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스펄전 목회/목사론(9)

강대식 2018. 3. 7. 17:13

목회자와 침체

 

다윗도 가열되는 전투 와중에 피곤했다고 기록된 말씀처럼(삼하21:15), 주님의 모든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는 일시적인 침체가 찾아옵니다. 보통 때는 씩씩하다가도 가끔 낙망하기 마련입니다. 강한 자도 늘 강건한 것이 아니고 지혜로운 자도 늘 총명한 것이 아닙니다. 용감한 사람도 늘 용맹한 것이 아니며, 즐거워하는 사람도 늘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영혼의 깊은 침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웠고, 시시때때로 침체를 겪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몇몇 분께는 큰 위로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무서운 침체의 때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탁월한 목회자들의 온갖 전기를 다 인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루터의 생애만 살펴봐도 수천 가지 예를 드는 것만큼 충분할 것입니다. 루터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영혼은 환희의 천국에 이른 적도 많았지만, 절망의 끝자락에 선 경우도 그만큼 많았습니다. 그는 임종할 때도 비바람을 면치 못했습니다. 마지막 잠드는 순간까지도 지친 어린 아이처럼 흐느꼈습니다.

 

다른 예를 더 드는 대신, 하나님이 왜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왜 빛의 자녀들이 때때로 짙은 어둠 속을 걷습니까? 왜 새벽을 알리는 사자들이 때때로 칠흑 같은 밤 속에 처합니까?

 

1) 왜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지는가

 

우선 그들도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고 슬픔을 상속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부분의 어려움에서 은혜로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누리지 못함으로써 막을 수 있는 재난까지 겪게 됩니다.

 

우리가 때로 침체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도록 작정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고난의 몫이 더 클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고난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병약한 양떼에게 적합한 목자들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을 지닌 사람을 당신의 은혜의 그릇으로 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눈물과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대부분은 육체적으로 어딘가는 병들어 있습니다. 우리 대다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연약함으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특정한 신체 질환은 낙심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정신적 질병에 대해서도 완전히 정상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조금씩은 다 균형을 잃은 상태가 아닙니까? 어떤 분들은 천성적으로 약간 우울한 기질이 있어 보입니다. 우울한 기질이 몸에 배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름 자신을 다스리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면은 잘 잊고 부정적인 면만 잘 기억하는 분들 말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이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특별한 섬김의 길을 가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주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식물은 늪에서 자라는 덕분에, 또 어떤 식물은 응달에서 번식하는 덕분에 약용 성분이 생깁니다. 햇빛뿐 아니라 달빛도 받아야 귀한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배에는 돛뿐만 아니라 바닥에 싣는 모래주머니도 필요합니다. 마차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 바퀴가 마찰력을 받는 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통으로 인해 영혼을 구해 내는 지혜가 크게 발달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면 그런 지혜도 굴 속의 사자처럼 잠들어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날개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구름 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입니다.

 

부루퉁한 요나도 니느웨 성 사람들이 충분히 느꼈듯이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입니다. 저는 자도 멸시하지 마십시오. 말씀에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33:23)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눈매가 부드러운 레아가 아름다운 라헬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한나의 슬픔은 브닌나의 자랑보다 거룩했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으신 주님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깃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주님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복음의 보물을 담고 있습니다. 질그릇에 여기저기 흠집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역을 진지하게 감당하다 보면 영적 침체라는 공격에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맡겨진 영혼들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다 보면 때때로 먼지 구덩이에 주저앉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회심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 완전히 충족되지 못하면(언제나 충족되겠습니까만) 목자의 영혼은 근심과 낙심에 빠집니다. 회심을 기대했던 이들이 돌아서고, 경건한 이들이 미지근해지고, 신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남용하고, 죄인들이 더 담대하게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 좌절하여 땅에 주저앉고도 남을 만하지 않습니까? 주님 나라는 우리 뜻대로 임하지 않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은 우리 바람대로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우리는 울어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은 나타나지 않는데 어떻게 애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정신적인 수고는 우리를 지치고 우울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는 정신적인 수고 이상입니다. 그것은 심령의 수고요, 우리의 가장 깊은 영혼의 노고입니다. 주일 저녁만 되면 생명이 우리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처럼 기진맥진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영혼을 성도들에게 전부 쏟고 나면 우리는 마치 어린 아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빈 질그릇이 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바울을 더욱 닮아 숭고하게 영혼들을 돌본다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2:17)는 말씀의 뜻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우리는 썩지 않게 잘 보관된 미라가 아니라 산 희생제물로서 바쳐질 운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잘 보존하고 자기 육신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소진하고 하나님 손에 다 쓰여져서 없어져야 합니다. 신실한 목회자로 영적인 수고를 아끼지 않다 보면 때때로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는데 그 때는 영혼과 육신이 전부 쇠약해집니다. 간구하는 모세의 팔도 피곤해졌고(17:12), 바울도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6)라고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조차도 일시적인 침체를 겪은 것으로 보이며, 사도들도 한때는 놀라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교회에서의 우리의 위치도 이러한 침체에 한 몫 거듭니다. 사역할 준비를 충분히 갖춘 목회자는 대개 다른 사람들 위에 홀로 선 고독한 영혼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아끼는 성도라도 목회자만이 가진 생각과 근심과 유혹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반 사병들 사이에서는 전우끼리 서로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걷지만, 장교는 계급이 올라갈수록 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주님이 지도자로 세우신 사람은 가장 탁월한 사람만큼이나 고독한 사람이 되기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 위에 우뚝 서서 신령한 것들을 더 가까이 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약할 때는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을 보십시오. 가장 친한 벗들이 잠들어 잇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무거운 짐에 짓눌리며 또다시 은밀한 고통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향한 영혼만이 겪는 그 고독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안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은 주님이 사람의 심중에 있는 약함을 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어울릴 만한 벗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나 실라, 혹은 누가는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과도 같은 사도와 견주기에는 너무 낮은 봉우리였습니다. 많은 목회자가 느낄 이러한 고독은 침체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목회자들끼리 모여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경건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이러한 덫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언제 목회자가 영적 침체에 빠지기 쉬운가

