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 주일설교
본문: 롬 12:19-21
제목: 선으로 악을 이기라
1.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원수는 내게 악을 행하고 해를 끼쳤기 때문에 된 것이다.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해서 원수가 된 것이다.
오직 그가 내게 행한 성품과 악행 때문에 원수가 된 것이다.
내가 그를 원수로 여기고 친히 원수를 갚은 것은 그래서 정당하다.
그가 분명 나를 괴롭혔고, 원수 짓을 했다.
나의 분노와 억울함은 오랜 세월 형성 되었고 원수를 원수로 갚은 것은 정당하다.
정당한 이유가 있고 참음 수 없는 원수 짓에 대한 갚음인데 성경은 친히 갚지 말라 하신다.
원수는 사랑에 대한 배신이요 정당에 대한 부당의 결과인데도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실까?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레19:18참고)
친히 원수를 갚은 결과가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경험에 의하면, 세상 경험을 봐도,
결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고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낳는 것을 본다.
원수는 원수를 낳고 원수 갚음은 원수의 되갚음을 낳는다.
내 의는 원수의 의를 유발하고 내 소견에 옳음은 상대의 소견에 옳음을 유발한다.
사람의 의끼리 부딪치는 곳에는 갈등과 전쟁과 깨짐과 파괴로 얼룩진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수는 하나님이 모르신 채 그분의 손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한나의 원수는 브닌나였는데, 한나의 임신을 막은 분은 브닌나도, 남편도 아닌,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브닌나 원수를 주셔서 한나의 격분과 자기 의와 원수 갚음의 정서를 노출하게 하셨고,
오직 그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때 해결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원수를 붙여 만들고 축복하신다.
만드신 후 축복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정학적으로는 광야의 고난이 사람을 만들고, 인간적으로는 원수가 사람을 만드는데 쓰인다.
브닌나의 원수 짓이 한나의 괴로움이었지만, 맞대항도, 남편 원망도,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결국 하나님께로 향하였고, 하나님이 아들 제사장이 필요함을 감지하게 되었고,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노라 서원하였다.
사무엘이 젖을 떼자 마자 한나가 약속을 지켰더니,
하나님은 5배로 갚아주셨다.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다.
사무엘은 마지막 최고의 사사가 되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낳게 하시려고 브닌나를 붙여서 고난의 훈련을 통해 사람을 만들고
사무엘의 어미가 되는 축복을 주셨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에게서 그 올곧고 참되고 헌신적인 믿음을 배웠을 것이다.
아합 왕은 이웃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다가 말을 안 들으니 원수로 여겼는데
이세벨이 그 원수를 갚아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아합의 죽음을 가져왔다.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은 혹 뗄려다가 혹 붙이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원수 혹을 뗄려다가 다른 감당키 힘든 혹이 붙어와서 사람을 괴롭게 한다.
원수를 친히 갚고자 정서가 끓어 오를 때 우리는 다윗의 경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윗의 고난의 시절, 아둘람 시절에 갈멜 사람 나발의 원수 짓이 있었다.
들에서 그의 양떼들을 돌봐 주었고, 잔칫날 먹을 것을 구하였다가 완전 무시를 당하였다.
사울의 원수 짓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이니’ 하면서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던 다윗이 나발의 원수 짓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었다.
사울의 거대 권력의 원수짓에 대해서는 원수를 갚지 않아 말씀의 사람 같은데,
그보다 약한 나발의 원수짓에 대해서는 친히 갚고자 하였다.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25:21-22)
그가 나의 선을 악으로 갚았으니 친히 원수 갚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이 정당한 보복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거라고까지 한다.
나발이 원수이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무슨 죄가 있길래 다 죽인다는 것인가?
원수가 미우면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이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이다.
사울 원수를 붙이신 분도, 나발 원수를 붙이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알기까지는
원수 갚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치고 만들기 위해 많은 원수들을 붙이셨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옳은 것을 모르고 자기의 옳은 것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옳음, 곧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하였고, 우리도 멸망의 길로 가고 만다.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 갚음을 말리기 위해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을 보내주신다.
우리에게도 아비가일을 보내주시지만 우리는 아비가일의 만류를 듣지 아니한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25:32-33)
결국 나발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주셨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25:38)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열흘을 못 참아 친히 원수를 갚는 셈이다.
