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복음진리와 현대교회(수련회 강의안)

강대식 2015. 4. 24. 09:10

 

청교도수련회강의안2.hwp

목 차

 

(사이렌)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마이클 호튼 ------ 2

(몰렉)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 3

(분수령) 천 마일의 거리를 만드는 분수령-성경의 영감과 권위/ 프란시스 쉐퍼 ------- -- 5

(녹음기) 심판은, 타인을 판단하고 자기는 지키지 못했던 기준에 따라 받는다/ 프란시스 쉐퍼 --- 6

교회는 개혁, 부흥, 건설적 혁명이 필요하다/ 프란시스 쉐퍼 -------------------------7

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프란시스 쉐퍼 ----------------------- 8

목사를 교황으로 만들지 말고, 스스로 진리의 샘을 파야 한다/ 존 라일 --------------- 11

참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존 라일 --------- 1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존 라일 ------------------------ 14

거룩한 삶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끈이다/ 존 칼빈 -------------------------------- 15

사람의 최상의 행복은 거룩함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 17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메이첸 ----------------- 18

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오고,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이다/ 메이첸 ---- 20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 22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마이클 호튼 ----- 24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조셉 얼라인 ----------------------------------------- 26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옥성호 ----------------------------------------- 28

레이 윤겐의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를 읽으며/ 강대식 ------------------------ 31

사막의 교부들/ 레이 윤겐 -------------------------------------------------- 32

행크 헤네그라프, “바벨탑에 갇힌 복음” --------------------------------------- 35

가짜 부흥운동은 거룩보다 행복이 우선이다 / 행크 헤네그라프 --------------------- 38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 대한 나의 회고/ 강대식 ------------------------- 40

청교도 책을 우리는 왜 읽어야 하는가/ 백금산 ---------------------------------- 43

왜 우리는 청교도의 길을 가야 하는가?/ 강대식 --------------------------------- 44

은총을 침해하는 자연/ 프란시스 쉐퍼 ---------------------------------------- 47

청교도아카데미 독서목록1(수정5, 2015-04-14 )/ 강대식 ------------------------ 50

 

(사이렌)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 마이클 호튼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자기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곧 자기들에게 저항할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세속주의란 세속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늘날의 삶의 조건, 삶의 상태(condition)이다. 세속주의는 크게 두 가지 운동의 결과이다. 첫째가 근대성(mordernity)이다. 이 근대성은 계몽주의에 뿌리박고 있다. 계몽주의는 기적, 구원, 계시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법칙, 도덕적 개선, 진보, 이성과 같은 자연주의만을 인정했다. 둘째는 탈현대주의(postmodernity 혹은 후기 현대성)이다. 이 사조는 경험을 이성보다 앞세우며, 영혼의 내적인 실질을 객관적인 외적 세계의 실재들보다 더 강조함으로써, 근대성(모더니티)과 합리주의의 무미건조한 개선주의에 대해 여러 면에서 저항하고 있는 사조다. 둘 다 세속적 운동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종종 무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승복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양보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그냥 이 시대의 정신에 천천히 영합하고 있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 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을 지니고 있는 복음주의적 저변 문화에 깊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개개인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저변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전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구제책은 주님의 가르쳐 주신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담겨 있는 그런 회복이다. 그리고 그 한 문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주권에 대한 초월적이며 영원한 관점 사이의 균형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유주의, 보수주의를 불문하고 크리스천이 너무 자주 장난처럼 들먹이고 있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 된 교회, pp 170-172

 

 

(몰렉)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간음을 범하고 딴 길로 가면 그 다음 세대는 곧 육체적 간음을 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세대는 넘치는 힘으로 이것을 증명한다.

영적 간음을 방치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땅에 육체적 간음이 독버섯처럼 솟아 오른다.

 

1930년대에는 자유주의가 미국의 전 교회를 거의 장악했고 1960년대의 우리 세대는 난잡한 성행위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난잡한 성행위는 영국에도 그러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면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불신자의 극악한 혼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증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탈선은 신랑과 신부의 가장 중심된 관계의 사실을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영적 간음인 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입장에 처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분명히 보아야 된다고 제안한다. 오늘날의 자유신학을 생각해 보라.

 

자유신학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또 신성하신 역사적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자유신학은 성경이 언어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도 부인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인도주의이론(人道主義理論)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내신 말씀보다 더 높인다. 그들은 신()이 아닌 그들 자신들의 관념을 신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와 대화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애써야 하고 예의 발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이론이 영적 간음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 이 영적 간음은 악하다. 육체적 간음보다 훨씬 악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우상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악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훨씬 더 위대한 광명과 축복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옛 몰렉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몰렉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힌놈의 골짜기에 있던 몰렉은 유대인들이 섬겨서는 안 된다고 계속 경계를 받은 이방 신이었다. 그는 초산아(初産兒)를 제물로 받는 신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동우상(銅偶像)의 등에는 구멍이 있는데 거기에 불을 피워놓고 모든 부모들은 벌겋게 달아서 펴진 몰렉의 팔에 그들의 초산아를 바친다고 한다. 부모는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 되고 아이가 몰렉의 손에서 죽을 때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북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늘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 서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게 오는 많은 사람들, 나와 같이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몰렉보다 더 악한 것에 파멸된 자녀들이다.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가 현대신학에 삼키우고 있는데도 그들은 우두커니 곁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다.

 

우리도 지나온 배경에서 이 일들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세대의 후기 기독교는 이 자유신학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흔적, 흘린 모든 눈물, 여러분들이 고의로 유산시킨 모든 아이, 여러분들이 체험한 모든 마약 여행 등은 교회가 탈선하여 불성실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문화권 내에는 그 몸에 몰렉에게 화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대는 몰렉의 손에 있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예술애호가로서 곁에 서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무익한 공론의 장구를 크게 쳐서 귀를 막아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는 통분하며 행동을 해야 한다.

 

자유주의신학을 무엇에 비교하면 좋을까? 그것은 잠언 3020절에 하나님께서 간음하는 여자에 대하여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한 말과 비교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적한 비유인가?

 

그들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다소 침륜된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유주의 신학자(구식 자유주의 신학자이건 새로운 실존주의 신학자이건 간에)는 이 입장에 서 있다. 교회 뿐만 아니라 후기 기독교의 전 문화도 그들의 불성실에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영적 간음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받고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떠나 몰렉에게 미혹되어 아이를 바치는 부모들보다, 더 파괴적인 것을 경배하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더러운 음녀도 없다.