 

첫 번째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입니다. 오래 품어 왔던 소망이 드디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크게 영광 받으시고,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약해지기 쉽습니다. 특별한 은총이 임하면 우리 영혼이 하늘높이 솟구쳐 황홀경을 맛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같이 생각되지만 대개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좀처럼 당신의 용사들이 승리에 도취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런 시험에 견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시므로 그들의 잔에 괴로움을 섞으십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 뒤,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메마른 땅 위에 비가 쏟아진 뒤의 엘리야를 보십시오! 자기 만족의 풍악 소리도, 승리의 옷을 입은 정복자의 개선 행렬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세벨에게서 달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전의 격렬한 환희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완전히 침체되어 죽기를 간구합니다.

 

기쁨이나 흥분이 지나치면 뒤이어 침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고난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힘이 공급되는 것이 그 상황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끝나면 천성적인 연약함이 고개를 듭니다. 야곱은 은밀히 하나님께 붙들려 온 밤을 씨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씨름이 끝나고 아침이 되자 너무 교만해지지 않도록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지만 자기를 치는 사탄의 사자인 육체의 가시가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고후12). 인간은 순전한 행복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부흥에 들떠 있고, 인기에 우쭐하고, 영혼들을 많이 구원했다고 기고만장해 있을 때, 은혜로운 자비의 징계가 강한 동풍으로 허영의 배를 깨뜨려 만세반석 위에 우리를 알몸으로 비참하게 난파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것입니다.

 

큰 일을 이루기 전에 그와 같은 침체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어려움을 바라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우리 앞에 버티고 있고 우리는 그들 앞에서 우리가 보기에도 메뚜기 떼 같습니다. 게다가 가나안의 성들은 성벽이 하늘에 닿았는데 우리가 무엇이기에 그 성들을 함락시키길 바라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무기를 내던지고 줄행랑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입니다. 우리는 그 성의 떠들썩한 군중과 대면하느니 차라리 다시스로 도망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생각하기도 싫은 곳에서 멀리멀리 우리를 조용히 실어다 줄 배까지 물색합니다. 무서운 풍랑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비겁한 발걸음을 막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 런던에서 사역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저는 너무 큰 성공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목회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 때문에 의기양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탄식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 많은 양 떼를 계속 이끌어 가겠습니까? 어디 외딴 마을에 들어가든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산간오지에 홀로 살 곳을 마련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 데서라면 제게 필요한 일들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때 제 평생의 사역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두려웠습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좀 겁이 났고 제 자신이 그 사역에 합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주님이 은혜로운 섭리로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사역이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제 자신이 어린 아이같이 느껴져서 일어나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로 만들며 산들로 겨 같게 하라’(41:15)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니 겁이 났습니다.

