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폴 틸리히의 생애와 저작품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1886년 8월 20일 독일 부란테베르그 지방의 스탈찌젤 바이 구벤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민주적이고 진취적인 모친 사이에서 자라난 틸리히는 4살 때에 쉔플리스라는 작은 시골의 교구감독으로 발령 난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인구 3000명 정도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세풍의 작고 아름다운 도시인 쉔플리스에서 틸리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명상적이고 조용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5살 때에 베를린으로 건너가 고등학교 공부를 하며 대학진학을 준비했하던 중, 1903년에 사랑하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슬픔을 삭이며 공부를 했고 18살이 되던 1904년 그는 아버지를 따라 목회직에 몸을 바치기로 결단하였고, 또한 철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1904년에서 1909년까지 베를린 대학과 튀빙겐 대학과 할레대학에서 수학하며 구약신학자인 델리취에게서 앗시리아어를 배웠고, 헤겔파 학자인 아돌프 라손에게서 철학사를 들었으며, 훗날 좋은 친구가 된 헤르만 샤프트도 이때 만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에게 특별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우연히 들른 한 고서점에서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프리드리히 쉘링의 전집을 발견하게 된다. 틸리히는 이 전집을 읽으면서 쉘링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쉘링의 자연철학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 속에서 영원을 맛보고 영원에 참여했던 틸리히의 자연신비주의를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1911년에는 할레대학에서 「쉘링의 철학적 발전에 있어서 신비주의와 죄의식」이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할레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틸리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노교수 마르틴 캘러(Martin Kahler)를 만나게 된다. 캘러는 틸리히에게 바울에서 루터로 이어지는 이신칭의 교리의 깊은 의미와 역사적 예수보다 교회 공동체에 의해 믿어지고 고백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는 사상을 전수해 주었다.
목회자로서의 사역은 1912년 복음주의 루터파 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목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목으로 입대했다. 4년간의 군목 생활은 그의 생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틸리히는 19세기의 낙관주의적인 부르조아 문화의 영향 속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가장 좋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하면서 틸리히는 그의 세대가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인간 실존의 어두운 심연을 보게 된다. 19세기의 낙관주의와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이제 20세기의 실존적 불안과 절망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전쟁이 끝난 후 틸리히를 종교사회주의운동에 깊이 참여하게 만든다. 즉, 전쟁의 경험을 통해 그는 이전의 철학적 관념론과 신학적 초월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토대에서 신학적 사유와 행위를 전개하게 된다. 이 종교사회주의 운동(사회주의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보려는 운동)은 틸리히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문화 전체를 신학적 입장으로 해명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문화신학자의 길로 틸리히를 인도하게 된다.1)
틸리히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14년에 그레티 베버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독특하면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고 인습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자유로웠던 베버는 틸리히의 친구인 리처드 베게너와 깊은 관계에 빠져 아이를 낳게 되었고 이에 틸리히는 베버와 이혼하게 된다. 한 해 전에 일어 난 누이동생의 죽음과 이혼은 틸리히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술관에 자주 찾아 간 틸리히는 그곳에서 자기보다 10살 아래인 미술교사 한나 베르너를 만나게 된다. 베르너 역시 이혼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꾸준히 정신적인 교류를 가져오다가 1924년에 이들은 결혼하게 되고, 베르너는 틸리히의 마지막 병상을 지킨 여인이 된다.
