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자기부인의 부족
우리 사역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자기부인의 성격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의문(儀文)으로 쓴 목회사역이지 영으로 한 사역이 아니라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본능과 옛 습성들의 영향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 결국 성경적인 실천 기준을 낮추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부인의 습관의 계발과 실천은 목회의 매우 유익한 근원이 된다.
사도 바울은 운동선수의 일상적인 절제를 우리 앞에 제시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의 목회 수행의 예증이며, 자기 자신의 확고부동함을 보존하기 위한 안전보장책이었다(고전9:25-27). 절제하는 습관의 필요성은, 자신이 아무리 높은 달성을 이루었다 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선교사 엘리엇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았다는 것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화려함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듯이, 자기에게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리엇은 육신의 정욕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억제했다. 그리고 어떤 목사가 자기를 중요시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그는 다음의 말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로 갔다. 형제여, 자기를 죽이는 것을 배우십시오. 자기를 죽이는 것을 배우십시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딤전3:5). 하나님께 대해 충성하려면, 계속적인 기도와 말씀사역에 자기를 드리는 일과 조화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줄이든지 또는 단념해야 한다. 목사는 정욕으로 말미암은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으름이나 경거망동 등의 포착하기 미묘한 방종은 세상적인 방탕만큼이나 해로운 영향력을 가지고 여전히 목사를 에워싼다.
이 중요한 자기부인의 습관은 사람들과의 교제와 우리 예의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을 부인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젊은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 교회로 이동하는 경우) 그 사람들을 목사의 가르침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서는, 그는 그들의 예법을 알아야 하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표현 방식을 알아야 하며, 서로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사역은 그분의 종들에게 최선의 모범이다. 자신이 말씀하실 수 있는 무한한 지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 같은 수준에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분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막4:33). 그리고 자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확신을 가지고 “자기를 배우라”고 그들을 권유하셨다(마11:29). 이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감의 문이 닫히며 따라서 성공도 보이지 않게 된다. 또 목사의 교제에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쫓아내는 능력만 생길 것이다. 울퉁불퉁한 곳들이 평탄하게 되는 대신에, 오히려 더욱더 험난해지고 아무것도 스며들지 않는 곳이 될 것이다.
사역의 임무들을 수행하자면, 그리스도의 자기부인을 늘 실천해야 한다. 자기부인이란 곧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에 빠진 나머지, 그의 음식과 휴식은 심지어 잊어버린바 되었다(요4:6; 31-34). 꼭 필요해서 한적한 곳에 계셨던 때에도 방해를 받으셨지만, 그것을 심하게 꾸짖지 않으셨다(막1:35-38).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나 피곤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한 마음에 아무런 제한도 주지 못했다. 사도 바울 또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편안함보다 자기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유리한 쪽을 얼마나 일관되게 선호했던가! 우리의 쉽고 편안한 삶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것들을 매일 희생시켜야 한다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병든 자들의 심방에 관해서, 그림쇼(Grimshaw) 목사에 대해 이런 말이 있다.
밤과 낮이 그에게는 똑같았다. 감히 다른 사람들은 문 밖에 나갈 생각도 못하던 눈보라가 치는 밤에 그는 병자 한 사람을 심방하러 수 마일을 걸어갔다.
우리는 전체 양떼의 목자가 되어야지, 선택된 소수의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 내키는 대로 제일 가망 있고 관심이 가는 자들만 돌아보아서는 안 되며, 선한 목자와 같이 잃은 양에게 일차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눅15:4).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주 그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함을 담당해야 한다. 또한 때때로 그들의 주제넘은 요구와 함당치 못한 요구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큰 목적이 있으면, 심지어 고침을 받으러 온 다리 저는 자들이나 병자들이라도 길 밖으로 쫓아내 버릴만한 호된 말투나 불쾌한 언동의 모양을 자제하게 될 것이다(히12:13).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중 가장 못된 사람들이라도, 온전한 자기 몫의 우리의 배려를 받아야 한다. 적절한 때에나 또는 심지어 우리가 불편해할 때에라도 그 사람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다가올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이 망설이고 있는 것, 그리고 어려운 일 하나까지 주의 깊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민의 실천은 우리 사역의 성공 여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실질적인 설교의 틀을 제공해 줄 것이다. 고전적인 학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 기력과 활동이 약해지는 경향이 미세하게 증가한다. 마씰론(Massillon)은 이 점에 대해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하였다.
