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목회사역에 성공이 적은 일반 원인
1장 목회 성공의 성경적 보장과 그 성격: 성공 부족의 징후들
1. 목회 성공의 보장
우리가 하는 조사의 근거는 목회 성공의 보장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사역에 근면하고 인내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준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나 열심 또는 설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영원히 확고히 서 있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사도 시대 이후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고 그 사역이 계속되는 한, 반드시 성공적인 사역이 진행되었다. 길가나 돌밭, 또는 가시떨기가 많은 땅에 떨어지는 씨앗도 있지만,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마13:3-8).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요6:37) 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같은 성공을 보장받을 것이며, 우리의 사역에 성공적인 평가가 내려질 것은 확실하다.
2. 가시적 성공
보장받은 성공의 구체적인 성격에 관해 말할 때, 가시적인 성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는 사람이 있고 물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전3:6). 터를 놓는 사람도 있고 그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고전3:10). 보이는 부분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설계하는 사람도 있다. 성공은 회심 사역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회심시키는 일에 실패한 곳에서도 여전히, 목회 사역으로 인해 설득하고, 책망하고, 권면하며, 깨우치고, 위로했음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어느 정도는 누군가가 성공을 하고 있다. 순전한 믿음으로 말씀을 전달할 때, 말씀은 결단코 헛되이 하나님께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또한 말씀은 전혀 소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분의 변함없는 뜻을 성취하지 못함이 없다. 우리는 현재의 성공은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감흥도 없이, 지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충실한 사역이 있을 수도 있다(막4:26; 눅17:24). 가장 무거운 이삭을 맺는 씨앗은 땅속에 가장 오래 머물러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병석이나 임종에서 우리 사역의 숨어 있는 열매를 보고서 우리 마음에 기쁨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더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욱 부지런히 일하게 하기 위함이요, 시험에 들지 않게 우리를 보호하려는 지혜로운 사랑의 배려로부터 일 것이다.
목회의 성공은 현재 보이는 것 그 이상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가 흙 속에 눕게 될 때까지 시앗이 흙덩어리 밑에 누워 있다가 싹이 틀 수도 있다. 옛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은 씨를 뿌리고, 다른 한 사람이 거둔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사역이 미래의 추수를 위한 파종의 시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위로일까? 혹은, 우리가 추수를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씨 뿌리는 일을 소홀히 해야 하겠는가? 비록 우리가 밭에서 직접 추수하는 일꾼은 아닐지라도,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되지 않을까?(요4:36-38). “마케도냐 사람”이 손짓하는 환상을 본 직접적인 열매는 오직 두 사람뿐이다. 그러나 왕성해지고 있는 그 지역의 교회들이 거둬들인 수확은 얼마나 풍성했는가?(행16:5-6; 롬15:16). 그러므로 우리의 명백하고 고무적인 의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씨를 뿌리는 것이다.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인내도 있어야 하지만, 기대감 또한 있어야 한다. 성공의 보장은 확실하다. 목사의 수고의 열매는 그 성공의 징후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양육에 비례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믿음과 인내를 가져야 한다. 때로는 아주 심한 정도로 가져야 한다. 그러나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는 파종의 시간이 끝난 후에는, 우리는 우리의 단을 기쁨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 단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을 것이다. 그 단들은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시126:5-6; 롬15:16). 평가와 시간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의 영역은 사역이고, 성공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영역이다.
3. 목회 성공의 부족
그러나 보장된 기대에도 불구하고, 목회 성공의 부족은 안타깝게도 아주 광범위하게 감지되고 있다.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17:7). 이렇게 낙심천만한 어두운 징후들은 진지하게 기도의 소리를 더욱 크게 높이라고 요구한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사64:1; 합3:2).
2장 하나님의 권능 유보: 목회 성공 부족의 주요 원인
성공에 대한 성경의 보장은 우리로 하여금 목회사역의 수고에 대해 높은 기대감을 준다. 그러나 이 밝은 전망 위에 다소간에 구름이 덮여 있다.
