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78:70-72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삼중직으로 오셨고,
다윗은 그 중 왕의 직임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
이 한 절은 마태복음과 신약의 시작이요, 동시에 구약을 연결하는 고리이고 균형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택하신 혈통(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예표하며,
다윗은, 택하신 왕권으로, 영원한 통치권(왕권)을 예표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창13:5,17:8)
“내가 네 몸에서 날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2-13,16)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왕권을 상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잃어버린 형상과 통치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5:17)
그리스도인의 신분과 특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어마어마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형상)이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왕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신분을 확실히 하자.
1 다윗은 양의 우리에서 취하셨다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시78:0-71)
하나님은 왕권을 맡길 자를 찾으시되 왕궁에서도 아니고 군대에서도 아니고 대학에서도 아니셨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날 자를 헤롯의 왕궁에 가서 찾았다.
우리도 왕의 후손이나 재벌의 후손, 장군이나 학자의 후손 쯤 되어야 왕이 되는 줄 알고
미리 쫄고 야코(양코의 준말, 압도 당해서 기를 펴지 못하는 상태)부터 죽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형상)이요,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로써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는다.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룬다.
그 위대한 왕으로 알려진 다윗도 왕후장상(왕과 제후,장수와 재상)의 씨로 난 것이 아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가문의 영광도 만들어가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이치도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사람 택하시고 쓰시는 방법은 그 지혜가 탁월하시고 감사할 뿐이다.
다윗을 양치는 목자 중에서 택하셨다.
사무엘도 왕으로 세울 자를 찾으로 가서 외모만 보고서 일곱 아들을 다 실패하였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마음 중심을 보시고 젖 양을 기르는 섬세함과 긍휼함을 보셨다.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되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셨다고 했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10-11)
주님은 강한 자로 임하시되,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신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갖추어 가야 할 덕목이다.
강하고 담대하면서도, 겸손과 온유함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심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표하였다.
우리 주님은 베들레헴 작은 마을 마굿간에서 나셨고,
나사렛 작은 마을에서 30년 동안 목수생활하셨다.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도 예루살렘이 우습게 보는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셨고,
훗일을 맡길 제자들도 갈릴리 어부 출신들로 주로 채우셨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자들이었다.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 위에 이름이 새겨질 자들이었다.
지극히 낮아지심에서 지극히 높아지심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 세우시는 방법이다.
양의 우리에서 목자를 취하여 왕으로 세우신다.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지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우리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는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부터 지극히 높은 자리로 올리우셨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지극히 높은 보좌의 우편에 앉으셨다.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그분의 발 자취를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영광에서 영광으로’는 하나님의 사전에는 없다.
‘십자가에서 보좌로’, ‘작은 가지에서 강국으로’ 가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60“21-22)
2 다윗은 마음의 완전함으로 이스라엘을 길렀다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시78:71-7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항상 야곱이다.
야심과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갖은 모략과 수단을 부리다가 20년 동안 종살이한 야곱이다.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여 허벅지 관절이 상하면서도 축복을 받아낸 야곱이다.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시고 그 열 두 아들을 지파로 삼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야곱과 같은 말썽꾸러기 자녀도 믿음만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울도 바울로 돌려서 하나님은 쓰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마음의 완전함을 이루어 가신다.
성경은 능력의 책이라기보다는 성품의 책이다.
모세를 왕궁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연단하여, 출애굽의 대장정 40년을 맡기셨다.
욥은 그가 연단하신 후에는 정금이 되어 나온다고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성품의 완전함을 위한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도 제자로서의 마음의 완전함을 위해서다.
광야에서의 훈련과 연단 없이 가나안의 기업은 없다.
광야는 성취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성품을 위한 장소이다.
광야에서 우리가 이루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우리 마음의 완전함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서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변화(성숙)되어 가야 한다.
불뱀과 전갈이 있는 물이 없는 간조한 땅, 그 위험한 광야, 위기의 날들을 지나게 하심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맡길 성품을 다지시기 위함이다.
그 어떤 고난도 위험도 위기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우리의 일생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인도하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라고 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소망으로 붙들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면서 우리의 연약한 성품을 온전히 이루어가야 한다.
쓰임 받을 그날을 바라보며, 영광의 날을 기대하며 오늘의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한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려서,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 한분을 의뢰해야 한다.
마음의 완전함이 영광을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음의 완전함을 이루기까지 어떤 형편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만 한다.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배고픔과 배부름에도 처할 줄 알고,
더운 물에도 찬물에도 처할 줄 아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마음의 완전함’에 이르고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약할 그 때가, 그가 고난 받을 때가, 곧 강함이라고 고백하였다.
우리가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하여지는 비밀을 터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가졌다고 교만하면 낮추시고, 없어도 겸손하면 높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5-7)
3 다윗은 손의 능숙함으로 지도하였다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78:72)
마음의 완전함과 함께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 손의 능숙함이다.
성품과 능력의 균형이다.
손의 능숙함이 없다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양이나 치며 세월을 헛 보낸 것이 아니었다.
광야 생활의 고난과 위기를 처리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손의 능숙함을 익혔다.
그것은 그가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혜로운 수단이 되었다.
다윗은 자기 손에 익숙한 물맷 돌로 골리앗을 쳐서 이겼다.
사울왕은 자기 갑옷과 무기를 입혀서 보낼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내 손의 익숙함이 골리앗을 잡고, 이스라엘을 잘 지도할 수 있게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과 은사들이 있다.
자기의 가진 것은 무시하고 남의 것만 크게 보지 않아야 한다.
남이 가진 고구마는 더 커 보이고, 강 건너 풀은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한다.
자식도 뭘로 만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되고 싶었지만 못한 것 자식한테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국화(포도나무)로 주셨는데 장미(백양목)로 만들려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노벨상의 3분의 1을 유대인들이 차지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면, 어떤 재능을 타고 났는지를 유심히 살피고
오직 그것을 키워주고 물주고 비료주고 할 뿐이라고 한다.
내가 잘 하는 것이 있다.
에디슨은 수많은 실패를 하면서도 밥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리며 발명을 재미있게 하였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 그것을 하고 살아야 일생 행복하고 익숙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내 손의 익숙함이 훗날 큰 일을 처리하는 데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베드로의 고기 잡는 손의 익숙함이 사람을 낚는 데 쓰임 받았다.
모세의 왕궁에서의 학문의 익숙함이 모세오경을 쓰는 데 쓰임 받았다.
바울의 가말리엘 문하에서의 학문과 헬라 문화의 익숙함이 중요한 서신들을 쓰는 데 쓰임 받았다.
목사들도 법학이나 철학의 훈련 받은 사람들이 그 손의 익숙함으로 가르침에 유용하게 쓰임 받는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손의 익숙함을 길러준다.
그것들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쓰임을 받는다.
우리의 재능과 경험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손의 익숙함을 내세워 내가 하겠노라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나는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려야 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우리의 전 생애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실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는 자니”(엡2:10)
우리 마음의 완전함도 우리 손의 익숙함도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이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키우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셨다.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모형과 예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다윗의 영혼을 소생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 길이 다윗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고, 마침내 왕이 되었고 그의 잔이 넘치게 되었다.
양의 우리 같은 곳에서 젖 양이나 치며 산다고 신세한탄을 혹시 하고 있는가?
왕으로 택함 받는 곳은 바로 그곳인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다.
내가 처한 곳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아름다운 지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성령을 의지하면서 마음의 완전함과 손의 익숙함을 이루며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삶을 닮고 그분의 향기를 풍기며 사는 우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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