어느 때이고 당신의 사역을 명예롭게 쉬고 있을 수 있는 상황으로 결코 생각하지 마라. 만일 시간을 다르게 사용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지옥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면, 그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생각은 하지 마라. 통상적으로 하는 당신의 공적 임무를 다했다고 자족하지 마라. 그 일을 마친 후에라도, 다른 모든 일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해서는 안 된다. 긴 세월의 수고를 하였으니 이제 휴식을 취할 자격을 얻을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당신의 젊은 때처럼 독수리와 같은 새 힘을 얻게 하라. 열심을 내면 힘을 공급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값진 노후의 잔해는 사역에는 매우 명예로운 것이다.
우리 목회상의 연구(공부하는 습관)도 자기부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목사의 학문 추구는 많은 경우에 있어 그의 신앙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한 개인의 취향에 맞거나 자신의 여가선용을 위해 필요한 세상 학문들은 자신의 목회 업무에 양심적으로 헌신한 목사의 주요 대상은 될 수 없다. 그 연구가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을 세속화시키고, 우리 시간을 빼앗아가며, 우리의 관심을 우리 회중에게 집중시켜야 하는 일로부터 분산시켜 놓는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감독하지 않으면, 우리 회중은 무지와 죄로 멸망할 위험에 빠질 것이다. 스콧트(Scott)는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한 서약이 있다. 우리의 모든 독서는 가르침 이라는 직접적인 목적에 종속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어떤 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좋은 책이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옹호하고 변론하게 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항상 목사로서 주목하라. 단순히 오락이나 호기심으로, 또는 학문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혹은 독서에서 어떤 득을 얻기 위해 세상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하지 말라.
늘 자기부인을 실천하지 않고 괄목할만한 탁월함이나 성공에 도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복음사역자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송은, 닥터 존슨이 왓츠 박사에 대해 한 말이었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는 영혼을 위한 끊임없는 갈망 때문에 그것은 신학으로 전환되었다.” 단호하게 이 한 가지 목적에만 골몰하여야 후에 목회 의무에서 물러날 때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기부인은 또한 목사의 오락과 레크레이션에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자기 마음이 현재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다른 곳으로 쏠리는 것을 감지하였을 때, 세실 목사는 자기 바이올린의 현들을 끊었고, 자기 그림붓을 집어 치웠다. 스콧트 목사는 우리에게 권면한다.
사역이 우리 모든 시간을 차지하게 하라. 심지어 레크리에이션과 운동으로 기분전환하는 것까지도 잘 조절하고 적당히 해야 하고 종속시켜서, 그러한 활동들이 우리의 위대한 사역을 방해하거나 또는 사역을 하기에 부적절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역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준비를 하여서, 그러한 활동들이 모두 우리의 주목적에 쓸모가 있도록 하여야 한다.
정신과 육체도 적절한 휴식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치고, 편안함과 쾌락을 좋아해서 하나님께서 고용하신 일들을 하고자 하는 의욕을 경감시키지 않게, 그리고 우리의 소명에 부지런히 바쳐졌어야 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끊임없이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5장 탐욕의 풍조
탐욕은 로마 가톨릭의 부록이 되었다. 탐욕은 개신교와 영국 국교회의 목사들에게 맹장처럼 붙어 있다. 목사의 탐욕은 거의 속담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최고의 목회 은사를 가진 자가 어떻게 될 수도 있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예이다. 탐욕은 어떤 교회 체계의 잘못이 아니라, 부패하고 이기적인 마음의 당연한 원리이다.