 

주님이 제 목회에 더 큰 복을 예비하실 때마다 이런 침체가 찾아 왔습니다. 은혜의 단비가 쏟아지기 직전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는 법입니다. 침체는 이제 제게 마치 주님의 풍성한 축복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거친 옷을 입은 선지자 세례 요한처럼 느껴집니다. 저보다 훨씬 탁월한 분들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릇은 문질러 닦아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해집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고난의 세례가 먼저 있습니다. 며칠 굶으면 잔칫상에서 더 배터지게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종 모세가 양을 치며 홀로 경건히 기다리는 중에 광야 한가운데 나타나십니다(3). 광야는 가나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낮은 골짜기는 높은 산으로 이어집니다. 패배는 승리를 예비합니다. 까마귀가 비둘기보다 먼저 내보내집니다. 가장 어두운 밤은 새벽이 오기 직전에 찾아옵니다. 선원들은 파도에 휩쓸려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쳤다가 다음 파도에는 하늘 높이 솟구칩니다. 그렇게 애간장이 다 녹고 나서야 비로소 바라는 항구에 닿게 됩니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일하다 보면 그와 같은 괴로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활을 계속 잡아당기면 끊어질 위험이 생깁니다. 몸에 수면이 필요한 것처럼 정신에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수고하는 날이니 다른 날을 잡아 쉬지 않으면 탈진하고 말 것입니다. 땅도 때때로 묵혀 두어 안식년을 지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6:31)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지혜와 긍휼에서 우러난 말씀이었습니다.

 

휴식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신선한 힘을 회복하는 효율적인 시간입니다. 어부는 그물을 손질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따금씩 정신적으로 마모된 부분을 수리하고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 자신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노예선의 노예들처럼 휴일도 없이 매일 노를 젓는 따위의 일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레방아는 끝없이 돌고 돕니다만 우리는 잠시 멈추고 간간이 쉬어야 합니다. 짐을 나르는 짐승조차도 가끔씩 풀어 놓아야 합니다. 바다도 밀물과 썰물 때는 잠시 숨을 고릅니다. 하나님의 사신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쇠약해지니 가끔 휴가를 보내는 것도 지혜입니다.

 

때로는 단 한 방의 결정타가 목회자를 침체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가장 믿었던 형제가 배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 목회자의 마음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아끼고 사랑하는 지체가 시험에 넘어져서 그리스도라는 그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힐 때도 마찬가지로 타격이 큽니다.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없습니다. 10년 동안 수고하는 것보다 반역자 아히도벨이나 베도자 데마 같은 이에게 몇 시간 수모를 겪는 것이 우리의 수명을 더 단축시킵니다. 반목, 분열, 비방, 어리석은 비난 따위도 경건한 이들을 뼈를 찌르는 칼같이’(42:10) 무수히 쓰러뜨려 왔습니다. 거친 말은 마음이 여린 이들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냅니다. 탁월한 목회자는 뛰어난 영성 때문에 이런 일에 매우 민감합니다. ‘발길질 한 번에 말은 꿈쩍도 않겠지만 멀쩡한 목사님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음 편하게 종요한 삶을 살고 싶은 분은 목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이 목회를 하면 금방 진저리를 치며 도망갈 것입니다.

 

고난이 겹칠 때, 욥의 사자들처럼 낙심되는 일이 계속 이어질 때, 영혼이 나쁜 소식에 동요를 일으키는 동안에 낙심은 마음의 평안을 온통 빼앗아 갑니다. 낙숫물도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닳게 합니다. 담대한 마음도 고난이 계속되면 불안을 느낍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아프다든가 아이를 잃는다고 하면 그 무게가 가중되는 법입니다. 고난이 우박 쏟아지듯 갑자기 너무 많이 찾아오면 잠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영문도 모르는 침체가 우리에게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유 없는 침체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다윗의 아름다운 수금 소리로도 쫓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 영혼을 음침한 감옥에 가둬 놓는 그 불가사의한 쇠 빗장을 열어젖히려면 하나님의 손이 필요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손잡아 주실 때까지 바다에 가라앉았습니다.

 

예수님의 종들이 왜 그렇게 자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건너가야 하는지를 물으신다면 해답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침체는 바로 우리를 겸비케 하면서도 유익이 되는 메시지를 우리 귀에 속삭입니다. 침체는 우리가 덧없고 연약하며 넘어지기 쉬운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모든 일에 낙심할 때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된 만큼 하늘에서의 축복은 그만큼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의 학교에서 훈련받은 만큼 이 땅은 더욱 기름지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고통으로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 지혜가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고통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목회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침체의 강도가 평소보다 세다고 자신을 이제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갈대와 같은 인간의 도움에 기대지 마십시오. 벗들이 여러분을 실망시킬 때 놀라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한결같음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여러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른 스승에게 가 버려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과 같이 있었을 때도 그들이 여러분이 가진 전부는 아니었듯이 그들이 떠나도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부터 천국까지 가는 동안 더 거친 비바람이 몰아칠지도 모릅니다. 좋든 싫든 강단은 우리의 망대요 목회는 우리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길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맙시다


                                                                                                                                                            -스펄전의 목사론-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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