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스크랩]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3권, 영혼의 죽음과 몸의 죽음 (강의안9)

강대식 2015. 7. 28. 23:07

13

 

1. 처음 사람들이 타락해서 죽을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들과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다. 곧 죄를 짓더라도 결코 죽을 수 없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순종의 의무를 다하면 천사들과 같은 영생과 영원한 행 복을 얻어, 죽음이 개입하는 때가 없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공정한 벌을 받도록 창조하셨다.

 

2. 영혼의 죽음과 몸의 죽음.

 

사람의 영혼이 영생불사하리라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지만, 거기에도 독특한 죽음이 있다. 영혼이 영생불사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과 감각은 아무리 미약하게 되어도 결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와 반대로 몸이 죽는다는 것은 몸에서 생명이 완전히 떠날 수 있으며, 몸 자체에는 독자적인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혼을 버리시면 영혼이 죽는 것과 같이, 영혼이 몸에서 떠나면 몸은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는 영혼과 몸, 곧 사람 전체가 죽는다. 이럴 때에 영혼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지 못하여, 몸도 영혼에게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사람 전체가 이렇게 죽으면 둘째 사망으로 가게 된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가 인정하는 용어다(2:11,20:6,14,21;8).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10:2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 죽음을 의미한다.

 

3.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겪게 된 죽음은 성도들의 경우에도 죄에 대한 벌이 되는가?

 

처음 사람들은 참으로 죄만 짓지 않았더라면 어떤 종류의 죽음도 당하지 않았을, 그런 본성으로 창조되었지만, 그들이 처음 죄인이 되었을 때에 사형 언도를 받은 데는 조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곧 그들에게서 나는 후손들도 모두 같은 벌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들과 같은 후손만을 낳겠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받은 벌은 그들의 엄청난 죄책과 정비례한 것이었으며 그들의 처음 본성을 악화시켰다. 그 결과로, 처음 사람들의 죄에 대한 벌로써 출발한 것이 그 후손들에게 타고나는 결과로써 나타난다.

 

이렇게 된 것은 사람이 흙에서 난 것과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흙은 사람을 만드는데 사용된 재료가 되었지만, 사람은 스스로 어버이가 되어서 사람을 낳는다. 따라서 육신은 그 재료가 된 흙과 다르지만, 자식인 사람은 어버이인 사람과 똑같은 존재다. 그러므로 첫 부부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처벌 선언을 받았을 때에, 여인을 통해서 생산될 인류 전체의 본성이 처음 사람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후로 사람이 낳는 것은 창조된 때의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벌을 받게 된 때의 인간이었다. 적어도 죄와 죽음의 기원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4. 중생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자들도 죽음, 곧 죄에 대한 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죽음과 죄와의 관련은 없어졌지만, 영혼이 여전히 몸을 떠나게 한 것은, 중생의 성례전을 받은 후에 즉시 신체의 영생불사가 따르게 된다면, 믿음 자체가 약해지겠기 때문이다. 믿음은 현재 눈앞의 사실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중에 기다릴 때에 참으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이기려면 믿음의 힘으로 싸워야 했다. 적어도 옛날에는 그랬고, 우리의 거룩한 순교자들의 운명에서 특히 현저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중생의 씻음을 받은 후에는 몸이 죽을 수 없다면, 죽음에 대한 이 싸움에서 승리나 영예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자비로, 실패에 대한 벌이 그대로 덕성의 무기가 되며, 심지어 죄인이 받는 벌이 의인이 받는 상이 된다. 전에는 죄를 짓고 죽음을 받았는데, 지금은 죽음으로써 의를 실천하게 된다. 믿음을 버리거나 죽음을 당하라고 위협하는 박해자와 맞선 순교자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전에 악하던 죽음이 선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극히 위대한 은혜를 믿음에 주셔서, 생명의 반대로 인정되는 죽음이 사람들을 생명으로 넘어가게 하는 수단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8. 진리를 위해서 첫째 사망을 당하는 성도들은 둘째 사망에서 해방된다.