성경이 이 이기적인 행동 원리를 거룩한 직분과 빈번하게 연관 짓고 있는 것(사61:11; 렘6:13; 미3:11; 마15-5-6)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종에게 매우 만연되어 있는 유혹을 경고하고자 함이었다.
만일 우리 개인의 습관이나 우리 부양가족들이 이에 오염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 빠지기 쉬운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열심히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신뢰를 잃겠는가! 우리 교인들에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라고 우리가 경고할 때,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정원에 이 파괴적인 잡초가 있지 않은지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다.
우리 사역에게까지 미치는, 돈의 끔찍한 영향력에 대한 성경의 선포를 실제적으로 믿는 믿음을 늘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딤전6:11)라는 말은 한 아버지가 한 젊은 목사에게 하는 조언이다. 사도의 검소함과 자기부인과 사도의 사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목회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남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탐욕은 세상을 좇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럴 듯한 가면을 쓰고 있다. 탐욕은 필요성, 정의, 신중함, 그리고 경제의 덮개를 쓰고 주장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속임수의 옷 아래 숨어있는 그 진짜 성격을 탐지해 낼 수 있다. 비싼 옷이나 음식, 가구, 생활양식 등에는 거의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 흔히 우리의 구실이 되고 있지 않는가?
가정의 경제생활에서 자기부인은 또한 건전한 검약을 실천하여야 한다. 검약은 이 세상의 것들을 바른 방향으로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 누구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것, 세상의 것을 이용하되 그것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 것, 선한 청지기처럼 우리 가족들이 교회의 짐이 되지 않을 만큼 현재의 필수품을 잘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족과 더불어 이것은 올바른 인격을 형성한다.
탐욕의 두드러진 양상은 지나치게 아끼는 습관, 우리가 소유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 또 우리가 가진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꺼려하는 뿌리깊은 성향과 같은 것들이다. 따라서 탐욕보다 사역에 더 치명적인 장애물이 없다. 이 우상숭배 같은 성품보다 더 세상의 눈에 우리 개인과 우리의 수고를 경멸할 만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탐욕은, 사람들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리는 우리 직분의 위대한 목적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우리가 가진 돈의 정도에 따라 사역과 자선 그리고 대접에 전념할 수 있는, 우리 쓸모의 많은 원천들을 부패시켜 놓기 때문이다. 탐욕은 영혼이 영적으로 향상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 직분의 신성한 성격을 더럽힌다.
인간을 부패시키는 이 열정을 방지할 가장 효과적인 예방책은, 소수의 욕구만을 가지는 것이며, 우리의 가난한 그리스도인 날품팔이 노동자들로부터 장래를 위해 믿음을 진작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사람이나 시간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영원을 위해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와 같은 인간들의 유익을 항상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 주님의 삶과 본을 공부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늘 바라봄으로 이 정신에 점차적으로 부합하고자 하는 것이며, 더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계속해서 인도하고자 하는 진지한 욕망이 목사에게 허락된 유일의 탐욕이라는 사실을 목사로서 기억하는 것이다.
6장 혼자 있는 시간을 소홀히 하는 것
목회 일을 끊임없이 급하게 그리고 왕성하게 하고 있는 중에,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의 사려 깊은 충고는 얼마나 적절한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6:31).
끊임없이 일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기도의 영이 자유롭게 숨쉴 수가 없다. 자기부인과 인내를 새로운 마음으로 실천하기 위한 영적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우리는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한다. 회심 직후에 있었던 사도 바울의 아라비아 여행은 자기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은 계시를 받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습관을 기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들이나 목회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목사는 성경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가르침은 자기 직분의 큰 목적들을 위한 효과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팰리 박사는 젊은 목사들에게 사역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시간을 “거의 모든 좋은 습관의 기반으로서” 지혜롭게 추천하고 있다.
