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예수,
이스라엘, 그리고 그의 제자들
하나님 나라를 연구할 때에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하였고,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예수와 이스라엘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안에서나 바깥에서 어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분명한 목적을 갖고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 백성들에게 한 유대인으로서 다가오셨다. 그는 율법의 권위를 받아들이셨고, 성전에서 행하는 관례에 복종하셨으며, 회당의 예배에 참여하셨고, 그의 생애를 통틀어 유대인으로서 사셨다. 자신의 사명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고(마15:24), 제자들의 전도의 사명도 이스라엘에게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다(마10:5-6). 예수께서는 구약의 언약과 선지자들의 약속이라는 배경 위에 서서 이스라엘을 언약과 약속이 주어진 백성으로 “그 나라의 본 자손들”(마8:12)로 인정하셨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므로, 성취의 시대는 넓게 온 세상에게가 아니라 언약의 자손들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민족적 연대감에 근거하지 않고 인격적인 관계를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에게 호소하셨다. 이 점에서 그는 세례 요한의 예를 따르셨다.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인격적인 개개인의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마3:9-10). 예수의 사역은 백성 전체를 향하여 시행되었지만, 그의 호소는 외형적인 민족의 관계를 관통하는 것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으며, 가족의 구성원들을 서로 갈라 놓으러 왔다고 하신 그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마10:34-36). 그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은 예수님 자신과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과 전혀 달랐다. 랍비들의 제자들은 가르침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에서, 묵시론자들은 종말론적 소망에서, 유대인 전체는 동일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언약의 자손이라는 인식에서 연대감을 찾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 이외에는 다른 공통적인 끈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 자신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신적으로 정해진 운명을 찾으라고 도전하셨던 것이다.
두 번째 사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는 물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까지 다 거부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실망하셨고 이스라엘의 거부에 대하여 슬퍼하셨으며(마23:37) 이스라엘의 패망을 예언하셨지만(눅19:4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초기에 자신이 거부를 당할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셨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거부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나타나는 주제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4:16),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갈등과 거부의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그의 격렬한 종말을 암시한다:“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2:20). 갈등의 핵심적인 원인은 예수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와 또한 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요구한 회개를 그들이 배격했다는 점에 있다. 예수에 대한 반대는 처음부터 심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속 강렬해져서 급기야 예수의 죽음까지 몰고오게 된 것이다.
메시야적 성취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의 심각성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과 거부를 말씀하는 무수한 말씀들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이 아니요 그의 심판의 대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그 거리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성읍들은 무서운 심판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마11:20-24). 성전이 파괴되며 땅에 완전히 파묻힐 것이다(막13:1-2). 이 말씀들은 역사적 사건을 예견하는 것들이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주간은 계속해서 그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서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막12:9,마21:43). 유대 민족이 하나님 나라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으므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고 새로운 백성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사실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전체가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상당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유대 랍비의 제자가 되는 것과 다르다. 랍비들은 그 제자들을 자기에게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토라에 묶어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자기 자신에게 묶어두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을 제공하셨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세에 철저하게 굴복할 것을 요구하셨다. 제자들이 될 뿐 아니라 둘로이, 즉 종들이 되었다(마10:24,눅12:35),
그것은 예수님 자신과 그의 메시지에 완전하게 인격적으로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님 자신과 그의 메시지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메시야적 구원을 선포하셨다면, 예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진정한 운명의 성취를 제공하셨다면, 이 운명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메시야적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이 참된 이스라엘이 되며 그 민족 전체의 대표들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시킨 예는 한 번도 없지만, 그 단어는 없을지라도 그 사상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야적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참된 이스라엘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