 

사람이 진리를 위해서 충성을 지키면서 영광스럽게 죽을 때에, 그는 죽어도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그는 죽음의 일부분을 당하고 그 전체는 당하지 않으며, 끝이 없는 둘째 사망도 피한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영혼에서 분리되시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전체의 첫째 사망이 완전하게 되며, 영원한 둘째 사망이 따를 것이다.

 

죽음은 아무에게나 선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선한 것을 보존하거나 얻기 위해서 견디면 영광이 된다. 죽음은 악인에게는 악이며 선인에게는 선이라고 하는 말에는 잘못이 없다. 몸에서 분리된 의인들의 영혼은 쉬고 있으며, 악인들의 영혼은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계속해서 의인들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악인들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둘째 사망을 받게 될 때에 이른다.

 

20. 지금 소망 가운데 쉬고 있는 성도들의 육신은 범죄 전의 처음 사람들의 육신보다 더 높은 상태로 회복되리라.

 

처음 사람들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어서 몸을 떠나게 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꾸준히 순종했더라면 그에 대한 상으로써 영생을 선물로 받았을 것이며, 몸과 결합되어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이 부활할 때에는 금생에서 쓰고 살면서 고생하던 바로 그 몸을 다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육신의 퇴화나 장애가 없으며 슬픔이나 불행이 없이 행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영혼은 지금도 사망 중에서 아무 슬픔도 없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몸이 분리되었으며 모든 감각이 없어진 후에 여러 가지로 학대를 받은 것 같을지라도, 그들의 육신은 소망 중에 쉬고 있기 때문이다(16:9). 그들의 영혼이 몸을 동경하는 것은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받은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하신 분은 아무에게도 실망을 주지 않는 분이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셨다(21:18). 그래서 그들은 간절한 기대와 인내로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 몸을 입고 있었을 때에 당한 고난이 많았지만, 앞으로는 아무 고통도 받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 육은 지금 몸이 가장 건강한 때의 상태와도 같지 않으며, 저 처음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의 상태와도 같지 않을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면 죽을 필요가 없었지만, 인간으로서 그 몸이 지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아직 영적이 아니고 생물체였기 때문에, 영양소를 섭취했다. 그들의 몸은 늙고 병들어 필연적으로 죽을 운명이 아니었으며, 이 특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생명의 나무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저 금지된 나무와 함께 낙원의 중앙에 서 있었다. 그 외에도 취하는 영양이 있었다. 다만 금지된 한 그루의 나무만은 예외였다. 그 나무 자체가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다.

 

22. 성도들의 부활 후의 몸은 영적일 것이나, 그 육이 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가진 몸은 병이나 노력으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나무가 필요하거나, 기갈로 인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다른 물질적 영양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확고한 영생의 은사를 받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먹을 권능이 있으므로 원할 때에만 먹겠으나, 불가불 먹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천사들도 보이는 형상, 만질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에, 같은 식으로 행동했다.

 

부활 후에 주님의 몸은 사실은 육신이었지만, 또한 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며 마셨다(24:42-43,10:41). 미래의 이런 몸에서 제거되는 것은 먹고 마시는 필요성이며, 그 능력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몸이 아니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지탱해 주는 영, 곧 생명을 주는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적일 것이다(고전15:44-46).

 

23.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아담 안에서 죽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는 것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영혼을 가졌으나 아직 살리는 영을 가지지 못한 몸을 영혼을 받은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내가 설명한 저 다른 몸들은 영적인몸이라고 부른다. 영적인(‘신령한’) 몸들은 살리는 영을 가졌기 때문에 육의 짐스러움과 썩음을 면하지만, 육을 본질로 가진 몸이 아니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 때에 사람은 지상적이 아니라 천상적인 존재가 될 것이나, 흙으로 만든 몸이 그렇지 않게 되겠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 은혜로 하늘에서도 살기에 적합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 본질은 없어지지 않고, 그 속성이 변할 것이다.

