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권, 15-35, 자살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의안2)

강대식 2015. 5. 31. 19:59

 

15. 비록 거짓 종교이기는 하지만 종교를 위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않는 자발적인 포로생활을 참아내는 모범을 보인 레굴루스에 관하여

 

우리의 대적들은 아주 뛰어난 영웅들 중에 종교적인 양심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포로생활을 참아낸 유명한 예를 하나 가지고 있다. 로마의 장군인 마르쿠스 레굴루스는 1차 포에니 전쟁 중인 B.C. 256에 카르타고에 포로로 잡혔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의 포로를 잡아두기보다는 로마인들에게 붙잡힌 카르타고인들이 석방되기를 더 바랐기 때문에 레굴루스를 선택하여 대표단과 함께 사절로 로마로 파송하면서, 그 이전에 만약 그가 자기들이 요구한 결과를 얻는 데 실패한다면 카르타고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그가 연설을 마친 후에 로마인들은 그가 적에게로 돌아가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맹세한 내용을 자발적으로 이행했다. 적은 온갖 교묘하고 끔찍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를 죽였다. 상자의 사면에는 날카로운 못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그가 몸을 기대면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잠을 자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저들이 그토록 무시무시한 운명보다 높이 솟아오른 용기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레굴루스는 신들을 아주 존중했다. 그 결과 그는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자기 나라에 머물거나 원하는 장소로 가지 않고 조금도 주저함없이 잔인한 적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것이 그런 신들에 비난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진실된 믿음으로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심지어 자기들의 고향에서조차도 단지 순례자에 불과함을 알고 있는 성도들의 투옥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비난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16. 포로로 잡혔다가 정절을 잃은 성별된 처녀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처녀들에 관하여, 그리고 이들은 의지로 그런 행위에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그들 영혼이 더럽혀질 수 있는가에 관하여

 

올바른 생활을 위한 조건이 되는 덕목은 마음 속에 자리잡고서 육체의 각 부분에 대하여 명령한다는 사실과, 성별된 육체는 성별된 의지의 도구라는 사실이 굳게 확정되어야 한다.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다면, 불가피하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를 당하여 다른 누구가 육체를 가지고 혹은 육체에 대하여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피해자에게 책망할 거리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고통뿐만 아니라 욕망을 포함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몸에 범해질 수는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위가 저질러졌을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이 비록 최고의 결단력으로 유지되었던 순결을 파괴시키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수치심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수치심은 그 행위가 의지의 동의를 수반했다고 생각되지 않기 위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17. 징벌이나 불명예에 대한 두려운 때문에 저지른 자살에 대하여

 

이런 처녀들 중 일부가 그런 불명예를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택했다고 할지라도, 동정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이끈 심정을 이해할 수 없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죄를 범함으로써 또다른 범죄행위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을 거부했다. 어느 누구든지 범죄자조차 개인적으로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어떠한 법도 이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살인자이며,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난에 대하여 스스로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자살을 통하여 죄를 더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다의 행위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지 않는가? 그는 목매달아 죽음으로써 가증스런 배반행위를 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을 가중시켰다고 진리가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고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의 기회를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다가 자살했을 때, 그는 범죄자를 죽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죄가 있는 목숨을 종식시켰다. 그는 비록 죄 때문에 자살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죽임으로써 또 다른 범죄행위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이 왜 자신에게 악한 일을 해야 하는가? 왜 그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범죄한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하여 무죄한 자를 죽여야 하는가? 왜 그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죄를 빼앗기 위하여 자신에 대한 죄를 범해야 하는가?

 

18. 정신은 침해당하지 않고 남아있지만, 다른 사람의 정욕에 의하여 육체에 가해질 수도 있는 폭력에 관하여

 

우리는 정신의 순결이 범해졌을 때 육체적인 순결이 상실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육체가 농락당했을 때라고 할지라도 정신의 순결성이 유지되는 한 육체의 순결을 잃지 않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여인이 동의하지도 않고서 다른 사람의 죄에 의하여 범해지는 경우에, 그녀는 자의적인 죽음으로써 자신을 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녀는 추행을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할 까닭은 더더욱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는 아직도 확실하게 드러나지도 않은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정욕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피해자를 조금도 더럽힐 수 없을 것이다. 정욕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의 것일 뿐만 아니라 피해자도 그 정욕을 공유하고 있을 때 뿐이다. 정신의 덕목인 순결은 악에 동의하기보다는 모든 악을 참아내는 인내를 그 동료 덕목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의지의 동의 여부를 통제할 수 있을 뿐, 항상 자기 육체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육체마저도 정결하게 하는 정신의 결단력이 유지되는 한,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폭력적인 정욕은 요동하지 않는 자제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순결을 빼앗아갈 수 없다.