 

우리는 현대의 배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하며 서로 권고하여 아무도 현대 배도에 동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도 우리의 구주와 주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영적 간음 가운데서라도 매일매일 본질에 있어서나 현실생활에 있어서 신성하신 신랑의 다정하고 참된 신부가 되어야 한다.

 

신랑은 우리에게 교리적 충실성을 원하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교리적 충실성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사랑이다. 논리에서가 아니라 실천 생활에서의 사랑을 원하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 프란시스 쉐퍼, 20세기말의 교회, pp 161-183

 

 

 

 

 

 

 

(분수령) 천 마일의 거리를 만드는 분수령-성경의 영감과 권위/ 프란시스 쉐퍼

 

스위스에 있는 우리 주거지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높은 바위 능선이 하나 있고 양쪽에는 계곡이 있다. 한번은 능선 비탈에 눈이 덮여 있을 때 거기 올라간 적이 있었다. 눈은 거기에 고스란히 덮여 있었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연결은 환상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눈이 커다란 분수령 위에 차곡차곡 메워진 채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눈더미 한쪽이 녹으면 한쪽 계속으로 흘러내려 가고, 그 옆에 있던 눈더미는 녹아 다른 쪽 계곡으로 흘러 내려갔다.

 

그런데 한 쪽 능선에서 녹은 눈은 그 능선 양쪽 비탈을 타고 계속으로 흘러내려가 조그마한 개울을 이루고 이 개울 물은 라인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라인 강물은 독일을 가로질러 흘러 북해의 차가운 물에 삼켜져 버린다. 그런데 능선 다른 쪽 분수령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 눈 녹은 물은 깎아지른 듯한 능선 벽을 타고 급류로 내려와 론 계곡으로 들어간다. 이 물은 락 레망(제네바 호수)으로 흘러들어가 땅 밑으로 해서 론 강으로 또다시 흘러, 프랑스를 통과한 다음 따뜻한 지중해의 물과 섞인다.

 

눈은 고스란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듯이 분수령에 놓여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녹아 흘러내려 그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에는 문자 그대로 천 마일 이상이나 서로 떨어지게 된다. 그것이 분수령이다. 그것이 바로 분수령의 본질이다. 분수령은 가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같이 보이거나, 적어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매우 다른 상황으로 끝을 맺는 것 사이에 아주 명확한 선을 그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분수령에는 구획의 선이 있다.

 

이 예화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세계와 무슨 관련성을 가지는가? 나는 이 예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매우 정확한 묘사라고 말하고 싶다. 복음주의자들은 오늘날 성경의 영감과 권위의 본질에 관한 분수령에 직면하고 있다.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견해를 조절한 나머지 성경의 더할 나위 없는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는 자들의 수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점점 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미묘한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다. 능선 위에 나란이 놓여 있는 눈과 같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얼핏 보아서는 극히 최근까지 복음주의자들이 믿어 오던 것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견해는 능선 위에 나란이 덮여 있던 눈처럼 집요하게 그 행방을 추적해 보면 종국에 가서는 천 마일 이상이나 차이가 나 버린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차이처럼 여겨지던 것이 종국에 가서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낸다. 그것은 우리가 예측하듯이 신학과 교리 및 영적 문제들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문제 및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주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들에 있어서까지도 큰 차이를 가져 온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완벽한 권위에 대해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신학적인 의미와 완벽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 pp 45-47

 

(녹음기) 심판은, 타인을 판단하고 자기는 지키지 못했던 기준에 따라 받는다/ 프란시스 쉐퍼

 

사람이 태어날 때 목에 녹음기를 달고 나온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녹음기는 도덕적 판단을 할 때만 작동한다고 상상해 보자. 미적 판단 등등은 기록되지 않으며, 도덕적 판단은 빠지지 않고 기록되는 녹음기이다. 인간의 한평생에 걸쳐 진정한 도덕적 동기가 낱낱이 녹음기에 기록된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죽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녹음기를 틀어놓고,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녹음된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들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듣는다. “너는 이 일을 잘못했고, 너는 저 일을 잘못했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도덕적 판단들이 쏟아져 나오고, 하나님께서는 돌아 서서 너 자신의 말을 근거로 해서 너는 그러한 도덕적 기준을 지켜 왔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침묵한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타인을 구속하려 했던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도덕적 진술들(너희들이 타인을 구속하고 비난하는 데에 기준을 삼았던 판단들)에 따라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당연한 도덕적 진술들보다 못할지라도 상관치 않겠다. 너희들은 죄책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말씀하신다. 목소리를 높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이 완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몰랐던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타인을 판단하고 스스로는 지키지 못했던 것에 따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참으로, 나는 유죄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성경이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성경이 없는 사람에게 말하는 마지막 두 절인 로마서 2:15,16에서 이런 개념으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성경은 이 내용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12:2,3을 읽어보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나는 사람들이 남들에게 쏟아부었던 자신의 도덕적 판단들, 자신의 거친 말들을 실제로 듣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공의로우며,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0: 2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구절을 읽고 당황한 복음주의자들이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너희가 한 일에 따라 심판할 것이며, 너희 일은 실패할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타인을 판단했던 자신들의 도덕적 판단을 근거로 할 때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다루시는 데에 공의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 을 구속한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96-98

교회는 개혁, 부흥, 건설적 혁명이 필요하다/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의 교회에는 개혁, 부흥, 건설적 혁명이 필요하다.

개혁(reformation)과 부흥(revival)을 대립되는 두 단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두 단어 모두 회복하다(restore)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개혁은 순수한 교리를 되찾는 것이고, 부흥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되찾는 것이다.

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부흥은 성령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되는 것이다.

 

교회사의 위대한 시점들이 언제 찾아 왔는가?

개혁과 부흥이 동시에 실행됨으로써 교회가 순수한 교리로 되돌아가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권능을 맛보며 살게 된 때에 찾아 오지 않았던가?

개혁을 제대로 수행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참된 부흥이 오지 않는다.

부흥 없이는 개혁도 완성될 수 없다.