땅을 많이 경작하였는데도 때로는 그 넓이에 비례한 수확을 거두지 못한다. 자기의 정당한 기대치를 거두지 못한 실패의 원인들을 조사해보지 않고서, 수포로 돌아갈 것이 분명한 상당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누가 자기 농지를 경작하겠는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세실(Cecil)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사역에는 영적인 권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 나 자신의 경우에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것이 보인다.” 우리 중에 만연되어 있는 열매 맺지 못함의 징후들을, 이 말은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성경의 증언으로 돌아가 보더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은 일치된 방향으로 성령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는데, 성령의 능력은 말씀의 인치심과 확증이며 생명을 주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터 위에 첫 번째 산돌이 놓인 그 때 이후로 온 교회에 널리 미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 유보되면 목회의 비효율성의 괴로운 징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목회 성공의 주요 원천이 된다. 복음이 성공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영향력을 끼칠 때, 그것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실 그 때까지는, 아주 경작을 부지런히 함에도 불구하고, 광야는 광야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축복의 약속이 어째서 유보되는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6). 그렇지만 우리는 자문 없는 묵인 속에 잠을 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능력을 열심히 구하고, 또 이 능력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우리는 적극적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딤후1:6)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하늘의 축복을 홀로 주장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강단에서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는가?(요16:45; 행2:36-37; 10:43-44).
하나님은 자기 축복을 나눠주심에 있어 정말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아낌없이 약속하셨으므로, 신실하게 수행하실 것이다. 모든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하라. 그러나 의지하면서, 자기 부인, 자기 포기와 함께 사용하라. 목사들은 자기 교인들에게 당치않게 우쭐거리지 말라. 우리는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고전3:5-7). 그리고 자기 수고에 의지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분은 자기의 영광을 타인에게 결코 빼앗기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3장 육적인 마음의 적개심: 목회 성공 부족의 주요 원인
목회사역의 직무란 ‘화목의 사역’이다. 이 화목의 사역에서, 하나님이 먼저 화평의 제안을 하신다. 그리고 자기 사신들을 보내 간절히 탄원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고후5:18-20). 그런데 이러한 자비의 선포는 보편적으로 환영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거부하는 세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 선포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우리가 가는 길 전체는 죄의 힘쎈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투쟁이다. 이 죄는 육적인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은 그칠 줄 모르는 편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가장 높은 권위에 의거해서 이 죄는 “하나님과 원수”(롬8:7)가 된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목사가 책임질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목사의 무지함, 일탈, 일관성 결여, 그리고 화목과 친절한 영접의 부족은 이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일 것이다.
우리의 사역의 본질과 우리의 사역의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내재적인 반대는 우리 성공에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 이미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그들에게, 정서가 기울어진지 이미 오래된 그들에게, 그리고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굳어진 그들에게,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진지하고 정직한 마음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적개심은 인간 타락성의 농축된 본질이며, 도덕적 흑암 또는 영적 흑암의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이 흑암은 빛의 입구를 닫아버려 이해의 눈을 밝히는 과정에 어려움을 초래한다. 하늘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 흑암은 정복할 수 없다.
4장 사탄의 힘: 목회 성공의 주된 방해물
사탄의 활동적인 힘과 탐지하기 어려운 그 치밀함은, “어떤 견고한 진지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고후10:4-5)처럼 항상 목회사역을 방해한다. 구속자의 나라를 공격하는 그의 거대한 공격지점이 바로 목회이다.
사탄의 그칠 줄 모르는 반대의 성질과 그 범위는 정확히 정의내리기보다는 차라리 상상해 보는 것이 덜 어렵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만난다. 세상에서 그의 영향력은 명백하다. 또한 신앙을 고백한 교회에서도, 쉬지 아니하는 이 원수는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교활한 누룩의 일을 한다. 사탄은 시대의 취향에 맞춰 기분 좋은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게 해서 자기의 영적 간계를 은폐한다. 인간의 고안품을 섞어 넣음으로써 생명의 떡에 해독을 끼친다. 사탄의 치밀함은 피해자들의 각기 다른 기질에 맞추어 각기 다른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육적인 안정은 세상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4)해서 접근한다.
