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11장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 (김영희)

강대식 2019. 10. 22. 20:37

11.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1-5)

 

- 이 본문은 반드시 한 묶음으로 고찰해야 하는데, 그것은 여기에 한 가지 공통된 사상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일치와 평화라는 주제 전반에 대한 신약성경의 고전적인 말씀이 담겨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뿐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 우리가 처한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고 세상의 비참한 상태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최대 관심사가 바로 평화와 일치와 행복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세계는 서로 완전무장을 한 채 점점 더 군비를 증강하며 심각한 교전 상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무서운 핵 문제와 그 방면의 치명적인 위험도 상존하는 형편이다.

각 국가의 내부에도 동일한 불일치가 있다. 더 작은 단위로 가정과 부부관계, 가족관계 같은 삶의 기본적인 단위조차도 붕괴하고 있는 것은 현대세계의 비극이다. 불화와 불일치의 영이 가정까지 침투해 있다. 온 세상이 혼돈에 빠져 있다.

 

- 이런 현실에 대해 기독교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교회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국제적 불일치를 살피면서 우애와 평화와 우정과 양보를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보편적인 호소를 하면 세상이 반응하리라고 기대한다. 많은 불신자들은 교회가 충분히 강력하고 힘 있게 이해와 우애를 호소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은 종종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인간은 다 형제다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일반적인 명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자.

지금과 같은 현실 앞에서도 여전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이상하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호소를 하지 않았던 때는 거의 한 번도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유토피아라는 개념의 배후에 깔린 사상도 이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호소했음에도 세상은 이 지경이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치명적인 낙관주의가 말할 수 없이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이 치명적인 낙관주의의 비극은 죄에 대한 성경의 교리와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피상적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방 또한 똑같이 피상적이다. 신약성경은 어디에도 육에 속한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옳고 바른 것만 알려주면 따르게 되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낙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신약성경은 심히 비관적인 책이다. 신약성경은 인간과 인간의 상태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면서, 피상적인 처방으로는 절대 우리가 당면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말한다.

 

- 일반 명제들을 염두에 두고 평화와 일치의 문제에 대해 사도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가?

1. 첫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불일치의 원인이다.

세상이 오늘날 이 지경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이것이 분쟁의 원인이다. 사도는 분쟁과 불일치로 이끄는 아주 잘못된 것이 사람 속에 있다고,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도 있다고 말한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만드신 곳이다. 중생한 새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빌립보 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책망할 것이 적은 교회였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삶을 위협하는 한 가지가 바로 불화의 영이었다.

 

이처럼 사람의 속에서 분열을 조장하며 의심과 불일치를 일으키는 원인,

첫째로 다툼(당파심)으로서 현재 세상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일종의 파벌의식, 집단성, 편파성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먼저 국가 간에 이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도 우리나라를 내세우고, 저 사람도 우리나라를 내 세운다. 이럴 때 사람은 우리나라가 옳은가, 그른가?”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우리나라가 옳다라고 한다.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거의 모든 분야도 이른바 사회적인 집단화와 구분이 이루어지면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일종의 관습법과 불문율에 따라 움직인다. 각자 자기가 속한 집단에 맞는 행동을 한다. 이것은 항상 불일치와 몰이해와 다툼을 낳게 되어 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이런 현상들에 어떤 정신이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전1:12) 고린도 교회 전체가 사람을 좇아 이 파 저 파로 분열되어, 그들을 좌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당파심이었다. 그들을 움직이는 기준은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유익하냐가 아닌 우리 집단, 우리 당, 우리 패거리이다.

 

둘째는 당파와 다툼의 정신 배후에 훨씬 심각한 원인이 있는데, 바울은 그것을 허영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교만과 자만심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불일치와 모든 분쟁의 궁극적인 원천이다. 인류는 원래 하나님께 종속된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왜 불일치가 생겨났는가? 성경의 대답은 인간이 죄에 빠져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만하고 오만한 인간은 이처럼 신의 자리에 오르고자한다. 그리고 이 많은 신들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눈에 뛰게 만연되어 있는 말할 수 없는 이기심과 자기애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딱한 문제가 아닌가? 사람들은 내 권리를 돌려 달라. 왜 내가 선택한 삶을 살 수 없는가?”라고 주장한다. 자아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내가 받아야 할 대우, 내가 누려야 할 것들, 내 권리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세상의 모든 불화와 분쟁의 원인이 있다. 당파심, 집단 간의 경쟁과 집단 내의 경쟁, 개인의 교만과 허영이 원인인 것이다.

 

2. 둘째로, 분쟁 해결의 방법은 무엇인가?

세상의 문제는 표면에 있지 않다. 인간의 본성 자체에 비틀리고 왜곡된 것이 있다. 인간의 구성요소와 중추 안에 몹쓸 염증이 있다. 인간의 중심에 지독하게 악하고 기만적인 것이 있다. 바울은 참된 연합과 평화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공동의 충성심이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당파심과 허영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공동의 목표 내지는 이익을 중심으로 연대하며, 공동의 충성심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동의 필요가 발생하는 위기 시에 모든 구분을 뛰어넘어 연합을 이룬다.

사람들에게 차이와 구분을 뛰어넘어 서로 다정하고 친근하게 대하라고 요구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참된 연합과 일치, 평화롭고 우호적인 인간관계에 이르려면,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각 사람이 자기의 왕관을 벗고 스스로 낮아져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을 때, 그분께 대한 공동의 충성심으로 우리는 하나가 된다.

 

둘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공동의 충성심뿐 아니라 겸손이라는 또 다른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사도는 이것을 비결로 내세운다. 남녀 간의 차이처럼 실제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참 모습을 알면 남을 더 낫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사도의 설명이다.

그리고 자기 일뿐 아니라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고 말한다. “내 권리가 뭐지?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게 뭐지?”만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은 뭐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를 물어야 한다. 시종일관 자기 자신만 바라볼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는 다툼과 불일치와 불행은 전부 이 원리를 이행하지 못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방법이다.

 

-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더러 겸손하게 남의 필요와 요구와 소원을 생각하라는데, 그것도 처음 했던 말과 같이 이것도 보편적인 호소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사도가 여기에서 약술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바울의 말뜻은 이것이다. “빌립보 교인들아 나는 너희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살 것을 호소하려 한다. 그리스도를 경험한 일이 너희에게 조금이라도 권면이 되고 설득이 된다면 이렇게 살아라. 성령의 교제와 사귐이 있다면 이렇게 삶으로써 그 사실을 나타내라. 하나님의 생명이 조금이라도 너희 안에 심겨 있다면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라.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살 수 있는 삶이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을 이행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 속에 죄의 본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실패와 결함을 깨닫고 바닥까지 낮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며, 특히 그의 십자가를 상고하는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죄인이요 잃은 자요 유죄선고를 받은 자요 무력한 자라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만 이런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바닥까지 낮아진다.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남들은 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라고 고백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겸손의 영을 줄 수 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성령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서 솟아나야 비로소 다른 사람을 애정과 긍휼로 대하며 사랑할 수 있다.

 

이 일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이루어진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말한 대로 오직 십자가만이 중간에 막힌 담허문다.(2:14) 오직 이것만이 연합의 토대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다.

바울은 이 점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왜 그렇게 되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영광을 계속 누리려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4절을 실천하셨다. 사도는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본성을 받아야 한다. 기존의 자아를 못 박아 없애고 하나님의 아들이 주시는 새 자아, 새 본성을 받아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