 

19. 자기에게 행해진 폭행 때문에 목숨을 끊은 루크레티아에 관하여

 

우리는 추행당한 그리스도인 여인들이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순결하다고 변호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대 로마의 귀부인인 루크레티아를, 그녀의 정숙함으로 인하여 높이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타르퀸왕의 아들이 그녀의 육체를 범했을 때, 그녀는 이 젊은 불한당의 범죄행위를 지체높고 대담한 자기 남편 콜라티누스와 친척인 브루투스에게 알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복수를 맹세하게끔 만들었다. 그 이후에 그녀는 상심하고 모멸감을 참아낼 수 없어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주제에 대하여 연설하면서 진실을 잘 말해주었다. “기묘한 현상이로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간음을 범했다." 이 말은 명쾌하고 진실된 말이다. 그 사람은 두 육체가 결합된 광경에서 한 사람의 역겨운 음행과 다른 한 사람의 정숙한 의도를 관찰했고, 그 행동에서 그들의 육체가 합치된 모습이 아니라 두 사람의 정신의 상이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간음을 범했다."

 

그토록 높이 찬양받는 루크레티아는 또한 죄없고 정숙하며 모욕당한 루크레티아를 실해했 다. 그녀가 비록 간음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간음자에게 포옹당했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한 것은, 그녀가 정숙함에 부여한 고귀한 가치보다는 수치심에 과도한 부담을 느낀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여인들도 루크레티아와 같은 일을 당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스스로 가담하지 않은 범죄 행위에다가 자신의 범죄 행위를 첨가시키기를 거부했다. 적군이 정욕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간음하도록 내몬 것처럼 그들이 수치심 때문에 자살하도록 내몰렸더라면, 그들은 범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 자신들의 양심이 증거하는 가운데, 정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이러한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실 그들은 선을 행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의혹을 벗어나기 위하여 불법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의 권위로부터 일탈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20.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에든지 자살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거룩한 성경 가운데 어디에서든지, 영생을 보장받기 위해서나 어떠한 악을 피하거나 모면하기 위하여 자살하라는 계명이나 그에 관한 허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우리는 특히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20:16)는 거짓증거를 금하는 계명에서처럼, “네 이웃이라는 말이 부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살인하지 말지니라"(20:13)는 계명에 의하여 자살이 금지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39)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건대, 이웃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계명이 자신에게 거짓 증거하는 자가 면죄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에 아무 첨가된 말이 없고 어떠한 사람, 심지어 그 계명을 받은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살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야생동물이나 가축마저 죽이지 말라는 의미로 확대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땅에 뿌리를 내리고 땅으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사는 식물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으로부터 하나님이 잡목마저 제거하지 못하도록 금하셨다는 결론을 끌어내어, 마니교도들의 오류에 동참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정신 나간 생각일 것이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이 우리의 필요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당하게 정하신 질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을, 인간들 즉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게 적용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을 죽이는 것도 인간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1. 살인죄가 되지 않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경우에 관하여

 

그렇지만 살인을 금하는 법에도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의하여 정해진 몇몇 예외가 있다. 하나님의 권위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인 권력의 근원인 국가의 법에 따라 국가의 권위를 대변하면서 범죄자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는 이들이 살인을 금하는 계명을 어겼다고 할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을 때, 잔인하다고 비난받기는커녕 헌신적인 믿음으로 인하여 칭찬받았다. 그의 행동은 범죄가 아니라 순종이었다.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집 문에서 처음 영접하는 이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자기 딸을 살해한 일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타당하다(11:29). 또 삼손이 집을 무너뜨림으로써 적들과 함께 압사당했을 때, 그의 행위는 그를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신 성령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은밀하게 명령하셨다는 이유만으로도 정당화된다(16:28). 따라서 일반적으로 정당한 법으로 규정되었거나 특별히 정의의 근원인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명령된 이런 살인을 예외로 한다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살인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이다.

