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

존 라일, 「곧은 길」, 제11장, 형식적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다(김영희강의안10)

강대식 2015. 6. 23. 05:42

11 장  형식적 신앙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딤후 3:5)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

 

현 시대만큼이나 형식적이고 그릇된 신앙고백이 팽배한 적은 없었다.

형식, 형식, 형식은 현재 영국에 있어 가장 큰 죄이다. 그 밑에서 온 땅이 신음하고 있다. 이전보다 빛은 더 많이 있으나 거룩한 생활은 없다”(토마스 홀의 딤후 3:5의 강해)

 

1. 형식적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며,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1) 종교적인 예식이나 성찬식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신앙

그들은 규칙적으로 공예배에 참석하며 주의 성찬에 참석하기 위해 간다. 그들은 실천적인 기독교적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복음의 명백한 교훈에 대해 개의치 않거나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히 신앙고백 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신앙은 형식이다.

 

2) 말로써 이루어지며 극단적인 고백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신앙

그들은 머리로는 복음의 이론을 알고, 복음주의 교훈의 기쁨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의 건전함에 대해 말하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어두움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적인 생활을 살펴볼 때, 그들이 실천적인 경건함에 대해 아는 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진실하지 않으며, 자비롭지 못하며, 겸손하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으며, 온유하지 않으며, 이기적이며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은 텅 빈 형식적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1:11-15)

하나님은 그들이 마음 없이 형식적인 예배를 할 때 자신이 세우신 제도가 소용이 없다고 친히 공표하신 것이다.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은 전혀 신앙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위선자들이여!”(23:13)

한 장에서 여덟 번이나 넘게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형식주의는 절망적인 질병이며, 가장 가혹한 말로 나타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기를 바랄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형식은 전혀 어떠한 신앙도 아니다. 그 말씀들은 우리가 죄를 무서워하고 피해야 함과 같이, 형식을 무서워하고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형식만큼 그렇게 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형식은 전 인류에 있어서 커다란 병이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태어나 함께 성장하고 죽을 때까지 우리로부터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형식만큼이나 자신의 영혼에 위험한 것은 없다. 신앙의 형식에 매달려 있는 동안에 우리는 신앙의 실제성을 무시하게 되고 우리의 양심에 두려울 정도로 신앙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갖게 된다. 그것은 전체적인 속사람의 내면에 점차적으로 두껍게 굳어지는 무감각을 가져온다. 단지 형식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예배하러 가는 교인들, 실제로 아무 유익도 느낄 수 없는 성경에서 매주일 기도와 교훈을 읽는 회심하지 않은 목사, 단순히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매 주일 노래하는 회심하지 않은 성가대원들, 이들 모두는 굉장한 위험에 처해 있다.

 

3) 신앙에 있어서 형식만큼이나 그렇게 어리석고, 무분별하며,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그림으로 그려진 불은 따뜻하지 못하며, 그림으로 그려진 허식적인 연회는 배고픔을 만족시킬 수 없듯이 형식적인 신앙은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2:16)하실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22:12)라고 말씀하신 그분은 표면적인 신앙의 외투로 말미암아 속지 않을 것이다.

 

2. 마음은 참된 신앙의 보좌이며, 참된 그리스도인은 마음 안에서 우러나오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23:7)

마음은 그 사람을 나타내게 된다. 마음은 가진 신앙을 바르게 시험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는 곳이다.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시작되어야 하는 장소이다. 마음은 하나님에 대하여 닫혀져 있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야 하고 열려야 한다. 마음은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보좌이다.(10:10)

마치 마귀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것처럼 인간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나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가 마음으로 믿을 때까지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지 않으며, 용서와 평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롭게 하는 것은 단지 마음으로부터 믿는 그 믿음인 것이다. 마음은 덕행에 있어서 참된 거룩함이며, 흔들리지 않게 지속시켜주는 샘이다. 그들은 마음에 복종하며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그들의 행위가 미약하고 연약하며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행했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은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작은 돈을 더욱 칭찬하신다. 올바른 마음 없이는 참된 거룩함을 가지지 못한다. 올바른 마음이 없는 표면적인 온당함은 형식주의일 뿐이다.

