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주일설교
본문: 벧전 5:6-9
제목: 겸손하라
1.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그러므로” 하면 그 앞 부분의 말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장로들에게 권면하고 그 다음에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도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장로들은 양무리들을 치는 자들이고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너희 중에 있는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5:2-4)
다음에,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젊은 자들에게 권면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5:5)
장로들에게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장 조심할 것은 교만이다.
장로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지 않는 자가 교만한 자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직접 대적하여 벌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교만과 겸손은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한다.
교만은 가르치는 자 앞에서 ‘나도 안다’, 심지어는 ‘더 안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겸손하게 배울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하게 가르칠려고 덤벼 드는자이다.
청교도의 정상, 조나단 에드워즈는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을 구별한다.
율법적 겸손은 불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복음적 겸손은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율법적 겸손은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는 겸손이다.
복음적 겸손은 자발적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달콤하게 굴복하는 겸손이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하는 겸손이다.
복음적 겸손이 없는 자는 참 신앙이 없는 자이다.
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성품 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복음적 겸손은 먼저, 세상적 성향, 곧 명예, 권력, 부, 쾌락에 대한 욕심 내지 끌림을 버린다.
다음에, 타고난 자고함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운다.
이 부분은 가장 위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사막이나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고대의 은자들의 겸손은 거짓된 것이라 하였다.
그 은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의를 전혀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한 정욕을 버리고 다른 정욕을 산 것뿐이었다.
“짐승 같은 정욕을 팔고 마귀 같은 정욕을 만족시킨” 것이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한다고 했다.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
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데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참된 영적 지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지각하게 한다.
영적 교만의 틀림없는 표지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위조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위조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게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거지와 같은 가난한 심령을 은혜로운 겸손이라 본다.
자신을 “계속적으로 하나님 집의 문간에 있는 거지로 자처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여 건넘 같이 요단을 건너게 하셨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능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4:24).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실 수 있다.
겸손한 자는 높이시고 교만한 자는 낮추신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
우리 손에 있는 작은 소유와 작은 성취들이 우리를 높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면,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 겸손한 자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인 자를 높이신다.
때가 되니까, 요셉을 높이셨고, 모세를 높이셨고, 다윗을 높이셨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그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 사정 우리의 생각 마음 속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 있다.
그 하나님을 모르니까 교만을 부리고 그 교만을 겸손으로 가장하기도 한다.
그 교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심을 알아야 한다.
참된 겸손으로, 복음적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하나님의 능하심 앞에 부복해야 한다.
그 하나님이 능하신 손으로 때가 되면 우리를 높이시고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하실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 말씀을 약속으로 믿고 잠잠히 참고 겸손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심은 가지는 내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2.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너희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지 못하고 자기가 다 도맡아서 염려하는 것은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만 믿는 교만함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손의 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대적하는 교만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데도 염려로 하루를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와 환경 때문에 불안에 떨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극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주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신다.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고도 하신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의 의이다.
그리하면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지난 날들을 돌아보면, 또 현재도 하고 있는 걱정들을 보면,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에 떠는 것이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주께서 우리를 돌보심을 믿고 주신 은혜와 평강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의연한 자세이고 그리스도인다운 특징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주님과 같은 명령을 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하나님은 평강부터 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
그러면, 우리가 염려하여 구하는 것은 언제 주시느냐?
그것은 주님의 때에 주실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광야에서 욕심을 내어 구하였을 때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영혼은 쇠약(파리)하게 하셨다.
염려를 주께 맡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해결되는 방법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적으로 구하고, 위해서 사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내 나라’, 곧 나의 가정 나의 자녀 나의 직장 나의 사업을 먼저 구하며 산다.
내 나라만 구하고 우선으로 사는 사람은 염려가 없어질 날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위해서 살 때 사실은 내 나라를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돌보신다는 것,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심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다.
항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기를 힘쓰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을 더해 받는 비결이다.
그러한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을 축복하신 것이다.
3. 근신하라 깨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근신하는 것이다.
죄의 잠에서, 게으름의 잠에서, 세상의 유혹에 빠진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죄와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
이제 깨어나서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3,2)
사도 바울도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한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어거스틴이 방탕한 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세미한 음성이 들려와서
성경을 펴서 이 구절을 읽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밤은 죄악의 밤이요, 낮은 천국의 낮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면, 어둠의 일을 벗고 이제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 근신하고 깨어나는 것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해야 한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음란하고 호색하는 것, 다투거나 시기하는 것, 다 육신의 일이다.
우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신다.(벧전4:7)
어둠에서 빛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답게
우리의 성품과 삶에 구별이 있어야 하고,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그것이 근신하며 깨어나는 것이다.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닌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근신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마귀는 육체로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건히 하여 대적하는 길 밖에 없다.
세상에 있는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형제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고 함께 영광에 이른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고, 우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면서,
근신하고 깨어서 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그 끝에 축복이 있고, 영광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소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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