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영원성은 무한한 악과 죄의 극악함, 정당한 보응에 있다/ 에드워즈/ 맥클리먼드
지옥의 정당성에 대해 에드워즈가 가장 자주 반복하는 논증은 무한한 악과 죄의 극악함이다.
극악한 죄의 심각성이 상처 입은 대상의 존엄함에 달려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날도 해외에서 온 국제 구호원이나 고아원 원장을 살해하는 일은 마약 판매자나 살인 청부업자를 살해하는 일보다 더 충격적일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존엄함과 사랑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의무도 무한하다. 그러나 인간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명예를 “진흙 가운데 짓밟으며” 모독했다. 우리가 무수히 범하는 일상의 죄악들, 즉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대한 우리의 측량할 수 없는 죄, 다른 사람들이 받은 축복에 대한 우리의 시기와 분노, 영원에 대해 스스로 준비하기를 거부하는 것, 우리가 신앙을 실천하는 때조차 나타나는 우리의 이기심, 하나님께 불평하고 비난하는 우리의 습관 등에서 극악한 인간의 죄를 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죄의 무한성을 확신하기 때문에 악인의 영원한 징벌로도 충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순교자를 고문하는 것이나 “죄가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것과 같은 세상의 극단적인 악을 상기할 때에라야 죄의 무한한 악을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논증했다.
영원한 징벌의 정당성에 대한 또 다른 논증은 정당한 보응의 원리에 근거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거나 또 다른 구세주를 보낼 의무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많은 자비 --- 은혜”를 베푸셨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악한 편에 서기를 선택”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행복”을 베푸시고 “온갖 수단으로 설득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하시면서 이들을 “일찍이 사랑”하셨지만, 이들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게다가 만일 하나님이 악을 벌할 재판관으로서 행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떤 재판관도 범죄자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가 없다. 그리고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해 무한히 증오하셔야 한다. 창조주는 살해 당하셨고 그의 피를 이 세상에서 부당하게 흘리셨다. “이것이 전체 틀을 무너뜨리고 지상의 모든 복수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지옥은 정당하다. 또한 그것은 미적으로도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옥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선하신 하나님이 지옥을 허용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던 18세기 자유주의자에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인간이 고통당하도록 허용하신 이유를 이미 갖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지적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 적합하며, 악인의 영원한 징벌이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위엄, 그의 권위와 위대함 그리고 정의와 거룩함”을 드러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세상에서는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지옥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종종 번성하고 의인을 압제한다. 그러므로 지옥은 아이러니한 결과다. 지상에서 기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악인들은 천국에서 적합하지 않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악인들에게는 “구역질이 나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적합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이 적절한 처사임을 알게 해서 행복을 줄 것이다. 지상에서는 성도들이 저주받은 자들의 구원을 바라며 그들을 사랑하지만, 이제 성도들은 왜 하나님이 악인을 저주하셨는지를 보고, 공의가 만족되고 있음을 깨닫고 기뻐할 것이다.
에드워즈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이신론자들은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지옥이 “수백만 년과 수백만 세대”까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지옥은 무한한 범죄의 규모와 “비례해서” 영원 지속되어야 한다. 죄마다 무게의 정도가 각기 다르지만, 모든 죄는 무한하다. 무한히 긴 원통이 다양한 직경과 두께로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단순히 악인을 소멸시키시고 존재를 중단한다고 제안하는 켄터베리 대주교 존 틸롯슨과 같은 자들을 반박하면서, 에드워즈는 많은 답변으로 대응했다. 성경은 악인이 그들의 고통을 “지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다양한 수준의 징벌이 있겠지만 소멸은 이런 점과 모순된다.
소멸은 정당한 징벌로서는 부족하다. 악인은 지옥에서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범죄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많은 악인이 의인을 압제하면서 지상에서 행복한 삶을 누렸기 때문에 소멸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악인은 죽음 후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 소멸은 인간이 파괴될 수 없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개념과 모순된다. 소멸은 어떤 죄는 용서받을 수 없으며, 게다가 유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뻔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지옥이 일시적이며, 개선될 수 있다고 보는 자들 그리고 지옥에 있는 자들이 미래에 은혜를 받을 거능성이 있다고 보는 자들에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최종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히브리서 10장 27절(“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과 다른 성경 본문들을 인용했다. 또한 에드워즈가 주장하기를, 특별히 설교와 성경과 같은 방편이 없는 가운데 지옥의 공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 같다.
게다가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영원히”)는 또한 하나님과 천국의 영원성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에드워즈가 가장 좋아하는 저자인 스코틀랜드인 슈발리에 램지가 가르친 보편주의를 에드워즈는 분명하게 거부했다.
마이클 멕클리먼드, 「한 권으로 읽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pp 722-725
'조나단 에드워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of), 통해(throuh), 안에서(in) 받는다/ 에드워즈 (0) | 2020.04.30 |
---|---|
천국은 영광스러운 도성, 예비된 거처, 영광의 단계, 사랑의 나라이다/ 에드워즈/ 스위니 (0) | 2020.04.25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최고로, 최선으로 사랑할 수 있다/에드워즈/스위니 (0) | 2020.02.09 |
오래된 한책에서 비롯된 좋은 삶이 있다/ 에드워즈/ 스위니 (0) | 2020.02.08 |
'신적이며 초자연적인 빛'/ 에드워즈/ 맥클리먼드 (0) | 2020.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