 

22. 자살은 결코 당사자의 정신력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곤경이나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종종 암흑과도 같은 오류에 사로잡힌 대중들의 판단을 선한 양심의 순수한 빛과 비교하여 무시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의 정신력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들은 많은 사람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했느냐가 아니라, 그렇게 했어야 했느냐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분명 실례보다는 건전한 이성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실례들은 건전한 이성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에 뛰어난 만큼이나 본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예언자나 사도들 중에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비록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간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묵숨을 끊으라고 명령하거나 권고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살전4:5)들이 어떠한 실례를 제시하든지 진리되신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23. 카이사르의 승리를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살한 카토의 예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학식있고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고 인정되던 그의 행동이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정당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행동에 대하여 역시 학식이 있었던 그의 친구들이 현명하게도 그에게 자살을 만류했고, 그런 행동이 강한 정신력의 징표가 아니라 유약함의 징표이며 불명예를 피하려는 명예심의 증거라기보다는 역경을 참아낼 수 없는 허약함의 증거라고 간주했다는 사실 외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4. 레굴루스가 카토를 능가한 바로 그 덕목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뛰어나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경건한 욥이나,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성경에 기록된 다른 성도들보다 카토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는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욥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하지 않고, 끔찍스런 육체적 고통을 참아내고자 했다. 또 다른 성도들도 자살하기보다는 적의 수중에서 포로생활과 억압을 견뎌내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카토보다는 레굴루스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카토는 결코 카이사르를 패배시키지 못하고 그에게 오히려 패배당했으며, 굴복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는 자살을 선택했다. 반면에 레굴루스는 이미 카르타고인들을 패배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도리어 카르타고인들에 의하여 패배당했을 때, 그는 자살을 통하여 적의 통제범위 밖으로 나가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적군의 지배하에서 인내하는 동시에 로마인들의 사랑 안에 계속 머무름으로써 적에게서는 정복당한 신체를 강탈하지 않았고,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정복당하지 않는 정신을 빼앗지 않았다. 그가 자살을 거절한 것은 목숨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원로원에서 한 연설에 더 격분한 적에게로 주저하지 않고 돌아가서 맹세를 지킴으로써 이 점을 입증했다. 그는 현세에서의 생명을 귀중하게 보지 않았다. 적이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 스스로의 손으로 죽기보다는 어떤 종류든지 고문에 의하여 자신의 생명이 종식되도록 만들고자 선택했다. 자살이란 중죄임에 틀림없다고 선포한 셈이 되었다. 명예를 얻을 만하고 덕성으로 유명한 로마의 모든 영웅들 중에 이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다. 레굴루스는 대승리를 거둔 뒤에도 아주 검소한 생활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성공에 의하여 타락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아주 대담하게 그토록 끔찍스런 종말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역경에 의하여 분쇄당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적에 의하여 패배당했을 때에도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자 하지 않았다면, 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그들이 자살하기보다는 노예상태를 감수하고자 했다면,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살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섭리로써 그들을 시험하거나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한동안 적에게 맡기시는 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아주 높은 곳에서 그들을 위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치욕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범죄했거나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적조차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자신에 대해 적이 범죄했거나 행하리라는 이유 때문에 자살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끔찍스런 오판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25. 우리는 죄로써 죄를 회피하고자 노력해서는 안 된다

 

육체는 적의 정욕에 의하여 굴복될 때, 쾌락의 유혹에 의하여 죄악에 동의하도록 정신을 유인할 위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파국적인 결과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자살은 적의 죄뿐만 아니라, 그렇게 유혹당한 그리스도인의 죄를 예방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 아닌가라고 그들은 질문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진리되신 분이 분명히 밝혀놓았듯이 자살이 가증스럽고 저주스런 범죄행위라고 한다면, “장래에 생겨날 죄를 피하기 위하여 지금 죄를 범하자. 장래에 간음죄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지금 살인하자라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육체적인 쾌락에 굴복하여 수치스런 일에 동의할 수 있는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정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그에게 두며 그의 도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불순종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지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책망받을 수 없다.