틸리히가 교수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대전이 끝난 뒤였다. 대전이 끝나고 5년 동안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1924년에는 말스부르크 대학에 가서 신학교수가 되었으며, 1926년에서 1929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통이 된 후 틸리히는 「사회주의 결단」에서 나치의 정치 이념을 공박했다는 이유로 나치 당국에 의해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그때 독일을 방문중이던 라인홀드 리버 교수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로 가서 ꡐ철학적 신학ꡑ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1954년까지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교수하다가 교수직에서 은퇴하였고 1955년 하버드 대학교가 저명한 은퇴교수에게 제공하는 특별교수가 되었는데, 이것은 어느 분야든지 자유롭게 강의할 수 있는 영예로운 직책이었다. 1960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신학 강의를 하는 한 편, 불교학자 및 승려들과 대화를 나눈 것을 계기로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였다. 1962년에는 시카고 신과대학 신학교수로 취임했었다. 1966년 80회 생일이전에 시카고 대학 교수직을 떠나 뉴욕의 ꡒ뉴 스쿨ꡓ의 철학 교수직을 맡을 계획이었으나, 1965년 10월 22일 사망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틸리히의 주요 저서로는 틸리히의 논문을 모아 제임스 아담스가 편집한『프로테스탄트 시대』(The Protestant Era, 1948)와 서구 사상사를 틸리히 자신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틸리히의 윤리학으로는 『사랑, 힘, 정의 : 존재론적 분석과 윤리적 적용 Love, Power, and Justice』(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4)과 『도덕을 넘어서 Morality and Beyond』(New York Harper & Row, 1963)가 있다. 틸리히가 자신의 존재론적 신학과 인격주의적인 기독교 신앙 사이의 거리를 메우기 위해 노력한 『성경적 종교와 궁극적인 실재에의 탐구 Biblical Religion and the Search for Ultimate Reality』(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와 틸리히가 세계 종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기독교와 세계 종교와의 만남 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가 있다. 그 외에도 그의 출세작인『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 1952)와 대표작인 세 권으로 된 『조직신학』등이 있는데, 특히 그의 『조직신학』은 그의 평생의 역작으로서 중세기의 대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gologica)과 견주어 볼 만한 20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숨마(Summa)라는 평가를 신학평론가들로부터 받기까지 했다.2)
설교집으로는 『흔들리는 터전 The Shaking of Foundations』(1948), 『새로운 존재 The New Being』(1955), 『영원한 현재 The Eternal Now』(1963) 등이 있다.
2. 주요사상
(1)신학방법 - 상관관계법
틸리히는 일생 동안 시대의 질문에 맞추어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하는 변증신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런 변증신학을 전개한 구체적인 신학방법이 바로 상관관계법이다. 그의 신관, 그리스도 이해, 인간 및 성령에 대한 이해 등을 포함한 신학 전체가 이 상관방법론 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니 상관관계법이야말로 틸리히 신학의 기본구조라고 할 수 있다. 틸리히는 상관관계법을 ꡒ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실존적 질문들과 신학적 답변들의 상호관련성을 통하여 설명하려는 것ꡓ으로 설명한다. 곧 상관관계법이란 먼저 인간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여 거기에서 제기되는 질문들을 명확하게 한 다음, 기독교 전통에서 그 답변을 찾아내어 그 둘을 논리적으로 서로 연관시키는 신학방법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틸리히의 상황이란 해석된 상황이며 총체적인 상황을 뜻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우리 시대 전체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철학, 미술, 음악, 춤, 문학, 저널리즘, 심층 심리학 등의 전 영역에 걸쳐 관심을 가진 것을 말한다.3)
틸리히에 따르면, 신학은 그 기초가 되는 두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진리와 이 영원한 진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즉 메시지와 상황이 그것이다. 신학은 항상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써 균형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 초자연주의적 방법(메시지 강조한 나머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함 - 근본주의와 신정통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상황을 강조한 나머지 메시지를 희생시킴)은 다 한 쪽을 희생시킴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들이다. 틸리히의 상관관계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며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전개된 것이다.
이방법의 핵심은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가운데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편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양자 모두 수용하는 신학체계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한 마디로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틸리히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상관성의 방법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현대 상황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ꡒ상황 속에 암시된 질문을 메시지 속에 암시된 대답과 관계시키는 것ꡓ이다.4) 따라서 상관관계의 방법의 근본적인 목적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 문화 사이를 중재하고 결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은 1927년 드레스덴 대학에서의 강의를 통해 최초로 제시된 이래 「조직신학」의 지배적인 방법이 될 때까지 발전되고 개선되었다.
틸리히의 상관관계법에 대해서 조지 토마스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비평을 내리고 있다.