예수의 제자들을 참된 이스라엘로 보는 개념은 신실한 남은 자라는 구약적인 개념을 배경으로 하여 이해할 수 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반역하고 불순종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민족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남은 신자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기서 믿음을 가진 남은 자들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적은 양 떼들”(눅12:32, 개역성경은 ‘적은 무리들’로 번역)로 묘사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초장의 양 떼들로 보는 구약적인 개념을 예수의 제자들에게 구체화시키는 표현이 아닌가(사40:11)? 이것이 바로 신실한 남은 자들을 지칭히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불순종하며 악한 양 떼요, “잃어버린 양”이다. 예수께서 목자로서(마14:27,요10:11)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눅19:10),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여 그들을 메시야적 구원의 우리 속으로 들여서 겔 34:15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자는 그의 우리 안에 속하여 그의 적은 양 떼들, 곧 참된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장차 그들에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은 그들이 이미 참된 양 떼들이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의 사역에 동참시키신 것은 그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연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행동이다.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역할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19:28,눅23:30). 열두 제자들은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만이 아니라 현재의 메시야적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까지도 대표하는 것이다. 열두 제자를 택하는 행위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새로운 회중을 일으키사 그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민족을 대체시키실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제자도의 의미
예수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 “나라의 본 자손”인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참된 자손들이 되었다(마13:38). 심령이 가난한 모든 자들, 즉 자신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들은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다(마5:3). 예수의 “형제들”을 돌아본 모든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마25:34-40). 이 땅에서 예수를 시인한 모든 자들은 예수께서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마10:32). 이렇게 가장 넓은 의미에서 예수를 좇은 자들이 종말론적 공동체를 구성하며, 이들이 종말론적 완성의 날에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제자들은 새로운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된 이스라엘이었고, 새로운 교회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렘7:23,31:33,겔11:20). 그들은 믿음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였으며(사26:2), 예수께서 메시야적 성취의 축복 속으로 부르신 참된 카할 야훼(여호와의 회중)였다. 이는 예수를 개인적으로 따르던 자들뿐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제자 그룹에 들어가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막10:15,12:34,마7:2).
예수의 제자들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상호 관계들을 정리한다.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메시야적 성취를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약속된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였더라면 그들의 참된 운명과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이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에게서만 성취되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이스라엘도 별도의 회당 모임체도, 폐쇄적인 교제 모임도, 조직화된 교회도 아니었고, 다만 불신앙적인 민족 내부의 믿음을 가진 남은 자요, 교회 속의 작은 교회였다. 그들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종말론적 공동체였다. 곧, 그들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였고, 그리하여 종말론적 완성의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끈은 그들이 예수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요 또한 예수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 내부의 작은 그룹들이 예수의 사역을 공유하며, 그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며 귀신을 쫓고 질병을 치유함으로써 그 나라의 권능을 실행하는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마태복음 16:18-19
이 말씀은 예수의 사역 전체와 그 사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 이면에 깔린 기본적인 하나의 개념을 명확한 형태로 표현해준다. 이 말씀은 하나의 조직체나 제도를 창조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지닌 에클레시아, 곧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로서의 모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구약적인 개념을 근거로 이해하여야 마땅하다. 백성을 “세운다”는 관념은 구약적인 관념이다. 더욱이 에클레시아는 여호와의 회중 혹은 총회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성경적인 용어로서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이다.
이 에클레시아는 특별한 면에서 예수의 에클레시아이다: “내 에클레시야.” 이것은 곧, 참된 이스라엘이 이제 예수와의 관계 속에 그 특정한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야적 구원을 거부했으나,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으로 보신 것이다.
이 새로운 백성이 그 기초로 삼는 반석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너는 게바라 이 게바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개신교 해석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로의 베드로를 반석으로 보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해석을 강하게 반대한다. 이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이나(루터)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믿음(칼빈)으로 해석한다. 쿨만은 오직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열두 제자의 대표자로서의 베드로를 지칭한다고 한다. 반석은 신앙의 고백자인 베드로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아주 의미있는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공식적인 지도자역을 감당하여 그의 후계자들에게 자신의 직분을 계승시킬 것이라는 내용은 본문의 문맥에서는 그 힌트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기초가 되는 반석은 그 다음 절에서 아주 쉽게 거치는 반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이 말씀이 예수의 가르침 전체와 아주 어울리며 그가 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무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자손들, 참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모임체가 어떤 형식이나 조직을 취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자체의 조직과 의식을 지닌 하나의 모임체로서의 교회는 후에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생겨난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교제의 모임체로서, 그것이야말로 메시야적 구원을 받아들임으로서 반역한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참된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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