 

26.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성도들의 행동이 본받을 만하지 않다

 

박해당할 때 익사하기 위하여 강물에 몸을 던짐으로써 정절을 위협하던 자들로부터 벗어난 몇몇 경건한 여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죽은 뒤에 전체 교회로부터 순교자라고 칭송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덤을 방문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순교자로서 자살한 가장 유명한 예는 성 펠라기아였다. 그녀는 15세의 나이로 어머니 및 자매들과 함께 폭행을 피하기 위하여 몸을 내던졌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고 펠라기아의 영웅적인 행동을 찬양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감히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다. 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적절한 증거를 받아 그들에 대한 기억이 이런 식으로 영예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랬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다. 그들은 인간적인 오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으며, 오류가 아니라 순종으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삼손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어떤 행동을 명하시고 그분이 명하셨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실 때, 그에 순종했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누가 고소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말하고 있고, 주장하고 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확정지으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어느 누구든지 영원한 고통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곤경을 모면할 수단으로 고의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지난 죄 때문에 자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자신의 죄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도록 현재의 삶을 살아갈 필요성이 더 있기 때문이다. 혹은 죽음 뒤에 올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여 자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왜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으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27. 죄를 피하기 위하여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가

 

당신은 부정한 쾌락의 유혹으로 가득차 있고 온갖 끔찍스럽도록 잔인한 행동으로 날뛰며 갖가지 오류와 공포로 위협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당신의 모든 죄가 사함받은 지금 이 순간에 또다시 동일하거나 더 심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자살하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극악무도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악한 행동일 것이다. 따라서 자살은 사악한 행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자살을 뒷받침하는 온당한 견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28. 적군은 하나님의 어떤 판단에 정결한 그리스도인들의 몸에다가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도록 허락받았는가?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들이여, 당신들의 정조가 적에 의하여 놀림감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인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당신에게 죄를 짓도록 허락받은 자들의 죄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양심 속에서 확신한다면, 당신은 크고 진정한 위로를 받고 있다. 그 이유를 당신이 묻는다면, 우리는 온 우주를 다스리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으며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연약한 자들이여, 이 이중적인 위로를 받으라. 한편으로 당신은 시련을 겪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징벌받았다. 한편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정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그런 행위를 허락했지만 어느 누구도 벌받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실 현재 하나님의 신비한 판단 속에서 사악한 욕망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지만, 그에 대한 징벌이 최종 심판을 위하여 유보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정결한 덕목에 대하여 자만심에 부풀어있지 않다고 양심으로 확신할 수 있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최근에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만하고 득의만만해할 정도로 어떠한 취약점을 몰래 가지고 있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육체와 영혼의 정결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유지되며, 굳건한 의지에 그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동의 없이는 강탈 당할 수 없는 보물인 것이다. 최근의 재앙을 통하여 아마 그런 이들의 오류는 교정되었을 것이다.

 

29. 하나님이 적군의 흉포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불신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종들은 어떤 답을 해야 하는가

 

최고이며 진실하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가족은 이런 위로, 즉 속이며 불안정하며 타락적인 세상사가 결코 제공해줄 수 없는 보다 확실한 소망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위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교육받고 있기 때문에 이 현생의 훈련을 거절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적인 축복을 순례자처럼 대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인 불행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시험하고 교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따름이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답변은 이렇다. “나의 하나님은 어디든지, 온전히 계실 수 있다. 내가 곤경을 당하여 고통당할 때, 그는 나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시거나 나의 잘못을 벌주고 계신다. 그리고 그는 내가 현재의 고통을 충성스럽게 인내하고 나면, 그 보답으로 주실 영원한 상급을 예비하고 계신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지만 하늘을 지으시며 모든 신보다 경외할’(96:4,5)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당신과 논할 가치는 더더욱 없다.”

 

30.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불평하는 자들은 사실 수치스런 쾌락을 억제 당하지 않고 살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들이 방해받지 않고 악을 즐기며, 당신들이 고통이나 책망도 받지 않고 타락 속으로 함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들이 평화와 변영을 바라는 이유도 당신들이 겸손과 절제와 자제와 경건으로써 그런 축복들을 고귀하게 사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어린 방종으로 무진장 다양한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번영은 적의 온갖 분노보다도 훨씬 더 악한 도덕적인 타락을 낳고 있다.

 

원로원에서 만장일치로 가장 훌륭한 로마인으로 선택되었던 당신들의 대신관인 위대한 스키피오는 그 당시에 로마의 경쟁국이던 카르타고의 파괴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이 점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도시의 파멸을 제안했던 카토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악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사태평이 위협이라고 염려했다. 그는 건전한 두려움이 시민들에게 적절한 보호수단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카르타고가 파멸되었을 때, 분명히 로마공화정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제거되었다. 그 위협이 사라지자 즉각적으로 번영으로부터 생겨난 재앙이 잇달았다. 우선 야만적인 유혈봉기에 의하여 안정이 파괴되고 분쇄되었다. 적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던 로마인들이, 그런 도덕수준이 붕괴되자 동료 시민들로부터 더 잔악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다. 권력욕이 몇몇 세력가들 사이에 자리잡게 되었고, 그 결과 피곤에 지친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와도 같은 멍에 아래 짓밟히게 되었던 것이다.