ꡒ틸리히의 상관관계법의 난점은 그가 방법에 따라 인간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신율에 뿌리를 두지 않은 자율을 철학에다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틸리히의 견해대로 한다면, 상황의 진리를 분명하고 심오하게 보기 위해서는 신율적인 이성 즉, 구원받은 이성에게만 기대를 걸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성만이 기독교의 메시지가 대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을 정직하게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의해 철저하게 ꡐ회심하지 못한ꡑ철학적 이성이 존재의 구조와 범주들을 올바로 처방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실존 속 깊숙한 곳에 암시되어 있는 질문들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을까?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형식이 문제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어 버린 기독교의 대답들이 비뚤어지고 애매한 것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ꡓ5)
(2)신관
틸리히는 그의 저서인 조직신학 1권 제 2부 ꡐ존재와 하나님ꡑ에서 그의 신관을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거기서 틸리히는 하나님을 ꡐ존재 자체ꡑ라고 부른다. 존재자체라는 말은 유한한 삼라만상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틸리히가 존재를 유한한 수준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을 기술하면서, 틸리히는 끝없이 깊은 심연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을 초월하시되 무한히 초월하시기 때문에 개개 존재가 다 그 깊은 심연에 삼켜져 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편재성을 서술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적 본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유한한 만물은 존재의 무한한 힘을 공히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ꡐ존재의 지반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의 존재라고 한다면 그는 비록 최고의 존재라 할지라도 상대적인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ꡒ하나님의 존재는 존재 자체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다른 것과 병행하거나 다른 것 위에 있는 존재로 이해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라면 그는 유한된 세계의 범주, 특히 공간과 물질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ꡓ6) 따라서 ꡒ하나님의 존재를 확신 있게 단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신론이다. ꡓ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것과 절대자라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진술도 문자적인 진술이 아니라 상징적인 진술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틸리히는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인격적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등으로 부르는 것은 다 상징적인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아라는 개념을 부과하면 하나님은 비자아, 즉 자아가 아닌 다른 어떤 것과 대응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므로 절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간접적으로, 상징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고 한다. 틸리히는 하나님이 비인격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인격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틸리히는 그의 다른 저서 『존재로의 용기』(The Courage of to Be)에서 ꡒ신 이상의 신ꡓ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은 진정한 하나님은 신학적 유신론의 하나님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7) 틸리히에 의하면 신학적 유신론의 ꡐ신ꡑ은 한 존재는 되어도 존재 자체는 되지 못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이율적 구조 속에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신은 나를 한 개의 객체로 만들며 그는 나의 주관을 빼앗아 가며 우리는 그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이율구조 속에 얽매이는 유신론의 하나님을 초월하고자 몸부림쳤다.8)
틸리히가 인격적인 하나님과 신학의 유신론적 하나님을 부정을 통해서 ꡐ초인격적인 하나님ꡑ, ꡐ하나님 이상의 하나님ꡑ의 개념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짧은 문장으로 요약한다. ꡒ파스칼에 반대하여 나는 말하고자 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철학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한 인격체이시며 또한 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의 부정이다.ꡓ9)
틸리히의 신관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①틸리히의 하나님은 성경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추리의 하나님이다.10)
그의 신관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이란 개념을 지나치게 신학적인 단순화와 곡해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상징들을 존재 자체, 비존재, 유한 존재라는 그의 분석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을 오히려 그의 존재론적인 경계선 안에다 가두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②틸리히의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왜 하나님이 인격적이다 라는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하트숀은 하나님에 대한 진술 가운데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많다고 주장했다. 또한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은 지성적이라는 주장이 반론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틸리히가 말하는 신관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이며 비인격적이어서 기도와 예배의 활력적인 경험을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신관은 그리스도인의 경험과도 상반된다.11)
③틸리히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내재적인 하나님 즉 범신론이다.
