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7장 교회 (강의안)

강대식 2018. 6. 8. 16:12

7   교회

 

교회라는 제도는 중요한 제도이다. 잃어버렸던 영혼이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기독교 교회에 연합된다. 선교사들이 오직 개인 영혼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고, 일단 구원을 받으면 그 영혼들이 알아서 살아가도록 버려둔다는 생각은 참이 아니다. 도리어 참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교회의 형제애로 연합해야 한다.

 

이 기독교적 형제애 개념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의 형제애개념과 매우 다르다. 현대의 자유주의 교리에서는 사람들의 종족이나 신조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이 형제다. 그리스도인은 현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인류의 형재애가 뜻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또한 인간 대 인간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친밀한 관계를 알고 있으며, 더욱 친밀한 이 관계 때문에 형제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 기독교 가르침에 따르면, 참된 형제애는 구원받은 자들의 형제애다.

 

이것은 편협한 가르침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형제애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믿음의 가족들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결핍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 이웃이다. 우리가 정말로 동료 인간을 사랑한다면, 상처를 싸매주거나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주는 정도의 봉사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할 일은 그들을 영호의 구주에게 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죄인들 사이의 형제애, 구원받은 자들 사이의 형제애를 사회의 소망의 근거로 삼는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상황의 개선이나 황금률의 영향력 아래 형성되는 인간 제도에서는 굳건한 소망을 찾지 못한다. 그것들이 죄의 증상을 완화시켜 줌으로써 참된 치료를 시행할 시간을 제공하기 때문에 환영할 만하다. 그것들은 이 세상에 복음 메시지를 전파하기에 유리한 상활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심지어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모든 재료가 부실하다면 굳건한 건물을 세울 수 없듯이, 여전히 죄의 저주 아래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복된 사회가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 사회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기독교적 원칙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사회의 진정한 변화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영향력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기독교 전도자가 인류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모든 사회의 구원이 성취되기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회가 이미 존재하는데, 그 사회가 바로 교회다. 교회는 사람의 사회적 필요에 대한 최고의 기독교적 대답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 곧 모든 구속받은 자의 참된 무리는 오늘날 보이는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리 속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보이는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연약하게 되는 많은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이유는 분명하다. 오늘날 교회가 많은 비기독교인 무리를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교육 기관에까지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께 신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일이나, 참된 것처럼 보이는 많은 신앙고백이 실제로는 거짓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지적하는 것은 한 번도 합당한 신앙고백을 한 적이 없고 복음에 대한 전체적인 태도가 기독교적인 태도에 완전히 역행하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다. 그들이 단순히 회원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침내 교회 회의를 지배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결정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부터 오고 있다. 철두철미하게 반기독교적인 유형의 믿음과 실천이 교회 내에 존재하면서 교회를 위협하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가 동일한 기관의 테두리 내에서 계속 증식하는 것은 매우 바림직하지 못하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이 두 파의 분리는 현실적으로 절박한 요구다.

 

많은 사람들이 분리를 피할 방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왜 형제들이 연합하여 동거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사소한 일들은 뒤로 미루고 율법의 더 중한 바에 주로 집중한다면 교회 내에 남을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사소한것들이라고 지칭된 그 속에, 죄를 진정으로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다.

 

자유주의 설교자가 교회 내의 보수주의 진영에게 이렇게 말한다. 교리적인 차이는 사소한 것이므로 한 회중으로 연합하자.‘ 그러나 교리적 차이를 사소한 일이 아니라 최고로 중요한 문제로 간주하는 것이 교회 내 보수주의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소한 일로 간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편협한 일이다. 우리 주님의 대속적 희생을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반드시 편협한것은 아니다. 교리적 차이를 덮고 기독교적 봉사 프로그램 위에 교회를 연합하려는 노력은 불만족스럽다. 그것이 부정직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안수 선서는 교회 구성의 일부다. “당신은 신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과 생활을 위한 유일하게 무오한 규칙임을 믿습니까?” “당신은 이 교회의 신앙고백이 성경에서 가르쳐진 교리 체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채택합니까?” 만약 이 강령을 견지한다면 그에게는 장로교회 직원이 될 수 있으나, 그가 그 강령을 견지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장로교회 내에서 직원이 될 수 있는 아무 권리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유니테리언 교회처럼 정직하게 그 길을 가면 된다. 그들은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유주의 설교자가 원하는 바로 그런 종류의 교회다. 권위 있는 성경도 없고, 교리적 요구도 없고, 신조도 없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