 

이렇게 해결과 부흥이 맞물려 실행된다면 이 시대에 가히 혁명적인 결과가 생길 것이다.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자유주의 교회에만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복음주의 정통교회에서도 창조적인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개혁과 부흥의 실재를 알자. 그리하여 이 천박하고 어두운 세상에

순수한 교리를 되찾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자.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Death in the city), p 8

 

 

 

 

 

 

 

 

 

 

 

 

 

 

 

 

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는 굶주려 있다. 사랑에, 미에, 의미에, 항구적인 도덕과 법에 굶주려 있다. “죽음의 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풍성한 위로자에 대한 가시지 않는 갈증이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1;16).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위로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만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의 의의를 잊었기 때문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복음주의와 정통신앙권 안에서는 사람의 목적을 말할 때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해한 성경 교훈의 뜻은 완전히 바뀐다. 성경대로 충실히 대답하려면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하고 완전하게 인용해야 한다. 이 후반부 답이 인생에 대한 관점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명을 절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관련된다.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고, 그분에게 채우심을 받고, 그로써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방관자에게도 기독교가 염세 교리를 믿는다고 결론짓도록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시는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환경이 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궁극적이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우리 인격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에 채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 파괴적인 지성주의가 존재하긴 하나, 이것이 말하는 지식이란 참된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전인이 채움을 받아야 한다. , 사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지만 이들에게서 기독교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삶의 기쁨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전인이 채움을 받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한 채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등을 돌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 옛 유대인들은 탈기독교 세계를 사는 현대인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상들을 찾아갔으나, 그래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문화를 건축하였다. 물론 그들의 신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물질주의를 전부로 삼고 모든 것을 질량, 에너지, 운동으로 축소시킨 우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우리 세대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에게로 갔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그 이후 민족들도 거짓된 신들에게로 갔으나, 그들은 우리 세대만큼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지는 않았다. 결론으로 다음 사실을 이해하자. 인격적인 위로자만이 인격적 존재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존재하시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 즉 유대-기독교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이 일을 넉넉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충분한 위로자이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18). 히브리 성경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생의 진정한 해답,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는 명제적 계시- 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의 시대 상황이나 탈기독교 세계의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했다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 아래 놓여 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도 거기서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그분과 분리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 역시 충분한 위로자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도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1:19). 탈기독교 세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 이 문화가 성경적인 종교개혁 사상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그 진리를 외면해 왔으므로 다시 진리로 돌아서는 일이 없이는 도시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될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문화를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할 말은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하는 오직 한 자기밖에 없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고, 오늘 우리 시대가 또한 그러하다.

 

어떤 죽음인가? 인적이 끊긴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죽음이다. 인격성이 자취를 감췄다. 비슷하게 무섭고 소름끼치는 고독을 그린 호퍼 같은 미국 화가들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토대로 교회와 문화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시의 죽음은 점차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우리 문화가 기독교라는 기반을 내동댕이친 뒤에도 예전처럼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충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에게 등을 돌렸으므로, 여러분의 도시에는, 여러분의 문화에는 죽음이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역사 안에 들어와 일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일하신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그냥 군사나 경제상의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우리 세대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 교리들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지만,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역사의 실재들에 관해 보여오신 교훈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 관점을 갖고 있다면 싸구려 해결책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8-25

 

 

 

 

 

 

 

 

 

 

 

 

 

 

 

 

 

 

 

 

 

 

 

 

 

 

 

 

목사를 교황으로 만들지 말고, 스스로 진리의 샘을 파야 한다/ 존 라일

 

베드로는 대단한 은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안디옥에서 잘못을 범하였다. 목사는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일 수가 있으며, 그의 행위와 설교로 말미암아 충분한 경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를 교황으로 만들어 버리지 말고,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나란히 놓지 않도록 하라. 그가 스스로 자신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도록 만들지 말라.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목사로 하여금 잘못하게 만드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유다의 왕인 요아스에 대해 성경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대하24:2)라고 기록하는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의 신앙은 죽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신앙은 죽게 될 것이며, 목사가 곁길로 나아가면 우리의 신앙도 잘못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인간 위에 세워진 신앙에 만족하지 말라. 단순히 나는 목사가 나에게 이러 저러한 것을 말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만족하지 말라.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이러한 것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라고 말하도록 애쓰라.

 

만일 우리가 확고한 평화를 가지고자 한다면 스스로 진리의 샘을 파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지속적인 위안을 가지고자 한다면, 스스로 생명의 샘을 찾아가서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를 길어 올려야 한다.

 

성직자들은 우리의 신앙과 무관할 수도 있다. 보이는 교회는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확고히 서 있을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가지고 있기에 아무도 그를 결코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사를 단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자로 생각하여 경의를 표해야 하며, 그의 사역을 생각하여 사랑으로 그를 고귀하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깊이 기억해야 할 일은 절대무오는 신앙심 깊은 성직자에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절대 불변의 사실이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590-591

 

 

 

 

 

 

 

 

 

참 교회에 속한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존 라일

 

참 교회는 마지막 날까지 틀림없이 견디는 유일한 교회이다. 그 어느 것도 이것을 깨뜨리거나 부술 수 없다. 이 교회에 속한 자들은 핍박과 눌림을 받으며 투옥되거나 매를 맞거나 참수되거나 화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 교회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 교회는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난다. 이것은 불과 얼음을 뚫고 계속 살아남는다. 어느 한 쪽에서 눌림을 받으면, 다른 쪽에서 솟아난다.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망치를 깨부수는 보루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망치가 이 교회에 부딪혀 깨지고 말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불에 타오르면서도 소멸되지는 않는 가시덤불이다.

 

참 교회는 그에 속한 자가 아무도 멸망할 수 없는 유일한 교회이다. 일단 이 교회의 회원으로 등록이 되면, 죄인들은 영원히 안전하다. 그들은 결코 내어 쫓기지 않는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자 하나님의 끊임없는 중보,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날마다 새롭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능력이 정원에 울타리를 치듯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루고 있는 뼈 하나라도 결코 부러지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양떼의 단 한 마리도 그의 손에서 결코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다.

 

참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행하는 교회이다. 그 회원들은 작은 양떼 즉 세상의 아들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수가 매우 적은 무리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하나 둘, 저기에 두 셋, 또 이 지역에 조금, 저 지역에 조금 있다. 그러나 우주를 뒤흔드는 자 또는 기도로써 자기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자들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한 나라의 생명의 피이며, 그들이 속한 나라의 방패이자 방어물 그리고 버팀목의 지주가 된다.