 

31. 권력을 향한 열정이 어떤 단계를 거쳐 로마인들 사이에 증가되었는가

 

오만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권력욕은 이 직책 저 직책 거친 후에 마침내 최고 통치권에까지 다다를 때가 아니고서야 어떤 단계에서 잠자코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인 야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무제한적인 야망은 바로 탐욕과 색정에 의하여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무대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번영에 의하여 탐욕스럽고 사치스럽게 되는 법이다.

 

아주 지혜로웠던 대신관 스키피오는 원형극장을 건축하려던 원로원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부패한 그리스의 풍습이 로마의 굳센 도덕성에 침투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외국의 타락한 정신이 유입되면 로마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며 약화시키므로 그 발자취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에게 역설했다.

 

32. 연극 공연물이 확립된 발단에 관하여

 

파렴치한 어리석음과 방종을 보여주는 연극이 인간들의 악한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의 신들이 내린 명령에 의하여 로마에서 자리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라. 당신들은 그 따위 신들보다는 오히려 대 스키피오에게 신적인 경의를 보내는 편이 그래도 용서받을 만할 것이다. 그런 신들은 자기들의 신관만큼도 도덕성이 없었다. 당신들의 대신관은 도덕적인 질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극장 건축을 금지시키려고 했던 반면에, 당신들의 신들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진정시켜주겠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자기들을 경배하고 연극을 공연하도록 명령했다.

 

이 악한 영들은 질병이 곧 자연적으로 그치리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알아차리고는, 숭배자들에게 그 육신이 아니라 도덕성에 더 심각한 질병을 감염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사람들의 마음은 칠흙같이 어두워졌고 흉한 모습을 띠게 되었으며 타락하게 되었다. 로마가 유린될 때에도 날이면 날마다 배우들을 좇아 미친 사람처럼 앞다투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33. 로마인들은 로마가 붕괴되었어도 자기들의 악을 교정하지 않았다

 

선견지명을 갖춘 사람들의 경고보다 사악한 영들의 유혹이 당신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신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나쁜 일에 대해 그리스도교에 책임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스스로 저지르는 악행을 탓하지는 않는다. 당신들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도 나라의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탈없이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 위함이다. 번영이 당신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당신들은 곤경을 당해도 잘못을 고칠 수 없었다. 당신들은 너무나 악한 와 있기 때문에 적에 의하여 짓밟힌 지금도 쾌락을 억제하지 않았다. 당신들은 재앙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배우지 못했고, 아주 비참한 상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34. 그 도성(로마)의 완전한 파멸을 막은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당신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그분은 당신들을 살려주었을 때, 당신들이 회개를 통하여 잘못을 고치도록 권고하고 있다. 비록 당신들은 배은망덕하지만, 그분은 당신들에게 그의 종으로 행세하거나 그 순교자들의 거룩한 장소에서 도피처를 발견함으로써 적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주셨다.

 

35. 사악한 자들 사이에 숨어있는 교회의 아들들에 관하여,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주 그리스도의 구속받은 가족과 왕되신 그리스도의 순례자 도성에 의하여 이런 유사한 답변들이 반대자들에게 제시되도록 하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도성으로 하여금 바로 이 반대자들 중에 미래의 동료 시민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라. 그러므로 그들과 맞설 때 그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모습을 볼 때까지 그 적대감을 참아내는 일을 열매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성은, 이 세상에서 순례길을 걸어갈 때 자기들 가운데 성례전에는 참여하지만 성도들의 영원한 본향에는 함께 갈 수 없는 이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한때는 불신자들과 함께 극장을 가득 메웠다가, 또 한때는 우리와 연합하여 교회를 가득 채운다.

 

비록 당사자들조차 잘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친구가 될 사람들이 아주 공공연한 적들 가운데 숨겨져 있다고 한다면, 이런 자들 중 얼마가 자기들의 잘못을 고칠 가망이 전혀 없다고 낙담할 이유는 더욱 없다. 사실 이 두 도성은 이 시기에 결합되고 혼재되어 있으면서 최후의 심판으로 분리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정도까지 그 두 도성의 기원과 발달, 그리고 정해진 목적에 대해서 설명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말할 작정이다. 훨씬 더 광채를 발하게 될 하나님의 도성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