 

마음이 올바르지 못할 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것이 그릇된다. 법궤는 성막에 있어서 가장 신성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진영에 법궤가 있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악함으로 가득차서 그것을 하나의 우상과 같이 섬겼을 때, 바로 그 법궤는 평범한 나무 상자로 변해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줄 수 없었다. 옳은 일을 많이 한 구약의 왕들이 있다. 르호보암은 삼년 동안 다웟과 솔로몬의 본을 따라 살았다.(대하11:17) 그러나 후에 여호와를 찾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악한 일을 하였다’(대하12:14)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은 옳은 일을 많이 행하였으며, 르호보암과 대조적으로 성공적인 싸움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다’(왕상15:3)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른 정치를 폈던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마음을 다 쏟지는 못했지만 여호와의 눈에 들도록 바른 정치를 폈다’(왕하14:3)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이들의 보편적인 특징은 내면적으로는 마음이 부패했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올바르다면 하나님은 불완전한 많은 것들을 관대히 보아 주신다. 히스기야로 말미암아 거행된 유월절은 규정과 다르게 유월절 양을 먹는 부정한 일이 행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참되며 정직한 마음으로 그 일을 행했다.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18-20)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이 유월절에서 그렇게 진실한 적은 결코 없었다. 주님은 예배자들의 수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사실상 보통 사람들의 주위를 끌만한 것이 못되는 예배자들의 집회가 많이 있다. 누추한 예배당, 노래는 훌륭한 화음을 내지 못하며, 기도는 미약하고, 설교는 더욱 마약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신다.

 

주의할 것은 형식적인 신앙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해서 신앙에 있어서 형식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우상시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였을 때 그 법궤는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같은 법궤를 불경하게 다루었을 때, 웃사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며, 존경하고 숭배하였을 때는 오벧에돔의 집에 축복을 가져왔다. 하나의 등불은 집이 될 수 없으나 어두운 밤에 집을 향하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단지 형식을 가진 자는 위선자다. 그러나 형식을 가지지 않은 자는 무신론자이다”(홀 주교)

 

3. 참 신앙은 사람의 칭찬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된다. 참된 신앙이란 사람을 찬양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9)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적 신앙은 이제까지 사람의 칭찬을 받아왔던 적도 없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거나 그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형식적인 신앙은 교화되지 않은 양심에 꼭 어울리는 것이며, 인간 본래의 나태함을 만족시키며, 독선적인 인간을 만족시킨다. 신앙으로 고민하기를 싫어하며 양심과 내적인 삶을 간섭하지 않는 어떤 것을 원하고 있다. 형식주의는 천국에 이르는 넓은 문처럼, 또는 쉬운 길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이론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들은 굽힐 수 없는 것들이다.

형식주의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계속적으로 막으려 했던 중요한 죄이다. 형식주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유대인들 사이에 가득 퍼져 있었던 무서운 역병이었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에 형식주의는 너무나도 완전하게 뒤덮어서 복음은 죽은 자처럼 땅에 떨어졌다.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신앙이 살아 있었던 교회의 수는 얼마나 적은 숫자였는가? 형식적인 신앙은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며, 형식주의는 인간을 찬미하는 것이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예배하러 가고, 때때로 성찬을 받아들이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은 편협과 옹졸함이며 광신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마음의 신앙은 너무 겸손한 것이어서 사람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자랑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마음의 신앙은 너무나 거룩한 것이기에 사람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홀로 있게 하지 않으며, 세속성과 죄와 더불어 충돌하게 한다. 또한 사랑하고 집착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한다.

다윗은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69:12)라고 하고 있고, 박해받고 냉대 받은 선지자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형식주의를 격려하고, 외식주의를 존중하는 복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희생된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청교도가 되는 것이 술에 취해 있거나 욕을 하는 것보다도 더 나쁘게 여겨졌던 시대에도 마음의 신앙이 칭찬받았던 적이 있었는가? 현 시대에 적은 숫자의 마음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홀로 서서 비난과 조소, 조롱을 참고 견뎌내야만 한다. 그들에게 찬성하는 사람도 거의 없으며, 필요한 때에 곁에 있어 줄 사람도 거의 없다.

 

인간이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법정에서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마음의 신앙을 기뻐하시며 영광을 주신다. 천사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시고 그들에게 은혜의 역사를 유지시키며, 매일의 양식인 평화, 소망, 힘을 주신다. 그러한 칭찬은 인간의 칭찬을 받는 것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기겠다”(25:21-34, 12:8, 22:28-29)

 

4. 맺는 말

1) 당신의 신앙이 믿음의 신앙인지 형식의 신앙인지 생각해 보라. - 정직하게 대답하라. 당신의 신앙이 형식의 문제라면 직면하게 될 엄청난 위험을 생각하라. 복음주의적 형식주의만큼 위험한 형식주의는 없다.

2) 당신의 마음이 책망하면, 진지하게 단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보라. - 지체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소생시켜 달라고 간청하라.

3)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진지하게 현 위치에서 책임을 생각해 보라. - 그분을 찬미하라. 그 날까지 형식주의를 경계하고 파수병을 세우라. 분명한 사실은 그때에 가서 우리 생에 속에서 마음을 한 시간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친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