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영적 생명의 징표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태어난 자는 누구나 비슷하고 유사하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기초적인 원리이기에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혼란에 빠질 뿐 아니라 결국 재앙을 초래하게 되기에 지금 이 주제를 고찰하는 중이다.
열 번째, 이 생명이 생기면 영적인 이해력과 지각이 생기고, 더 많이 알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항상 생기게 되어 있다. 생명의 성장 원리가 그렇다. 열망의 정도는 다양하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열망하는 요소는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2-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순전한 말씀을 열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인지해야 할 기준이자 자신을 평가해야 할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빌3:8-15)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이런 열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다. 자기 무지를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이 생명을 검증하는 아주 좋은 시금석이다. 예수의 복음은 진리이며, 진리는 정신과 지각에 빛과 교훈과 지식을 준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무지의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 그뿐 아니라 무지의 위험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대적 원수, 고소자인 마귀도 인식하게 된다. 마귀는 기독교 전체를 조롱하려 들지 않고, 그 대신 이단을 만들어 내거나 오류에 빠뜨리거나 특정 문제에 대한 의심과 의문을 일으키려 든다. 현재 마귀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창세기 첫 몇 장을 의심케 하고, 진화론 같은 문제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있다. 참으로 신령한 자는 길을 잃고 오류나 이단이나 잘못된 개념에 빠지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한다. 이미 다 가졌고 이미 다 도달했다고 여기는 자는 사실상 가지지 못한 것이며, 갓난아기로 시작해서 갓난아기로 인생을 마친다. 그런 영적 아이들은 배우길 싫어한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죄 사함 받았다는 사실만 전부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거대한 보고 안으로 안내받는다. 그 보고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는”(엡3:8) 것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엡3:18-19) 하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 충만함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깨어 온 정신을 기울인다. 말씀을 붙잡기 위해 씨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현대는 요약의 시대이다. 모든 것을 짧고 간단하고 명쾌하게 요약하려 한다 그런 식으로 출발해서 그런 식으로 인생 전체를 살아간다. 깊은 데로 들어가야 한다. 푯대를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여러분의 삶에는 성장과 확장의 증거가 있는가? “더 얻기 위해 노력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보고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이다. 보화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라.
열한 번째, 참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이 지식과 진리를 더 많이 알아 남을 돕기를 열망한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생명의 말씀을 밝”힐 때(빌2:15-16) 예수의 빛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세상을 비춘다. 자기 자신이 진리를 모르면서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중생한 자는 중생치 못한 자를 염려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본능이다. 독실한 종교인은 중생치 못한 자를 염려하지 않는다. 자기만족에 빠져 독실하게 살 뿐이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을 살며 남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경멸의 눈으로 바라본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 인생을 보며 끔찍하게 여길 뿐 도와주지 못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아주 좋은 시금석이다.
육체적인 거짓 열심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육체적인 거짓 열심의 특징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가볍고, 말을 잘하고, 자극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실제로 관심을 갖는 것은 조직의 성공이고 항상 숫자에 있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것은 마치 생물과 기계가 다르고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와 공장에서 제조되는 모조품이 다른 것과 같다. 이런 전도의 열심은 가짜이다.
참된 열심의 특징은 자발성에 있다. 또한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한다. 그들 때문에 영혼의 비통함을 느낀다. 예수님도 잃어버린 우리 영혼에 대한 비통함 때문에 세상에 오셨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자는 그 긍휼이 무엇인지 안다. 가벼운 마음으로 새 회심자를 구하러 나서지 못한다. 그가 하려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에게는 깊은 진지함이 있다. 말만 잘하면 되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일이요, 영원한 운명이 달린 일이며 성령이 관여하시는 일임을 안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참는다. 그 사람의 영혼을 염려하기에 포기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다른 영혼을 향한 이런 염려, 깊고 진정한 염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런 염려 때문에 비통해 하고 있는가? 기도하고 있는가? 이런 일을 다루려면 오직 성령의 큰 부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영적인 시각을 가진 자는 이 문제의 깊이와 심각성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높이와 무한함 또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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