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10장 더욱더 (2017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5. 24. 14:05

10 장 더욱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9-10)

 

이제까지 말해오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여러 가지의 추론들을 전개해 나간다. 이 두 절은 구원의 확신이나 구원의 최종성에 관한 논증과 이성과 논리적인 연역에서 볼 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최고의 진술이다. 이것을 초월하는 확신의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의 성령 자신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증거다. 8:16도 같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것은 가장 최고의 확신의 형태이다.

여기서 사도는 십자가와 죽음의 주제를 또 다룬다.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주제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토록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을 주제이다. 십자가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는 사람은 십자가를 진정으로 안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 더욱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아야 한다. 5:15-17에서도 다시 발견한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15)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17) 이것은 논리와 합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 합리와 논리의 요소는 사도의 서신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감정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사도처럼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며, 분별있게 살 줄을 아는 사람이다. 위대한 사도로부터 총명한 논리와 예리한 분별력을 배워야 한다. 그는 이것은 명백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온다는 사실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절에서 논증하는 형태는 큰 것으로부터 보다 작은 것으로 전개해 가는 논증이다. 보다 큰 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작은 것은 필연적으로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 9절은 6-8절에서 끌어낸 결론을 진술한다. 10절은 더 상세하고 더욱 더 강한 어조로 되풀이한다. 진노하심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장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진노는 심판날에 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장차 올 그 큰 심판날에 안전할 것인가를 알고 안심할 수 있는가?

구원받는다의 어휘는 성경에서 세 가지 다른 시상과 의미에서 쓰여진다. 첫째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미 죄책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 둘째로, 아직도 구원을 받고 있다. 죄의 세력과 오염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화이다. 현재 우리 가운데서 계속되고 있는 진행과정이다. 셋째로, 전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이다.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구원받을 날이 온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도 죄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이다.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된다.’(24).

 

- 사도가 여기서 제기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에 답변된 그의 논증은 그러면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논증의 기초이다. 그것 때문에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의롭다함을 함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것이다. 법률적이고 법정적인 용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히고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혀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서는 것이다. 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에 대해 사도는 어휘를 다양화하고 있다.

3:24,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 되었다”.

3:28,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

10절에 그는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이라고 한다. 이해를 못하면 혼란에 빠지기 쉽다.

칭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칭의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칭의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의와 그의 죽음을 포함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대한 복종,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다. 이것이 중요한 요점이며 핵심이다.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진수는 십자가에 일어난 그 일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칭의를 가능케 한 것은 바로 그의 죽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방법을 생각해내고 계획해서 그것을 수행하도록 주님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의 피요, 그의 죽으심이요, 그의 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우리 주님 자신과 우리를 위하신 그의 구속사역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중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불경건한 자는 중생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 중생은 동시에 찾아온다. 하나님이 맨 먼저 우리를 중생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중생했으니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경건치 않은 자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의롭다 하신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성화로 인해서 우리의 선한 행실, 우리의 죄로부터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이라는 구절은 우리가 항상 지켜볼 위대한 푯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를 위해 자기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의 죽음에 내주시기까지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도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논증이다.

 

사도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이 구원의 방도가 하나의 완벽한 총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으면 그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이 논증을 즐거워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 구원의 모든 단계는 완벽한 전체의 부분들이다. 사도는 1-2절에서 이미 말했던 사실 즉 칭의가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칭의를 조달해 주셨다면 우리는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구원에 관해 아무런 근심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고 죄인들이었다. 10절에서 원수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여기 영원한 의요 거룩함을 지닌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에게 이르는 맨 처음의 일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일이다. 우리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 관한 근본적인 선고를 내리신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망의 모든 세계로부터 생명으로옮겨졌다. 우리는 결단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칭의가 얼마나 엄청난 사실인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의롭다 하실 때 그는 그 사람에 관한 최종적인 선고를 내리고 계시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안전한 사람이요, 영원토록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8).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그를 정죄하겠는가?”(8:23,34). 칭의는 우리가 포착하거나 체험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중대하고 영광스러운 사건이다.

 

마틴 루터가 칭의가 뜻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 그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교리를 인식함에서 온 것이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최종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1-2절에서 이미 말씀드렸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그 은혜 안에 서 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바로 그렇게 아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논증은 칭의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이미 모든 정죄의 한계에서 벗어나 있다.

 

우리 각자 모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즐거워하고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그것들을 반추해 나가고 있느냐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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