 

참 교회는 만물이 종국에 이를 때 진실로 영화롭게 될 교회이다. 지상의 모든 영광이 사라질 때, 이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아무 흠 없이 드러날 것이다. 이 땅의 보좌와 지배력, 권력은 아무 가치도 없게 될 것이다. 위엄과 직위와 천부의 재능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장자들의 교회는 마지막 날,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 기뻐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보석들이 모이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게 될 때에는 감독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들의 구별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한 교회만이 있을 것이며, 이것은 바로 택함 받은 자들의 교회이다.

 

참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참 성직자들이 힘써 일하는 교회이다. 참 성직자에게 그가 설교하는 건물을 꽉 채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교인들이 강단에 더욱 많이 몰려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에게 속한 무리가 점점 더 많아지는 일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에게는 교인들이 거듭나는것 외에는 어느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또 회심하여 그리스도께 이끌려 오는 영혼이 없다면, 또 세상에서 나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참 교회에 속하는 자들이 많아지지 않는다면 그에게 이 모든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참 교회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꼭 속해야만 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영혼과 똑같은 존재이다. 우리에게 신앙의 형식과 껍데기는 있으나 그 안에 실체와 생명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외적인 특권을 누리며 많은 빛과 지식 그리고 기회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 교회 혹은 저 교회에 합류하여 성찬식에 참석하고 또 어떤 특정한 형식을 거치기만 한다면, 그들의 영혼에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미혹이다. 이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자마다 모두 다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느 교회에 속한 충실한 교인이라 할지라도, 참 교회에는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그리고 만일 우리가 이 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았으리라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10장 교회, pp 367-36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존 라일

 

거짓 교리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우리의 생각을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기도로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며 날마다 부지런히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라. 성경의 내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라. 성경에 무지한 것이 모든 오류의 근원이다. 오늘날 진리를 왜곡하고 참믿음을 버리는 사태가 빚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얕기 때문이다.

 

철도와 전신의 발달로 인해 생활이 한층 분주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 많은 신자들이 홀로 성경을 읽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를 못한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국민이 지금의 영국 국민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 뿐만 아니라(4:14),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는 간교한 거짓 교사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독자들이여, 이 조언을 기억하고 자신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라. 늘 그랬듯이, 지금도 성경에 정통한 사람만이 훌륭한 신학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보여 주신 대로, 중요한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책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고, 그 검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라.

 

성경 지식을 쌓는 데는 왕도가 없다. 부지런히 힘써 공을 들이지 않으면 누구도 성경에 능통할 수 없다(18:24). 찰스 시므온은 그만의 특유한 말투로 칭의는 믿음으로 얻지만, 성경 지식은 행위로 얻는다라고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성실하게 읽는 수고보다 더 풍성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16-218

 

 

 

 

 

 

 

 

 

 

 

 

 

 

거룩한 삶이 하나님과의 연합의 끈이다/ 존 칼빈

 

중생의 목표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양자가 된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도록 하는 데 있다(4:5,벧후1:10).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는 크게 두 가지 면이 있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 그대로는 의를 사랑하는 일에 도무지 끌리지 않으며, 따라서 그처럼 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심어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의를 추구해 가는 동안 잘못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한 가지 원리를 성경이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갖가지 놀라운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니우리도 거룩해야 한다(19:2,벧전1:15-16)고 가르치는데, 과연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마치 양 같이 흩어져서 이 세상의 미궁 속을 헤메고 다녔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다시 그의 울타리 안에 있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거룩함이 그 연합의 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그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가득 차게 되고,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악이나 부정과는 어떠한 교제도 나누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는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35:8). 만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줄곧 악과 부패 속에 뒹군다면, 우리를 그 속에서 건져 구원해내신 목적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성경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는 자니이다라고 한다(15:1-2,24:3-4).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소가 마치 더러운 흙이 가득한 마구간처럼 된다면 그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속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주께서는 오로지 한 가지 조건,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배신으로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계시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의 자녀임을 드러내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일일 수밖에 없다(1:6,5:1,요일3:1).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씻으셔서 우리를 정결케 하셨고, 또한 세례를 통해서 이 정결함을 전달해 주셨으므로, 우리가 다시 우리 자신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정말 가당치 않은 일이다(5:26,10:10,고전6:11,벧전1: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여 주셔서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으니, 흠과 티가 없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5:23-33,고전6:15,15:3-6).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우셨으니, 이 땅의 것들에 대한 사랑을 뒤로 제쳐두고 전심으로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합당하다(3:1).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성전으로 드리셨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마땅하다(고전3:16,고후6:16).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장차 하늘에 속한 썩지 않는 영광에 들어가 쇠하여지지 않는 빛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므로(벧전5:4), 주의 날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순결하고도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살전5:23,1:10). 이것들이야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에 있다. 그런 지식은 오직 영혼 전체가 그것에 사로잡히고 내면의 깊은 마음에 그 진리가 자리를 잡아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교리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전해져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연약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매일매일의 여정에서 조금씩은 전진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날마다 주님의 길을 걸으며 전진하도록 하자. 그리고 자꾸 실패한다고 해서 절대로 좌절하지도 말자. 바라는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다면, 오직 한 마음으로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면, 절대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찾고 추구해야 할 일이다. 이 연약한 육체를 벗고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에 들어갈 그날이 오면 마침내 그 완전한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96-202

 

 

 

 

 

 

 

 

 

 

 

 

 

 

 

 

 

 

 

사람의 최상의 행복은 거룩함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성령의 통상적인 감화로 역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가 특이한 은사들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고 진수가 되는 행복을 불러온다. 사람의 최상의 행복은 거룩함에 있다. 이성을 가진 피조물이 모든 선의 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은 바로 이 거룩으로 말미암는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과, 영혼의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영혼이 그런 중에서 살아 약동하여 그러한 일들이 원활하게 될 때에 사람은 어떤 다른 것이 없어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는 다른 어떤 것들을 아무리 크게 누리고 특권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행복해질 수 없다.

 

성령의 특이한 모든 은사들은 다 성령의 통상적인 감화로 영혼이 거룩한 품격에 이르게 하기 위해 쓰이는 수단이다.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이적 행하는 은사는 영혼의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복음을 선전하고 널리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그러한 특이한 은사들을 주신다.

 

복음의 목적은 어둠에서 빛으로,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사람을 옮아가게 하는 데 있다. 곧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려는 데 있다. 모든 특이한 은사들은 죄인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성령의 통상적인 감화의 열매인 거룩 속에 성도들을 세워 주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목적은 언제나 수단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격언이다. 왜냐하면 수단이 목적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수단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적이 수단에 비해 월등히 탁월함을 인정해야 한다.

