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도들의 권위 아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계시로서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에 대한 희박한 의식은
자유주의신학이 지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신앙의 해독이라고 할 것이다.
(3) 본훼퍼(D. Bonhoeffer)의 세속화신학
전통적인 기독론이 가졌던 중심적인 질문은 “Cur deus homo?(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나?(Anselm) 혹은 “Ut quid enim descendebat(하나님은 왜 인간으로 오셨나? ”(Irenaeus)등과 같은 것이었다. 본훼퍼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런 질문으로 기독론을 정립한 정통신학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다. 그의 비판에 따르면, 위의 질문에 근거한 기독론으로는 개인주의적인 구원관의 폐해를 피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정통기독론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기독론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그의 기독론이 더 이상 정통신학의 궤도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의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라는 일종의 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적 초기의 그의 논문의 요지는 “공동체로서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나치의 독재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그의 생애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세상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사실상 기독론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의 특징적인 사실을 지적했다.
1) 현대사회는 더 이상 “종교”(as a priori)가 없는 시대라고 했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신지식(cognitio insita)이 있다고 했으나 본훼퍼는 반대로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을 피력한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종교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어떤 본질적인 필연성도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나 은혜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않고, 교회는 바로 그렇게 종교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 놓였다고 보았다. 이런 현대성에 대한 이해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같이 무종교적인 사회에서 교회의 중요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2) 그는 현대사회를 성숙한 단계(the adulthood of the world)에 이르렀다고 간주했다. 따라서 누구도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보편적인 원죄의 문제를 지적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식의 태도는 기독교의 선교적 진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종교적인 메시지를 대하는 현대인들은 도리어 모욕감을 느낀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런 식의 선교전략은 현대사회에서 전혀 무용지물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죄의식을 들추고 고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극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해야한다.”
본훼퍼의 신학은 현대사회에 대한 자신의 이해로 인해서 많은 부분이 구축되었다. 본훼퍼는 자유주의 신학적 요소에 반대하였는데, 그 주된 반대의 이유는 현대사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이해가 통용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특별히 두 번의 세계 전쟁을 통해서 인간과 역사에 대한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견해를 견지했던 자유주의의 종교이해(슐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 감정으로서 종교성, 칸트의 정언적 명령으로서 윤리성)는 더 이상 설 곳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적인 의미를 상실했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또한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본훼퍼는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입장을 취하였고 교회는 단순히 종교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가 곧 교회적 실체라고 인정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훼퍼는 바르트(K. Barth)의 신학적 유산을 물려받았음이 분명해 진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정통 신학의 모델도 완전하지 않다고 간주하였다. 바르트의 신학으로 대표되는 이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초월은 이 세상과 전혀 만날 수 없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결국 역사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조장한다는 비난에서는 정통신학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본훼퍼는 자유주의신학과 신정통주의신학 사이에서 제 삼의 길을 열었다. 즉 세상과의 적극적인 관계성 혹은 세상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이해를 도모했다. 지금까지 세속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인 영역과 엄격히 구분되었던 세상과의 역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승인받고자 한 것이다. 세상에의 적극적인 참여(participation), 이것만이 극단적인 내재(자유주의신학) 아니면 극단적인 초월(신정통주의신학)에 바탕한 기독교 이해를 극복할 수 있는, 따라서 현대사회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서 인식했다.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무종교적 사회이므로 이런 사회에서 종교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종교적인 옷을 다 벗고 과감히 세상의 한 가운데 서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종교적인 상징과 교회에 갇혀 있는 그리스도 혹은 선험적인 것(a priori) 안으로 제한된 하나님의 초월을 세상으로, 현재의 역사 경험의 영역으로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을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의 통로인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는 장으로 정립하게 될 것으로 보았는데 이 개념이 바로 소위 “거룩한 세속(holy worldliness)”이다. 이 개념은 정확히 일반역사 혹은 세속이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부재 혹은 하나님의 죽음을 경험한 장소였으나, 이제는 하나님과 조우가 이루어지는 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거룩과 세속의 경계는 일순간 허물어지고, 세속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인의 성례전적 재료가 된 것이다.
그의 소위 “과격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는 바로 이런 주장의 연장인 것이다. 세속(worldliness)은 본훼퍼에게 이제 새로운 영적 경험의 장으로 열린다. 그것은 이제까지와 같이 특별하게 구별된 종교적인 장소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길로서 인식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일한 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고통 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과 하나로 살아가는 것만이 참된 종교일지언정 교회에 출석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며 고백 문을 암송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의 가능성인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경우 “값싼 은혜”(cheap grace)에 불과한 반면에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는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받게 되는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교회성장이론과 “성공의 우상화”(D. Bonhoeffer), 이 두 가지에 집중된 관심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회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교회는 특정사회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전락하는 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성과 정치적 봉사를 제자도라고 외치면서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역동적으로 사역할 것을 요구하는 본훼퍼의 신학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는 우리에게 더욱 큰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한편, 본훼퍼의 신학을 “세속화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편협한 종교적인 언어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세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성질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은닉된 제자도”(the secret discipline)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지 않아도 사람을 위해서 봉사한다면 곧 그가 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주장인데, 이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구원받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대신학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시자와 지시의미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그 신앙이 닻을 내리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분명한 지시자가 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와 그 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구원받는 신앙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빌 2:11).
본훼퍼는 윤리적인 선을 곧 신앙의 본질로서 이해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지극히 인본주의적 종교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언제나 윤리적이지만 그러나 윤리 그 자체는 아니라는 워필드(B.B. Warfield)의 말은 옳다고 하겠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윤리적인 선을 추구하는 행위를 동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더 크고 완전한 선, 곧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본훼퍼가 말하는 제자도는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신앙의 외적 표현이며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양식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본말을 전도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훼퍼는 자신의 과격한 제자도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이 현대사회에 호소력을 가질 것으로 보았으나 그가 기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스스로 유린하고 얻을 수 있는 공허한 칭송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의 개혁주의가 지향해야 할 신학의 세 가지의 원리가 있다면 첫째는 성경, 둘째는 고백적 전통, 그리고 세 번째는 상황화라고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현대사회에서 신학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사회학적 관점에서 신학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것이 현대신학의 일반적인 조류이다. 성경은 사도들의 권위 아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계시로서 말씀에 대한 신적 권위에 대한 희박한 의식은 자유주의신학이 지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신앙의 해독이라고 할 것이다. 본훼퍼 역시도 현대사회에 대한 인식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초월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수정하고자 했는데, 이런 상대주의와 인본주의적 흐름은 그의 삶의 내용과 관계없이 철저히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Ⅰ.서론 Ⅱ. 정체성과 상관성의 문제 1.상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체성을 희생치킨 결과:현대신학 2.상관성을 얻기 위한 몇 가지의 명맥한 예들 (1)슐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의 종교감정 (2) 불트만(R. Bultmann)의 비신화화 (3) 본훼퍼(D. Bonhoeffer)의 세속화신학 ☜ III. 현대신학의 도전과 복음주의 Ⅳ. 결론: 두 가지의 중심 원리 박혜근(칼빈신학대학 교수, 조직신학)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저서 및 역서 : Salvation in Moltmanns Trinitarian Theology The Cross and Praxis 2008.10.27. 제6호 10면 신학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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