혼자서 사는 법을 배워라. 당신의 실수 절반은 이 능력이 부족한데서 생기는 것이다. 혼자 있는시간을 못 견뎌하면, 당신은 계속해서 당신의 교구에서, 가정으로, 직무로 돌아다니게 되고, 모든 쾌락의 파티와 기분전환의 장소에서 당신은 가장 앞장서게 된다. 혼자 있는 것을 참지 못하면, 당신의 생각들은 흩어 없어지게 되고, 연구로부터 집중력이 분산되며, 돈을 쓰게 되며, 늘 걱정거리가 따르며, 자기 직분을 감당할 때 기쁨이 없게 될 것이다.
목사의 삶의 행복과 그의 사역의 효과는, 공적인 일이나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혼자 있는 습관과 얼마나 신중하게 잘 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한적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루터는 그의 시간 중 가장 좋은 세 시간을 떼어 이 일에 사용하였고, 브래드포드(Bradford)는 공부를 그의 무릎으로 하였다. 근면한 목사는 자기 교구뿐만 아니라 자기 서재에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와 자신의 교인들에게 중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의 목회의 내용을 반드시 소화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늘 더 가까이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자신의 마음에 열어주신 그 성경의 열매를 교인들을 위한 영혼의 양식으로 생산해낸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기쁜 일이며, 우리 교인들을 얼마나 새롭게 하겠는가! 기도 속에서 획득되고 전해지는 진리에는 독특한 기쁨이 있다. 마씰론은 말한다.
우리 사역의 정신은 기도의 정신이다. 기도는 목사의 광채를 더하는 것이요, 인격의 주요 특징이다. 기도가 없으면, 사역자는 교회에 아무 소용도 없는 존재요,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그가 씨를 뿌리나, 하나님은 소출을 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다른 목회에 힘과 효력을 주는 것은 기도뿐이다. 목사의 모든 수고에 위로를 공급해주는 것은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 사역의 절반에 해당한다(행6:4). 그리고 기도는 그 나머지 절반의 사역에도 그 모든 힘과 성공을 준다. 기도는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영적인 교통을 얻는 지정된 수단이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동행하는 자들은 “언약의 비밀”(시25:14; 고후3:5-6)을 가장 영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다.
기도는 또한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역의 능력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심전력 수고하는 사역도 더욱 힘 있게 해 줄 것이다. 근원지에 가까이 살고 있으면, 우리는 빛과 지지와 위로의 신선한 공급을 끊임없이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임무들을 도와주며, 우리를 능력 있게 하여 어려운 일들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며,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사역의 인정과 그 궁극적인 성공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기도 없이 이루어진 중요한 일은 없었다(눅3;21). 우리 주님도 자신의 첫 사역자들을 임명하시기 전에 먼저 하룻밤을 기도로 보냈다(눅6:12). 가르침과 병 고침의 일로 하루를 보낸 후에, 이 거룩한 일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줄이셨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소홀히 하면 우리를 비옥하게 하거나 위로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죽어버리게 될 것이다. “너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헛된 것과 세상은 문 밖에 두고 닫어 버리라. 심지어 성도들의 교제를 위한 시간도 그리하라. 우리 일이 우리자신에게 올무가 되지 않도록, 양떼들에게 풍기는 우리의 모든 영적인 분위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찰스 브리지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4부 목회사역의 공적 임무(강의안) (0) | 2016.07.01 |
---|---|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3부 목사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비효과적 목회의 원인-강의안(3) (0) | 2016.06.23 |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3부 목사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비효과적 목회의 원인-강의안(1) (0) | 2016.06.09 |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2부 목회사역에 성공이 적은 일반 원인-강의안 (0) | 2016.06.06 |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1부 목회사역의 개관(1)-강의안 (0) | 2016.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