 

- 조나단 에드워즈, 고전 13장 사랑, pp 54-55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현재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전통적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상위한 일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별개 종류의 종교에 속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씩 순차로 그의 적에게 양도한 후에 남아 있는 잔여물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고 별종의 범주에 속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종교이다. 그 근원은 자연주의이다.

 

기독교와 현대과학을 타협시키려는 자유주의의 기도(企圖)는 실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모든 특징을 포기함으로써 그 남아 있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그 막연한 종교적 갈망에 불과한 것이다. pp14-19

 

현대는 안일과 환락의 시대가 아니고 열성과 기도로써 역사할 시대다. 무서운 위기가 확실히 교회 중에서 발생하고 있다. 복음적 교회의 교직자 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대군(大軍)이 있다. 전통적 용어의 이중적 사용에 의하여 또한 견해의 상위를 단순히 성경해석상의 상위에 불과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에 의하여 신앙의 토대 바로 그것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침입하였다.

 

교회는 성경의 속박이 거의 공공연하게 포기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가 무용한 번쇠사의 유치장으로 퇴락할 수 있는 정도의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는 절망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의 희망을 모래 위에 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의 희망은 위기에 대한 맹목적 무지 위에 세워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 위에 홀로 세워야 한다. 교직자나 성도가 다같이 이 시련의 날에 있어서는 새로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경주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사랑과 충성으로 감행될 것이며 당파적 열정이나 개인적 원한은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십자가의 복음과는 상이한 복음을 전한다면 배척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여, 원하옵기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결정을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학대보다 더 암흑한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인도하였다. 우리는 이교주의가 기독교의 명칭하에 교회 중에 침입하였음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2세기에 있어서도 동일한 싸움이 있었고 또한 그것은 승리로써 종결하였다. 다른 일면에서 현대 자유주의는 인간의 공적에 의존한 중세의 율법주의에 흡사하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영혼은 시련을 받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피로써 우리를 대속하신 구주를 신뢰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그의 뜻을 성취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현존의 교회가 자유주의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여 사람들이 영혼의 근본적 요구의 만족을 현존교회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 외부에서 발견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단체가 형성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구속함을 받은 남녀성도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단합하여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경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단체만이 홀로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의 마음 속에 왕왕히 망각하고 있는 한 가지 갈망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형제들과 교제하려는 심각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갈망이다. 그러나 현재의 연합들은 주에게 반항하는 세상과의 연합을 의미할 때가 많다. 평화의 매는 줄로 이루어진 성령의 참된 연합과는 얼마나 상이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한 갈망이 진실로 이루어진 때가 있다. 현재와 같은 투쟁의 시대에 있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식탁의 주위에 충심에서 집합하는 회중이 있다. 진실로 목사다운 목사가 있다. 그러나 많은 도성에 있어서 이러한 회중은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의 투쟁에 피로한 나머지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여 교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슬프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역시 너무나 빈번히 이 세상의 요소를 발견한다. 설교자는 명상과 능력의 은밀한 장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설교를 풍부케 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없이 인간의 지혜와 심대한 죄의 문제에 대한 안일한 해결책으로 그의 설교를 채운다. 세상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당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평화를 구하려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비참한 것이다.

 

투쟁으로부터 피할 곳은 없는가? 사람이 영생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휴식처는 없는가? 세상의 투쟁들을 다 망각하고, 십자가의 발 아래 차고 넘치는 감사의 희열 속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2인이나 3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은 없는가? 만일 이러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그 집의 문지방 아래서는 피로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 나올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pp 229-233

 

 

 

 

 

 

 

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오고,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십자가의 위대한 사건이다/ G.메이첸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메시지의 두 거대한 전제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 그리고 죄의 현실- 눈이 멀어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신론과 인간론은 기독교적 관점과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기독교 메시지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메시지를 담은 이 책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오는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주어진 계시들을 성경이 확증하고 놀랍도록 풍성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 말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말은 양심에 의해 입증된 것을 확증해 준다. 성경은 또한 전적으로 세로운 계시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 새로운 계시란 죄 있는 사람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그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열렸다. , 1900년 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영원한 아들이 사람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 하나의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았고, 신약성경 전체의 중심과 핵심이 바로 이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구원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유일성이 있다. 기독교의 모든 관념들은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될 수 있지만, 그 다른 종교 속에 기독교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관념들의 종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대한 서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그 사건이 없다면 세계는 암흑이며 인류는 죄책 아래에서 잃어버린 바 된다.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죄 때문에, 영원한 진리가 오직 절망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내어 주셨을 때 이루신 놀라운 일 덕분에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성경의 내용에 대한 이 견해는 반대에 부딪히곤 했다.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렇게도 오래 전에 기록된 것을 의존해야 하는가? 구원을 위해서 곰팡내 나는 기록을 조사해야 하는가? 그 당시 팔레스타인 역사에 대한 노련한 연구자가 오늘날의 사제가 되며, 이 사제들의 은혜로운 개입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그것 대신 역사에 의존하지 않는 구원, 곧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는 것에만 의존하는 구원을 찾을 수는 없는가?

 