5장 목회 성공의 지역적인 방해물들
6장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핍: 목회사역 실패의 주요 원인
우리는 때때로 목회 실패의 원인이 사역으로 들어가는 바로 문턱에 있음을 발견한다. 교회의 질서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직분에 부름 받은 것이 분명한가? 중대한 이 주제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소명이 분명한 곳에, 약속은 보증이 된다(출3:10-12; 렘1:4-19).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도 달음질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수고의 결과는 축복과는 무관할 것이다. 이 질문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두렵기조차 하다. 그러나 그들의 효과 없는 사역에 대해 씌여진 다음과 같은 교회의 확고한 규정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렘23:32).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을 침범하는 것은 가장 위험천만한 주제넘은 행동으로 여겨졌다(민18:7; 대하26:16-20).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은 권한을 가지는 것은 그에 못지않은 찬탈 행위 그 자체이다.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은 자신이 위임한 권위가 아닌, 위임받은 권위를 가지고 오셨다. 선지자로서 그는 자신이 위대한 사역에 부름 받았음을 선포하였다(사48:16; 41:1).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위임한 권위를 가진 전령, 대사, 청지기, 사자를 상상할 수 없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 그들은 사명을 받지 않고서도 전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로서는 설교할 수 없다. 자기의 주권자로부터 지침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대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의 권위를 가지지 않고 양의 우리로 들어간 자들을 “도둑이요 강도들”이라고 주님은 분명하게 구별하셨다.
우리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함께 나온다. 즉 원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나, 교회라는 수단을 통하여 확정되는 것이다. 외적 소명은 거룩하고 근원적인 규정에 따라 교회로부터 받은 위임이요 교회가 인정한 위임이다. 목사에게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내적으로 그리고 합당하게 자격을 준 사람에게 신임장을 주는 것이다. 이 소명은 단지 공적인 권위를 주는 것뿐이다. 내적 소명은 의지와 판단을 지도하고 개인적인 자격요건들을 갖추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이요 권능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소명, 다 우리가 위임받은 것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딤전1:12)도 이 결합된 권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이 거룩한 부르심에는 두 가지 큰 자격요건이 결합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역에 대한 열망과 그 적합성이다.
1. 사역에 대한 열망은 그리스도의 목회 성격과 그의 자격요건에서 두드러진 면모이다.
사도 바울은 강권하는 열망을 목사의 첫 번째 자격으로 꼽았다. 이 열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반 그리스도인의 바람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속에서 불타고 있는 특별한 것이다. 강도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 성격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던 그 마음을 말한다(렘20:9). 이 강권은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사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마음의 준비를 재빠르게 만듦으로, 다소 주제넘은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자신이 누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거의 입을 열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랑의 느낌이 있으면 가슴이 충만해진다. 그리고 그 느낌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든다(사6:5-8). 최고로 높은 이 지상의 명예보다 이 사역을 더 바라게 된다. 그래서 기대가 무너진 가장 실망스런 상황에서조차도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심 없는 열망이어야 한다. 주님의 일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역에서조차 순수한 동기는 필수불가결하다. 우리 자신을 위해 큰 것들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 이외의 그 무엇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세상을 자신에게로 이끌어오게 하려 하기보다는,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재능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바쳐야 한다.
2. 그러나 이 열망에게 능력 있게 목회할 수 있는 은사가 덧붙여져야 한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소명의 이 증거를 갖추고 있었고, 또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능력을 우리의 사명과 뚜렷하게 연결시킨다. 그는 우리의 사명을 일반적으로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위탁하라고 지시하지 않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들에게 위탁하라고 하였다.
거룩한 사역을 위한 능력은 타고난 재능 또는 이 세상의 지혜와 학식은, 비록 부수적으로 매우 유용하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목사의 자격요건들의 필수적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인간의 학식을 잘 갖추고 있다. 이 귀중한 재능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서 자신이 획득한 배움을 보다 높은 가치로 사용한다. 목회초보자들은 자신의 자연적인 재능을 의식적으로 향상시키고, 영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성도 부지런히 증대시키면서, 매일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라. 그러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25:29)는 약속이 이루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열망과 능력의 결합은 아주 중요해서, 서로 분리되어서는 그 어느 쪽도 충분할 수가 없다. 마치 일꾼들이 아무리 가고 싶다고 해도,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일꾼들을 주께서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신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판단, 특별히 경험이 많은 목사들의 판단은, 사역에 대한 열망이 행동 원리의 충동이 아니라 감정의 충동이지 않은지,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평가가 자기망상적인 주제넘음에서 나온 것인지, 마음에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데 유용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마치려함에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목사의 임무를 통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거룩한 사역에 들어섰다는 것이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죄의 기억으로 인해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해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거룩한 제단에 접근한 것으로 인하여 괴로워하자. 그러나 과도하게 슬퍼하지는 말자.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넓으신 은혜로 기억하는 기회로 삼고, 우리 미래의 사역에서 배가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동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딤전1:11-16). 특별히 안수 받았던 날이 매년 돌아올 때마다 그 때 했던 서약을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서약의 책임감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우리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서약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의 큰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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