 

그러나 저 처음 사람은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존재였으며(고전15:47), 그것을 형성하는 것은 살아 있는 영혼이었고 살려주는 영이 아니었다(고전15:45). 살리는 영은 그가 순종하는 공적으로 받게 될 때까지 보류되었다. 그래서 그의 몸이 영혼적(육적‘)이며 영적이 아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몸은 기갈의 고통을 면하기 위해서 먹고 마실 필요가 있었고, 필연적인 죽음을 막으며 청춘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서 생명나무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 절대로 완전하고 견고한 영생은 얻지 못했다. 죄를 지으면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예고하셨으므로, 죄를 지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낙원 밖에서도 영양을 얻을 수 있었지만, 생명나무에는 접근할 수 없게 되었으며, 따라서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많아지면 그의 생명이 끝나기로 되었다. 사도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니라”(8:10)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다음에 사도는 첨가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그 때에 몸과 살리는 영과의 관계는 지금의 몸과 산 영혼과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도는 지금의 몸이 이미 죽을 필연성에 굳게 매여있기 때문에 그것을 죽은 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9)고 하심으로써 그가 아담의 영혼을 버리셨을 때에 그 영혼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셨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고 하신 것은 영혼이 몸을 떠날 때에 몸이 죽으리라는 뜻이었다.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처음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에 그 몸은 육적인 것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과 부활시에 가지게 될 영적인 몸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라고 한다. 그 다음에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한다(고전15:42-44).

 

신령하다”(“영적이다”)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첨가했다(고전15:45).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의미했다. 여기서 사도는 명백히 해석한다. 처음 사람이 산 영이 되었다는 것은 육의 몸을 의미하며,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그의 말씀은 신령한 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한다(고전15:21-22). 그리고 그 때부터는 살려주는 영에 합당한 신령한 몸으로 살 것이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이 반드시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리라고 할 수 없다.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겠기 때문이다.

 

24. 하나님이 처음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영혼과 몸이 결합된 것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렇더라도 이 두 부분을 따로따로 써서 사람을 표시한다. ‘그 사람은 죽어서 지금 평안히 쉬고 있다’, 또는 벌을 받고 있다고 할 때에, 이 말은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만, 일상 용어로는 이런 말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디어디에 묻혔다고 할 때에, 이것은 그의 신체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다.

 

영혼을 속 사람’, 몸을 겉 사람이라고 해서(고후4:16) 이 둘이 한 사람을 이루지만,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사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앞의 말은 이성적인 영혼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이것을 사람 속에 두셨다. 사람의 몸 안에 불어넣으셨다. 숨으로 불어 넣으셨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뒤의 말은 하나님이 먼지로 지으신 그 몸을 가리킨다. 곧 영혼(anima)을 받아서 생물(aniakle)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생령이 된 것이다.

 

주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신 것은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또한 독생자의 영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셨음이 분명하다. 성부와 성자, 이 두 분의 영은 한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입에서 나온 물질적인 숨은 성령의 본질이나 본성이 아니고 한 상징이었다. 이 영을 성경에서는 으례 프뉴마라는 그리스말로 표시하며, 주님도 이 단어를 쓰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고 하는 말씀에서 그리스어 성경은 성령을 교시할 때에 보통 쓰는 프뉴마를 쓰지 않고 프노에라는 말을 썼다.

 

사람은 이성적인 영혼을 받았으며,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영혼과 같이 물과 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으로 창조되었지만 다른 동물들과 같이 동물적인’(animale) 몸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며, 이 몸은 영혼이 그 속에 살고 있을 때에 창조된다.

 

사도의 말씀과 같이, 처음 사람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에 입은 육의 몸은 전혀 죽을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으면 죽음을 당하지 않게 만든 것이었다. 그 몸이 앞으로 살려 주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하며 영원불멸하게 되며, 영원불멸하도록 창조된 영혼과 같이 전혀 죽지 않게 될 것이다. 영혼도 죄를 지음으로써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때에 영혼은 어떤 종류의 생명, 즉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에 속하며 행복한 생명을 보존한 거룩한 천사들과 같은 시민인 사람들은 신령한 몸을 받아 입어, 그 후로는 죄를 짓거나 죽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이 받아 입을 영원불멸은 천사들의 영원불멸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빼앗기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육신의 본질은 변하지 않겠지만, 육신의 부패성이나 나태성은 흔적도 없을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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