이 반대는 복음 기록의 진리성에 대한 일차적인 증거들 중 하나를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적 경험 속에서 발견되는 증거로, 구원은 오래 전에 발생한 사건에 근거하고 있지만, 그 사건은 오늘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 기록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신약성경은 오래 전 어느 날 아침에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 역시 과거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을 통해서 예수가 정말로 오늘날 살아 있는 구주임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 치명적 오류가 숨어 있다. 그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 오류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방금 말한 기독교인의 경험은 복음 메시지를 확증해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러나 그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오직 그 경험이면 된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다. 마음속으로 지금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있다면,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 경험을 견지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성경 비평의 결과와 전적으로 무관할 수 있지 않은가? 나사렛 예수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역사가 말하는 것과 무관하게, 그의 죽음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혹은 그가 부활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역사가 무엇이라 말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여전히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렇게 유지되는 경험이 기독교의 경험이 아니라는 데 있다. 종교적 경험일 수는 있지만 기독교의 경험은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경험은 어떤 사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왔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복음 메시지를 들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구속의 일을 완성함으로, 내가 성취할려고 노력하던 것이 이미 성취되었음을 배웠다. 만약 그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는데 내가 그 성취에 대한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아직 죄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독교적 삶은 신약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기독교적 경험은 문서의 증거를 확증할 때 정당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로 문서의 증거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복음 이야기가 등장하는 문서의 이른 연대, 저자에 관한 증거, 복음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내적인 증거, 거짓말이나 신화에 근거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 등에 의해서 복음 이야기가 사실임을 안다. 이 증거는 현재의 경험에 의해 영광스럽게 확증된다. 이 경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건져 주는, 놀랍도록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확신을 문서의 증거에 덧붙여 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기독교 경험이 확신시켜 줄 때에 기독교 경험은 정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생했든지 아니든지, 경험 자체가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경험은 예쁜 꽃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대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꽃을 뿌리인 복된 책에서 끊어 내면 곧 시들어서 죽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에 포함되어 있는 계시는 영원한 진리를 재확증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눈이 멀어 진리가 모호해졌으므로 재확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행동의 의미를 보여주는 계시이기도 하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12-116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유다가 신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인정과 인기를 쫓는다고 꾸짖으셨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라 ---”(6: 14-15) 바울도 비슷하게 그가 대단한 사도들이라 부른 사람들에 맞서 그의 사역을 변호했다. 이들은 절세의 언변과 그리스 사람들의 입맛에 잘 맞게 한 메시지로 그들 자신에게 제자들을 끌어들였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11:4-6)

 

바울은 로마서 말미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6:17-18).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올 해주는 선생들에게 모일 것이라고 경고했다(딤후3:2-4,4:3-5). 현대적인 적용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을 바울은 이 본문에서 불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은 오늘날 성공하는 미국 종교의 단골 메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더 효율적이고 현대인에게 맞는다는 식으로 광고된다. 예일 대학교의 신학자인 조지 린드백은 이렇게 논평한다. “노만 빈센트 필의 시대에 자유주의적인 청중들은 성경을 가지고 노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로버트 슐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것에 더 열중하고 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적극적 사고방식의 능력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보수적인 개신교도들로부터 기독교 선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버리고 낙관적인 자기계발의 메시지를 선호했다는 이유로 맹비난을 당했다.

 

수정교회의 설립 목사이며 빈센트 필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로버트 슐러는 이 순수한 미국적 복음을 복음주의 진영에서 더욱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 자아 사랑, 당신을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라그리고 행복의 태도등 슐러의 저서들은 그의 텔레비전 사역의 힘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됐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를 세속문화에 순응시키는 일에 있어 자유주의적인 경쟁자들을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분명히 앞서 가고 있다. 어떤 세속적 자기계발 스승도 이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말씀 운동(Word of Faith movement) 으로 알려진 적극적 사고방식의 오순절주의적 버전이 땅 끝까지 형통복음(prosperity gospel)을 확산시키고 있다. 널리 선전되는 것처럼 2/3세계(과거 제3세계를 일컫는 말, 이 범주에 들어가는 국가들이 전 세계의 2/3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에서 기독교의 팽창을 자축하는 것은, 형통복음이 적극적 사고방식의 가장 폭발적인 버전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제 되어야 한다.

 

상당수 신학자들이 이러한 형통의 메시지와 고대 영지주의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하곤 한다. 믿음의 말씀 메시지는 마치 저 고대의 이단처럼 영과 물질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이원론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비밀스러운 원리를 습득함으로써 인간이 처한 외적인 환경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자연이라고 흔히들 부르는) 창조 세계 자체는 타락했지만, 내적 자아는 신성하다고 이 교설의 교사들은 주장한다. “당신 안에 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케니스 코플런드는 이렇게 가르친다. “당선이 신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일부고 하나님의 한 조각이다.”

 

조엘 오스틴의 화려한 성공보다 미국판 교회의 포로 상태를 더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그것이 어떤 신학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를 보여 준다.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됐다면, 오스틴은 케니스 코플런드와 베니 힌의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으라의 철학을 주류의 반열에 올려놓는 의아한 성공을 거뒀다.

 

오스틴은 오늘날 미국 대중 종교를 특징짓는 도덕론적이고 심리 요법적인 이신론을 다소 덜 극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법칙과 원리가 있어서,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면 이것들을 사용해야 하고, 당신이 그것들을 준수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선언만 하라. 그러면 형통이 당신을 따라온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는 구매 대리인이다.

 

노골적으로 형통의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보다 수가 적을지 모르지만, 유명한 인사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들(제이크, 베니 힌, 조엘 오스틴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은 각별히 미국적인 입맛에 맞는 이교적인 세계관을 유포하는 공급업자들이다. 그 밑바닥에는 루터가 영광의 신학이라 한 사상이 깔려 있다. 하나님이 고난의 삶을 살고 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을, 어떻게 하면 사다리를 기어올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반대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거치고 어리석게 보이는 메시지다.

미국인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가 주는 매력은, 조엘 오스틴의 베스트 셀러인 긍정의 힘잘 되는 나에서 거둔 숨이 막힐 정도의 성공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친화력 있는 인품과 편안한 스타일을 넘어서, 오스틴이 보여 준 전대미문의 매력은 미국제 복음의 단순하고 부드러운 샘플과 연결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와 문화적 요소의 혼합물이다. 지금은 컴팩센터의 소유주며 휴스턴에 있는 레이크우드 교회의 그 목사가,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를 타는 초상류충 복음 전도자이면서도 늘 멋진 말을 하는 옆집 아저씨같은 이미지를 우연히 지닌 것은 아니다. 오스틴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대형 교회, 그리고 다른 구도자 중심의 사역과 구별하기가 힘든 용어들과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전달되고 있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93-98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마이클 호튼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자기 연민과 주관주의의 압력들은 예배의 대상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자아를 바꾸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실재에 대한 해석상의 권위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자아와 바꾸어 놓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성품(고유한 신학)과 사람(인간론)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명제적 진술들로 가득 차 있는 한, 신학에 대한 거부는 곧 성경에 대한 거부다.

 

성경은 하나님과 자아와 인생 및 역사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물음들에 대해 단호하게 선언한다. 성경은 궁극적인 문제와 그 해결을 우리가 정의해 나갈 때 우선적인 결정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사태들을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신학이다. 만약 우리가 신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계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실재,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게 된다.

