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얼라인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조셉 얼라인

강대식 2015. 3. 9. 22:53

 

사탄은 가짜 회개를 많이 만들어놓고 이 사람은 이 방법으로, 저 사람은 저 방법으로 속인다. 교묘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수능란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단지 이름뿐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런 것이 회개라면, 사데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살았다 하는 이름’(3:1)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단지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토하여 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3:14-16).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지 않고(딤후2:19),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1:16).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안에 사는 것이 정말 회개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신앙고백이라는 등으로 회개가 입증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25:11,12). 그리스도를 전한 설교자들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도 악을 행하기 때문에 쫓겨날 것이다(7:22,23).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술사 시몬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았다. ‘세례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회개와 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세례증서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천사들이 그 증서만 있으면 천국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이 곧 회개이고 중생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 713,14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7:14)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의 문은 아주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넓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문이 그토록 넓다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 중에서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9:27).

 

세례 때 무엇을 받았든 간에 이후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는 철저한 변화를 통해 확실히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6:7). 당신이 거룩하고, 참되고, 자신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구원받을 수 없다(12;14, 15:14).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5:20).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18:10)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가 있어야 한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박애를 포함하고 은혜가 이성을 포함하듯이 경건은 도덕성을 포함한다. 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도 배교할 수 있으며(6:4-6), 총독 벨릭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떨 수도 있다(24:25). 또 진리를 접했을 때의 헤롯처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6:20). 그러나 단지 죄책감을 느끼며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다고 해서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단지 예의 바른 것의 엄청난 차이를 알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동안에는 경건하였지만, 고난의 시기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님을 잊었다.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죄를 끊고 세상의 상스럽고 불결한 것들을 버렸지만 육욕적 본성이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납을 녹여서 예쁜 식물이나 동물, 심지어 사람의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납일 뿐이다. 중생하지 못해서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면 계속 육욕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돌이켜라! 죄인이여, 내 말을 들어라! 살려거든 들어라! 당신은 왜 제멋대로 스스로를 속이는가? 어찌하여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당신의 소망을 두는가? 사랑하는 자여, 나를 이해해 달라. 나는 무너지기 직전의 집을 허물고 아름답고 튼튼한, 영원한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무너져 당신이 깔려 죽을 것이다. 성경은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11:7)라고 가르친다.

 

죄인이여,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뒤늦게 눈 뜨는 것보다는 지금 내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낫다.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소망을 붙들지 말라. 성직자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의지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을 의지하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아는 것,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것, 종교적 의무를 소행하는 것, 깨끗하게 사업하는 것,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의지하는가? 철저히, 신속하게 돌이키겠다고 결심하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라. 죄인이여, 손을 씻어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워라(1:23, 2:12, 1:16,17). 명심하라! 계속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pp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