틸리히의 신관은 초월적인 면보다는 내재적인 면이 강하다. 틸리히는 존재 자체인 하나님이 유한 만물을 무한히 초월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절대적이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들의 지반과 목적으로서 모든 것들에 참여한다. 유한 만물은 존재 자체 즉,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존재의 구조에 참여한다. 따라서 틸리히의 하나님은 범신론적인 하나님이라는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그의 하나님은 결국 만물을 자신 속으로 흡수해 버리는 하나님이다. 그의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포괄하고 있는 하나님이다.12)
종합하면 틸리히의 과오는 그가 신의 절대성을 주장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절대성을 성경을 떠나서 철학으로 인식하려고 했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신을 존재라는 개념 속에 집어넣고 신을 절대화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절대화된 틸리히의 신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허구요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절대자 신은 아닌 것이다. 특히 그의 신관을 전개함에 있어서 범신론으로 기울어져, 극단적인 내재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알타이저 등으로부터 사신신학의 스승으로 불리움을 받기에 이르렀다.13)
(3)그리스도관
틸리히의 그리스도관은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부터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다름 아닌 소외이다. 인간은 그의 존재의 근거와 다른 존재들,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본질에서 실존으로서 전이는 개인적 죄책과 우주적 비극을 낳는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소외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 아닌 인간 밖에서 오는 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데, 이러한 인간 실존의 모순과 분열을 극복하고 치유하는 새로운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고 말한다. 이러한 틸리히의 기독론은 그의 프로테스탄트 원리가 가장 잘 드러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14)
틸리히에 따르면 기독교는 예수의 출생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ꡒ주는 그리스도시오ꡓ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함께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것은 ꡒ나사렛 예수ꡓ라고 불리 우는 존재가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바로 나사렛으로부터 온 사람과 신앙에 의해 그에게 붙여진 그리스도라는 신화적 이름을 구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는 ꡒ그리스도라 불리웠던 예수ꡓ또는 ꡒ그리스도인 예수ꡓ또는 ꡒ그리스도로서 예수ꡓ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새 존재는 실존의 조건 아래에서 본질적인 존재가 왜곡됨이 없이 온전히 나타나는 존재를 뜻한다. 이 존재는 본질적 잠재성과는 달리 현실 속에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새롭고 둘째, 모든 실존적 존재는 소외되어 있으나 그것은 소외를 정복하고 극복했다는 데서 새롭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존적 분리의 위협 앞에 있었으나 거기에 빠지지 않았고, 오히려 평생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된 삶을 살았기에 그와 하나님과의 사이에 아무런 소외가 없었기에 예수야 말로 새로운 존재를 온전히 구현한 인물, 곧 새로운 존재를 온전히 가져오시는 분이라고 틸리히는 본다.15)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부인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므로 새 존재가 되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인성의 부인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실존적 소외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므로 역시 새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인격적 결합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영구적 합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틸리히의 이러한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실존주의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역사적 존재이지만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 의해서 그 사실이 수락될 때 기독교가 성립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나사렛 예수를 역사의 차원에 두고 그리스도를 신앙의 차원에 두는 차원 신학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16)
(4) 문화의 신학
틸리히는 제1차 세계대전 이 후 세계정신문화 속에 흐르는 두 가지 조류를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정통적 기독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혁명적 변화 과정이 세속적이고 반종교적인 것이므로 말하자면 세속문화의 자율성 주장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다고 비판하는 입장이다. 다른 한 편, 오늘날 변천하는 혁명적 사회사상 및 문화 사회단체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 기독교와 그것을 대표하는 교회는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와 타율성에 물들어 있어서 현실과는 상관없는 종교적 용어를 남발하면서 초월주의만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세속문화운동과 전통적 종교 간의 이러한 갈등과 분리 상태는 양자 모두를 위해 불행한 일이요 극복되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틸리히는 이론적으로 그 문제 해결의 근거를 정립하기위해 제 1차 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ꡒ문화신학의 이념에 관해서ꡓ라는 논문을 통해 그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17)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종교라고 넓은 의미에서 정의 할 때 종교는 문화에 의미를 주는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가 내포한 근원적 관심이 그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의 총체가 된다. 다른 말로 요약하면 ꡐ종교는 문화의 실체(내용)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ꡑ 그러므로 한 문화의 형식 또는 양식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문화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가를, 즉 그 문화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틸리히는 문화에 관해서 논할 때 세 가지 용어에 대해서 우선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율과 타율 그리고 신율이다. 이 말들은 영원과 시간, 무한과 유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그의 문화신학의 주요한 개념들이다. ꡐ자율ꡑ(autonomy)이란 자기와 법의 합성어로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궁극적 규범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곧 자율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적 문화와 근대 이성 중심적 문화의 경우처럼 인간 속에 내재한 이성적, 합리적인 법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문화를 말한다. ꡐ타율ꡑ이란 개인과 공동체가 그 자체의 규범성을 포기하고 (주로 강압적 형태로 나타나는) 외적 규범을 생의 규범으로 삼는 것을 뜻하는데, 틸리히는 이것이 주로 자율의 실패로 인해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ꡐ신율ꡑ은 그 자체의 기원과 근거가 신적인 것에 있음을 인식하는 자율로서 틸리히는 이를 이렇게 보았다.