 

복음주의자들은 융과 매슬로(Maslow)휴머니즘(인본주의)적인 심리학의 아버지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되려 기독교계의 출판물이나 설교, 방송사업 전체가 마음 안에 있는 신과 인격적이며 주관적이며 내부지향적인 체험에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우리의 객관적인 죄와 죄책을 위해 거의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은 이제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만약 종교라는 것이 어떤 실천적인의미를 가지려고 한다면, 종교는 나 자신을 좀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나를 내 속으로 들여보내 주어서, 영적인 체험들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증들을 생각 보라. 개인적인 체험들을 나누는 일이 공동 기도와 공동 성경 연구,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다.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저 나사렛 사람의 생애와 시대를 대신해 버렸다. 너무나도 흔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행하심과 죽으심에 대해서보다는 목회자와 그의 삶이 성숙되는 것과 영성 캠프에서의 영적 위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있다. 그런 사실은 토크쇼가 독서를 대체해 버리고, 우리가 실제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우리 자신의 체험일 뿐인 그런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조차도, 객관적인 진리로부터 후퇴하고 있는 현대 문화에 타협하고 있는 현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헌터는 우리가 알려진것들로부터 신념으로 이동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그 궁극적인 목적지인 감정(느낌)에 도달하기까지 종교적 견해로 저락(低落)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초대 교회가 그렇게 기록되었다.’ 는 확신을 변호했으며, 중세 교회가 교회가 그렇게 말한다.’는 확신을 변호했다면,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슬로건에 호소하고 있다.

 

오늘날의 요구는 설교가 반드시 실천적이어야 하며 매일의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며 인생을 좀더 성취하는 삶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임스 헌터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 선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진리의 주관적 적용에 대한 관심으로 강조점이 변천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구절이 무슨 뜻인가?’를 묻지 않고 이 구절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고 있다. 자아는 만물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바로 세속적 휴머니즘의 정의라고 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은 다른 것들은 몰아내고 있으면서도 이 미끼만은 꿀꺽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구속 자체에 대하여 변하고 있는 정의들에 대해 우리의 눈길을 돌리도록 만든다. 죄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라고 재정의되고, 구원이 세속주의의 사상들에 따라, 심리학적인 범주 안에서 재정의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는 옛날 문제들을 대신해서 전적으로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 문제들에 맞추어 새로운 해결책들이 등장하고 있다.

 

만약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는 것이 문제라면, 속죄와 칭의가 그 해결책이다. 그러나 만약 기능 장애와 낮은 자긍심과 채워지지 않은 필요들이 궁극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들은 신학적 용어로가 아니라 치유적 용어로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저 현대의 청중을 위해 기독교 메시지를 상황화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현대의 청중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인 인구의 다섯 명 가운데 네 명 이상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저 밖에 있는 세속적 휴머니스트들일 뿐이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복음주의 정통성을 구성하는 중생한 크리스천들77%가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세속적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구원에 이르면, ‘중생한복음주의적 크리스천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복음주의자들이 비기독교들보다 이런 자수성가 하라는 자력 성공 프로그램에 더 동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구속받는 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선함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진정, 이런 생각의 틀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그저 일종의 도덕적인 안내자로서의 역할 외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이며 세상에 있을 때는 세속주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 복음주의자들에게 조지 바나가 우리 교회들에서는 현재 구원의 본질에 대해 어떤 가르침들이 가르쳐지고 있습니까?” 라고 한 질문을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 교회, pp 87-92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조셉 얼라인

 

사탄은 가짜 회개를 많이 만들어놓고 이 사람은 이 방법으로, 저 사람은 저 방법으로 속인다. 교묘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수능란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단지 이름뿐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런 것이 회개라면, 사데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살았다 하는 이름’(3:1)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단지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토하여 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3:14-16).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지 않고(딤후2:19),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1:16).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안에 사는 것이 정말 회개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신앙고백이라는 것 등으로 회개가 입증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25:11,12). 그리스도를 전한 설교자들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도 악을 행하기 때문에 쫓겨날 것이다(7:22,23).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술사 시몬도 다른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았다. ‘세례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회개와 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세례증서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천사들이 그 증서만 있으면 천국문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받는 것이 곧 회개이고 중생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 713,14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이런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7:14)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원의 문은 아주 넓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넓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문이 그토록 넓다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 중에서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9:27).

 

세례 때 무엇을 받았든 간에 이후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는 철저한 변화를 통해 확실히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6:7). 당신이 거룩하고, 참되고, 자신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구원받을 수 없다(12;14, 15:14).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5:20).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18:10)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가 있어야 한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박애를 포함하고 은혜가 이성을 포함하듯이 경건은 도덕성을 포함한다. 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도 배교할 수 있으며(6:4-6), 총독 벨릭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떨 수도 있다(24:25). 또 진리를 접했을 때의 헤롯처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6:20). 그러나 단지 죄책감을 느끼며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다고 해서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단지 예의 바른 것의 엄청난 차이를 알지 못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동안에는 경건하였지만, 고난의 시기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님을 잊었다.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죄를 끊고 세상의 상스럽고 불결한 것들을 버렸지만 육욕적 본성이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납을 녹여서 예쁜 식물이나 동물, 심지어 사람의 모양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납일 뿐이다. 중생하지 못해서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면 계속 육욕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돌이켜라! 죄인이여, 내 말을 들어라! 살려거든 들어라! 당신은 왜 제멋대로 스스로를 속이는가? 어찌하여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당신의 소망을 두는가? 사랑하는 자여, 나를 이해해 달라. 나는 무너지기 직전의 집을 허물고 아름답고 튼튼한, 영원한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무너져 당신이 깔려 죽을 것이다. 성경은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11:7)라고 가르친다.

 

죄인이여,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뒤늦게 눈 뜨는 것보다는 지금 내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낫다.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소망을 붙들지 말라. 성직자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의지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을 의지하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아는 것, 교양 있고 예의 바른 것,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 깨끗하게 사업하는 것,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의지하는가? 철저히, 신속하게 돌이키겠다고 결심하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라. 죄인이여, 손을 씻어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워라(1:23, 2:12, 1:16,17). 명심하라! 계속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pp 18-29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

 

심리학의 모든 중심은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다. 성경의 모든 중심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기독교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자존심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본성과 전혀 맞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가 자기 사랑과 자기 수용을 위해 하나님까지도 수단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심리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1)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심리학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이 행복 달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큰 증거이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주장한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심리학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가 나 자신을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다름없다.” pp. 118-9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발버둥치는 심리학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더 작아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는 기독교가 얼마나 다른가? 이 두 가지의 가치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p.120

 

2)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

3) 왜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인지를 알려면 심리치료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와 융을 알아야 한다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이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인간 심리를 설명하는 데에 중심이 되도록 한 점이다.

