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 즉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데 있다/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6. 7. 26. 20:39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실질적인 열쇠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1:16의 말씀이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생명이다. 이 점을 잊으면 기독교 전체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과 찬란함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생명, 즉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데 있다. 이 생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것,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대한 것이다. 나는 그의 충만한 데서 받고 있는가? 그의 충만함을 더 많이 받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열망이요 야망인가?

 

성경을 단순히 알아야 할 교과서로 여기고 접근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잘못은 없다. 성경의 본분은 거기 있지 않다. 성경의 전적인 목적은 인간에게 필요한 이 모든 충만함을 가진 분께 여러분을 인도하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생각하는 사람, 이면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의 실제 의미를 파악할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밝은 사람이었다. 주님의 유일무이하심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을 다른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하는 자는 아예 출발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그의 충만함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을 랍비라고, 스승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아직 접하지 못한 낯선 것이 주님께 있음을 인식했다.

 

같은 지위에 있던 다른 자들은 전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는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제가 볼 때 그는 주님이 이런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단순히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관계를 하나님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했고, 그 점에 끌렸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영적인 삶의 중대한 열쇠이다. 주님의 충만함을 받는 데 필요한 열쇠, 주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자라 가며 그의 충만함을 받는 데 필요한 중대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열쇠가 있어야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알고 영원한 영광을 미리 맛보는 무리에 속할 수 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니고데모는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기 상태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것은 중대하고도 기초적인 원리이다. 그는 더 큰 것을 바랐다. 많은 사람의 문제점은 자기만족에 빠져 이미 도달했고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이미 회심했다는 것이다. 결단했으니 다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니이다.” 이 새 선생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별도의 것, 더 깊은 것을 알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여러분에게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있는가? 더 크고 위대하고 깊은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니고데모의 가장 큰 장점이 이것이었다. 그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은 자기 속에 이런 필요가 있고 결핍이 있다는 사실, 더 충만해지고 싶은 갈망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 더 큰 충만함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식하며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이 열망을 모른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소망이 없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42:1)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알길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 일정 지점에 도달한 후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자기 경력에 만족해 버릴 수 있다. 신약성경을 읽고 주님을 바라볼 때 깊이 주리고 목마른 마음과 결핍감을 느끼는가? 우리 앞서 세상에 살며 교회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성도들의 생애를 읽을 때 그 필요를 느끼는가?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에 심령이 가난해진다. 이처럼 팔복은 서로 보완해 주며 어떤 의미에서 서로 설명해 준다.

 

중대한 교훈은, 니고데모는 자신의 감정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집회에서나 책을 읽거나 어떤 일을 겪을 때 어떤 갈망이 생긴다. 마음이 흔들리면서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간은 느낌이 들고, 더 좋고 높은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며, 그것을 얻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다. 왜 그럴까? 그 감정에 대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망이 잠시 왔다가 사라진다. 잔 물결이 잠시 영혼의 표면에 일었다가 가라앉는다. 돌풍이 잠시 불어 마음을 흔들다가 이내 잔잔해진다. 결국 모든 것을 잊고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니고데모는 위험과 대가를 감수하더라도 갑자기 등장한 새 선생에게 대화를 청하기로 결심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감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전체를 여는 열쇠가 여기 있다. 적용하고 행동하는 일, 자신의 선한 충동과 생각을 따르는 일, 자신을 찾아온 깊은 확신에 귀를 기울이는 일, 마침내 비결을 찾기까지 쉬거나 안주하지 않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니고데모처럼 해야 한다.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은 회심했고 수행할 과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매해 연초부터 연말까지 그 과업을 수행하며 살지만, 50년이 지나도 아무 변화 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이다. 여러분은 그런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이 충만한 기독교가 아님을 안다. 기독교는 기독교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독교가 아님을 안다. 여러분의 삶에는 이 심오한 특성,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니고데모의 본을 따르라. 행동하라!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그가 여러분을 다루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충만한 데서 받는 자는 자신이 아무 소망 없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니고데모는 도움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지 못했다. 기꺼이 배울 준비가 된 자로 나아왔을 뿐, 회개하는 자로 나아오지 않았다. 도움의 필요성만 느끼는 사람은 여전히 제 발로 서 있는 것이며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님에게 있는 무언가를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책의 부록 내지 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부록이 아니었다. 책 자체가 아예 잘못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생명임을 깨닫지 못했다. 이 위대한 머리, 위대한 인격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와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영혼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 종교나 도덕이나 철학이나 다른 무엇을 가졌든, 전부 무가치한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너의 관점은 전부 잘못되었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 로이드 존스, 요한복음 3장 강해, 1. 니고데모, pp 9-31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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