저도 이 열흘을 못 참아 자기 의를 내세우고 원수를 친히 갚다가
겪지 않아도 될 고난과 외로움과 절치부심(이를 갈고 속을 썩임)을 많이 겪은 사람이다.
원수를 갚을려고 하고 원수로 인해 절치부심하면 사실 괴로운 사람은 원수가 아니고 나이다.
원수를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괴로운 법이다.
원수는 두 발 뻗고 자고 있을 때, 원수를 갚을려는 사람은 잠을 못이루고 오그리고 잔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다시 내린 베드로처럼 우리도 그물을 다시 내려야 한다.
원수에 대한 절치부심에서 나를 해방시켜 줘야 내가 천국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옮음이 하나님에 의해 증명되며 옹호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손으로부터 그의 일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그후 시므이의 원수짓도 감내한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2)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명령하신 저주로 받아들이고,
나의 원통함을 하나님이 감찰하여 주실 것이고,
그 저주 때문에 하나님이 선으로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본 받아야겠지요?!
다윗이 이 원수들을 친히 갚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친히 원수를 갚아주신다.
하나님은 다윗을 원수들을 통해 사람됨과 그릇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이 친히 시므이의 원수짓도, 요압의 원수짓도 사울의 원수짓도 친히 다 갚아 주신다.
그리고 다윗은 위대한 왕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는 자가 된다.
2.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마시게 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솣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롬12:20)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오히려 원수를 돌봐주라고 하신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하신다.
원수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불편하고 이가 갈리는데, 먹이라니요? 마시게 하라니요?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내 마음도 녹고 원수도 녹고 관계도 서서히 회복되는 것을 본다.
원수를 원수로 친히 갚으면 원수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괴롭고,
원수도 원수짓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더 고개를 쳐들고 관계는 더욱 악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원수는 집안 식구라고 하셨다. 남도 있지만.
남은 안 보면 되지만 집안 식구 원수는 항상 보면서 원수이니 더욱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삶(일어나는 일 등)이 아니라 그 삶을 대하는 용기와 직면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관계는 원수짓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것을 대하는 방식과 자세와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갔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 알고 나아갔다. 아브라함의 비결이다.
하나님만 함께 가시면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 산을 넘든, 깊은 골짜기를 지나가든,
늪에서 씨름하든, 평탄할 길을 걷든 상관없다. 기독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생기느냐가 아니고 어디에서 영원히 지내느냐 하는 것이다.
여정이 아니고 목적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영원한 목적이 있다. 흠 없이 영광에 이르는 것.
하나님은 영존하신 하나님이시고 변함이 없으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다.
시간은 영원의 이마에 어떤 주름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만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누구와 가는지 알고 나아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분을 알고 그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과 동행하자.
친히 원수를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원수가 주릴 때는 먹여주고, 목마를 때는 마시게 해주자.
네 원수에게 악을 악으로 갚는 대신 도리어 선을 행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아 놓게 된다고 하신다.(잠25:21-22)
그 숯불이 그 머리를 따뜻하게 하여 마음을 누그러뜨려 숙이게 하든지,
아니면 숯불은 하나님의 진노의 숯불이 되어 그 머리에 더 큰 보응을 쏟아붓도록 할 것이다.
3.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금언이다.
악을 보고도 모른 척하면 겁쟁이나 비겁자가 되는 것 아닌가? 반론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선을 악으로 이기는 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고 대답한다.
“악”은 사람들의 악행과 위해(위험한 재해)를 의미한다.
악을 선으로 갚을 때, 그들의 악의는 더욱 격발될 것이지만,
결국 패배로 끝이 나고 말 것이다. 원수는 인간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아니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로 이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다윗은 사울을 이겼으며, 엘리사는 아람왕의 군대를 이겼다.
눈을 멀게 하여 사마리아 한 가운데로 인도하였으나 떡과 물을 주어 돌려보냈더니
다시는 그들이 쳐들어 오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우리 자신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수심을 품는 자신의 욕망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를 이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내가 악에게 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새기자.
원수의 악을 내가 친히 악으로 갚으면 내가 지고 실패하고 만다.
악을 하나님 선으로 이기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신다.
과거에는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았지만,
이제부터라도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자.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자.
그리함으로 우리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음을 믿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이렇게 사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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