프로이트는 꿈, 농담, 실수 행위 등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일반에게 각인시키고, 인간의 성적 본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유아 성욕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계속해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규정하고 정신분석의 방법을 종교, 사회, 문명, 예술들의 영역에 응용하는 데 힘썼다.” 123-124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평가

1) 프로이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과학 발전이 이루어 낼 미래를 믿으며 영적 세계를 부정했다.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란 하나의 환상 또는 환영이라고 보았다. 또한 죽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했다. 또 찰스 다윈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냈다.

2) 무의식의 발견은 인간 행복을 향한 중요한 시발점이 아니라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인간 실종의 시작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 있는 열망은 근친상간에의 열망, 잔혹 행위와 살인에의 열망이다.”

 

프로이트는 인생의 해답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습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답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인간 더 나아가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주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카를 융

 

오늘의 기독교가 융에게 직, 간접으로 받은 영향

1) 융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2) 프로이트는 기독교를 부정한 반면 융은 기독교를 신화화했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융은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로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망각된 기억들과 욕망들을 중심으로 그의 이론을 전개한다. 그는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을 구분했다. 집단 무의식은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개인 무의식과는 달리 인류 보편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이전 인간이 동물일 때부터 이어 내려온 잠재된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파악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인류의 각종 신화들, 종교들, 의식들, 상징들 그리고 꿈과 환상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결국 융에게 기독교는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무의식의 잠재된 기억들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단서일 뿐 그 이상도 아니었다.

 

강신술에 접촉된 융의 성장 배경

 

스위스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융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영적인 경험을 하면서 성장했다. 외할아버지도 개신교 목사였지만, 사실상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은 바른 의미의 기독교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 외할아버지는 죽은 융의 할머니와 대화하기 위한 강신령(seance)을 정기적으로 열었던 사람이었고, 그의 두 번째 외할머니는 자기 집에 방문하는 영들을 위해 방에 특별히 영들이 주무시는 침대를 놓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융은 이미 세 살 때 자기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체를 느끼고 있었다.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며 저술 활동을 한 융

융이 1902년에 출판한 박사 논문이 강신령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융은 그 논문을 위해 조카를 최면 상태에 놓고 그 조카의 죽은 조상들과 조카가 접촉케 하는 실험을 자기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융은 어린 시절부터 영들과 접촉했지만, 후에는 그가 원형(archetypes)이라고 부른, 육체가 없는 영들의 실체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저술 활동을 했다.

 

융이 평생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영, 필레몬

 

융은 1916년 그 영 가운데서 평생에 걸쳐 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영적 존재인 필레몬을 만난다. 융은 처음에는 그 필레몬이 자신의 무의식이 투사한 자기 자신의 일부로 인식했다. 그러나 나중에 필레몬이 자신의 일부가 아닌 그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환상 속에서 만났던 필레몬과 다른 존재들은 사실은 내가 나의 정신 세계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던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갖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하나의 독립된 힘이었다. 나는 환상 중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가 무의식에서조차도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나에게 알려 주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말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필레몬이라는 사실을. 심리적으로 말하면 필레몬은 어떤 우월한 영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는 나에게 실로 신비스런 존재였다. 어떤 때는 그의 존재가 내게 너무 생생해서 마치 그가 살아 있는 인격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정원을 산책할 때면 그는 내게 마치 인도 사람들이 구루라고 부르는 영적 지도자와도 같았다.”(그의 책, Memories, Dreams, --P 55)

 

융이 얼마나 영적인 존재들과 접촉하고 살았는지는 다음의 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너무 생생해서 융은 때때로 자신이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고 자신이 그들의 담당 목사라고 느낄 정도였다. 영들로 가득 차 있는 집에서 영들의 요구와 영들이 주는 영감에 의해 영들에게 설교를 한 놀라운 경험에 대해 융은 영들에게 한 일곱 편의 설교는 그냥 나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3일 밤에 걸쳐 나는 그 설교들을 기록했다라고 말했다. 그 설교들은 융에게 핵심이 되는 작업이었다. 그 죽은 자들의 영혼들은 융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답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품, 우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문제 등이다. 그 때 그의 대답들이 향후 융이 심리학의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 이론적 뿌리가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 융의 자서전이 마침내 완성되었을 때에 그 자서전을 출판하는 미국의 출판사는 그의 자서전 <기억들, 꿈들, 회상들>에서 이 영들에게 한 일곱 편의 설교부분만은 뺐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사건이 융의 삶 자체를 너무도 믿지 못하게 만든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융이 그의 이론들을 형성하는 데 가장 뼈대가 되는 사건이었다.”(Dave Hunt 외의 책, p 112)

 

심리학자 빅터 본 와이즈잭커는 그의 책 <프로이트와 융에 대한 회상>에서 융은 정신 분석이 과학이 아닌 종교적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최초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융은 신을, 위에서 설명한 집단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실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기 자신의 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융은 신화, 종교적 상징, 꿈들을 이용해 개인의 정신 속을 파고들어가 밝히는 것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 속에 있는 신의 존재를 깨워 내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 장치 중의 하나로 융은 기독교와 기독교 역사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상징을 매우 유용한 수단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융이 모든 인간 속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를 깨우기 위해 사용한 다양한 방법과 그 방법들이 지금 기독교 속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p. 143

 

- 옥성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pp 115-143

 

 

 

레이 윤겐의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를 읽으며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도, 제시펜 루이스의 십자가의 도에도,

귀용 부인의 영성에도, 신비 사상이 많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만난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 체험들이 과연 진짜인지 의심스럽다.

 

삶의 현장과 관계를 떠난 구도, 신비의 추구 자체가 벌써 귀신을 불러 들인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으로 사람을, 현장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사역이셨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법도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거기에 참된 영성이 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영적인 예배이다.

 

신비 사상은 말씀을 도외시한 채 가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사람 답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품과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따르지 않으면멸망의 길로 간다.

토저의 책들도, 교회사에서의 잘못된 경건주의 전통도, 깊은 것 같지만

이런 신비사상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미국, 대각성의 시기의 주역이었던 탁월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정서론을 읽음으로,

참된 성령의 역사와 신비주의의 미혹의 영의 역사를 분별하여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요!” 라고 강조한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 이하는 용량부족으로 못올렸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청교도수련회강의안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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