신율은 실존의 궁극적 의미가 모든 유한한 형태의 사고와 행위들을 통해 드러나는 문화이며, 이때 문화는 영원을 투영하며 그 창조물들은 영적인 내용을 담는 그릇이 된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제3권에서 신율적 문화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율적 문화는 정신적 문화이다. 신율의 개념은 인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는 휴머니즘을 특정된 인간적 목적들을 초월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신율은 인간의 자율법칙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한편 신율이란 외계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어떤 법칙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내적 법칙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신적지반 위에 서 있는 그 법칙은 곧 인간 자신의 지반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틸리히는 이 신율의 문화가 중세 중기에 이루어졌으나 중세 말기에 타율문화로 전락했으며, 곧 근대의 자율문화에 의해 극복되고 대치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근대의 자율문화는 큰 위기를 맞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신율문화의 때(카이로스)가 이르렀다고 보아 종교사회주의운동으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종교와 문화의 새로운 신율적 통일은 이제는 전혀 새로운 새 문화, 새 종교의 각성 속에서만 기대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런 새로운 각성운동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을 받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생명력과 의미 전달의 힘을 잃은 전통적인 상징언어와 타율적 종교형식을 새롭게 갱신하고 현대인의 자율문화를 그 깊이에서 포용하고 성취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신율문화의 때인 카이로스를 기다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18)
즉 문화신학의 임무는 종교와 문화의 갈등의 구조를 문화의 종합 혹은 통일을 통해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3. 결론
틸리히의 신학을 흔히 사람들은 철학적 신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적이라는 말을 존재론적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위대한 사상적 깊이와 넓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틸리히를 주시한다. 왜냐하면 틸리히 사상 속에 깃들인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요소가 순수한 기독교적 성서에 입각한 신앙을 흐려 놓았기 때문이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리히가 현대신학계와 현대문화 일반에 걸쳐서 끼쳐준 영향이 크다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하는 점이다.
로버트 존슨은 틸리히에 대해서 말하기를 ꡒ역사가 틸리히를 어떻게 평가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 한 위대한 마음이 있어서 전 인류와 문명에 혜택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ꡓ라고 하였다.20) 틸리히는 변증법적 신학의 기초에는 바르트의 동지로서, 그 후에는 바르트에 대한 비판가로서 독일 신학계에 명성을 떨쳤으며, 라인홀드 니버의 동료요 친구로서 미국 신학의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할 수 있는 제 3의 길을 모색했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성경의 메시지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잇는데 반해, 틸리히는 인간, 역사 및 문화에서의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상황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정통신학에 대해 늘 도전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인격화되고 철학화된 신의 개념을 통하여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 중에서도 그 최첨단을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소위 ꡐ사신신학ꡑ의 일대거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신학의 위험성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게 해 준다.
틸리히의 의의는 그가 현대인의 병을 ꡐ허무ꡑ 혹은ꡐ무의미ꡑ라고 진단하고 정신력의 샘이 말라버리고 기계문명만이 급속도로 발달해 가는 이 현대에 살면서 생의 허무를 느끼고 절망하는 인간들의 가슴 속에 의미와 목적을 안겨 주기 위해서 그의 조직신학을 썼다는 데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21)
결론적으로, 현대인의 철학적 고민 속에서 신학적 해답을 주고자 한 그의 변증적 동기는 매우 중요하고 값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실존주의 옷을 입힌 철학적 범신론의 하나님을 제시하고야 말았다. 결국, 틸리히의 잘못은 성경적 진리를 조직적으로 체계화시키기 보다는 역으로 자기의 조직적 사상 체계 속에 성경적 진리를 부합시키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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