리우는 유다(야고보의 형제)의 11제자가 있었고, 막달라 마리아 살로매, 수산나, 요안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주님의 형제들이 있었다.
추측컨대, 그때 이후로 그처럼 순수하고 흠 없는 기독교 공동체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하나님 아들의 신령한 몸이요, 믿는 백성들의 축복 받은 공동체’인 ‘거룩한 공회’에 이처럼 근접한 예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쭉정이 없이 순수한 알곡들만 모여있었던 적도, 그처럼 은혜와 인내, 믿음, 소망, 거룩함, 사랑 등이 한 방에 모인 무리들 가운데 잘 어우러져 있던 예도 없었다.
이 다락방의 첫째 특징은 “마음을 같이 하는” 통일성이다. 동일한 사실을 믿었고, 동일한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아무런 불일치도 없었다. 이단, 다툼, 논쟁도 없었고, 세례나 성만찬에 대한 의견대립도 없었다.
둘째 특징은 “전혀 기도에 힘쓰는” 습관이었다. 그들의 기도가 지속적이고 규칙적이었음을 말한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이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였다.
셋째 특징을 베드로의 설교에서 본다. 그의 설교는 신앙의 척도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다. 그는 “성령이 응하였으니”라든지 “시편에 기록하였으되”라고 말씀들을 인용한다. 엘포드 감독, “교회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행동은 사도가 성경을 인용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도 그때처럼 직접적이고 정당하게 성경에 호소하기를 바란다!”.
베드로는 사도의 후계자요 목회자가 될 사람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 분명하게 못 박아 둠으로써 그의 설교를 끝맺는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이나 신앙의 여러 서신들을 보면 우리가 사도들만큼 부활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부활에 대해 평소 생각하는 바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유대인들에게 부활이 곧 그가 구세주되심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진리임에 대한 가장 커다란 증거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에 의해 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근원적인 증거이며, 또한 가장 교활한 불신자들이라도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가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그리고 살고 있는 국가가 베푸는 관용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큰 평온함을 누린다.
교회 가운데 있는 참된 능력의 근원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 작은 다락방은 로마 제국을 뒤흔들어, 이교 사원을 텅 비게 하고, 검투 시합을 중단시켰고, 여자들의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유아학살을 근절시켰고, 새로운 도덕기준을 확립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이 틀렸음을 입증하고,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한 능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최초의 기독교 신앙 공동체가 지녔던 하나됨, 견실한 믿음, 거룩함, 그리고 기도와 서로를 돌아보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이 결여되면 가장 웅대한 교회 건물도 가장 화려한 예식도 병든 세상을 고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뿐이다.
과학만으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유대인들의 케케묵은 책이라고 조롱하는 그 성경에 나타난 가르침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나시고 하나님께 진 우리의 빚을 갚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분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좋은 말이나 수사학적 웅변은 우리의 심령을 만족시킬 수도 없고 도덕적 부패를 막을 수도, 우리의 영혼을 먹이지도 못한다. 만약 이 세상에서 믿음 혹은 신앙고백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끔찍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 시대는 그 어떤 새로운 것이 필요치 않다. 다만 예루살렘의 그 ‘다락방’에 깃들어 있던 옛 진리들이 담대하고 힘차게 울려 퍼지는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 존 라일, 「선한 길」, pp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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