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이안 머리
첫째 견해: 부흥의 단회성
부흥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여기는 주장이다. 부흥을 특별한 것으로, 또는 일정한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는 오순절 기간과 같고 ‘마지막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사건을 통해 영원히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 주어진 것이 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이렇게 본다면 성령은 교회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또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3) 부흥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의미하고, 중요한 것은 이미 성령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미래에 일어날 성령을 부어 주시는 의미로서의 부흥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며 기도한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이 견해는 네델란드 개혁주의 교회 안에 널리 퍼진 사상이다. 대표적 인물이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또다른 부어 주심이나 성령 세례를 간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참된 의미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는 실제로 오순절의 기적을 부인하는 셈이 된다. 우리에게 이미 오셔서 내주하시는 그분은 또다시 우리에게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견해: 부흥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반복될 수 있다
부흥을 경험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전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견해이다. 부흥은 영원하고 지속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으며, 또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힘쓰기만 하면 우리는 부흥을 맛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찰스 피니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가 쓴 「진정한 부흥」에서 말한다. “부흥은 적절한 수단들을 써서 얻을 수 있는 농작물처럼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면 그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올바른 수단이 지속적으로 주어지기만 한다면 부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2) 부흥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회개와 갱신된 개인의 거룩함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전파를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중국 선교사를 지낸 고포스, “우리가 순종할 때 부흥은 언제나 가능해야 한다.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우상이 아직도 우리 마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덩컨 캠벨, “핵심은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냐 하는 성화의 문제이다”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시24:4)처럼, 회개와 복종 그리고 헌신의 문제이다. “완전한 헌신은 축복의 장소이며 또한 부흥의 대가이다.”
존 오웬,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하시기 때문에 사람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도 중생과 같이 무조건적인 은혜의 역사로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입해 주시는 사역을 제외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문제는 이것, 즉 과연 우리의 순종이 부흥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순종과 부흥의 관계를 부흥의 원인과 결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단순히 피니처럼 “성령의 능력 아래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일어날 수 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한 명 두 명 또는 수백 명이 한꺼번에 구원받는 역사는 결국 우리의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은혜의 분량이 사람의 노력의 분량에 따라온다고 약속하신 적 없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라”(고전3:6-7). 교회 역사 또한 부흥이 우리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조건적이라는 것을 반박한다. 그런 복은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이었다. 휫필드, 번스 등과 같은 사람들이 사역 가운데 놀라운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그들이 충분히 성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다.’(행3:12)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도들에게 가져다 준 변화는,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갖는 특권과 세례 요한을 비교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과 같은 변화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눅7:28) 데이비드 브라운, “오순절 사건은 교회사에서 대 전환점을 이룬 사건으로서 민족주의에서 만민주의로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교회에 엄청난 능력을 공급했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교회가 온 세계로 나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했다.
셋째 견해: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반복될 수 있다
이 견해는 부흥의 현상을 좀더 성경적으로 설명하는 견해이다. 필자는 이것을 ‘구학파의 견해’라고 부르고자 한다. 둘째 견해와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성령이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수준과 분량이 항상 오순절에 있었던 정도로 영구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사역은 두 가지 면에서 조명될 수 있다. 하나는 더 일반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측면이다.
1) 사도행전 전체를 볼 때, 우리는 오순절에 일어난 현상 중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 위에 덧붙여지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182번)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비록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긴 하지만, 그분의 사역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같은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정도’이 차이에 대한 견해는 청교도가 쓴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브로스, ”처음엔(예, 구약시대) 성령은 떨어지는 물방울과 이슬 정도로 주어졌지만 이제는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이 부어졌다.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딛3:6). 바람에도 산들바람, 보통바람, 돌풍, 강풍의 정도가 있는 것처럼 성령의 부으심의 정도에 대해서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때에 사도들은 성령을 이미 받았지만 오순절 때에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 때는 산들바람에 불과했지만 이제 그것은 돌풍이 되었다.“
2) 신약 성경은 성령께서 언제나 교회에 계시지만 성령의 능력과 영향력의 정도는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고 말씀한다. 자신의 뜻에 따라 성령을 부어 주신다. 사도 시대 교회들은 그 부으심을 반복해서 받았다. 오순절 사건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성령을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더욱 충만한 성령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이 약속은 그들과는 무관하게 될 것이다.
3) 셋째 견해는 교회사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흥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교회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종교개혁과 같은 위대하고 급작스런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존 녹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자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셨다.“ 부흥에 대한 목격자들은 예외 없이 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가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들은 먼저 경외감과 두려움으로 압도됐고, 다음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으며, 결국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케 되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 사건들은 부흥이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와 노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들이다. 부흥은 예고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1735년에 노샘프턴의 부흥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가 증언한 것처럼 부흥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는 또한 1740년의 대각성에 대해서도 ‘그것은 마치 맑고 푸른 하늘에 내려지는 벼락과 같이 졸고 있는 교회들 위에 쏟아져 내렸다.’라고 말했다.
오순절 사건은 영구적인 표준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의도된 것도 아니었다. 성령의 부으심은 교회의 영원한 머리 되신 분의 창조적인 사역에 속한 것이다. 셋째 관점을 요약하자면, 부흥은 성령의 부으심이며,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교회의 삶을 새롭게 바꾸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불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는 은혜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비상하신 교통하심이며, 그의 능력이 뚜렷하게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부흥은, 성령이 비상하게 부어지는 기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역사인데, 그것은 마음 속 깊이 성령의 인치심을 느끼고, 죄의 용서와 회개에 대해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서 보통 때에 일어나는 회심의 경우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더 위대하고 더 풍성한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더욱 드러내 주시는 것이다.”
알렉산더 무디 스튜어트, “성령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계시기는 하지만 더 친밀하게 그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훨씬 강력한 능력을 쏟아 부으시는 때가 따로 있다. 개인에게도 지역적으로 다가오시기도 한다. 그리하면 믿음이 회복되고, 신령한 삶이 회복되며,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고, 거룩한 예배와, 진지한 회개와 순종이 회복되는 것이다.”
구학파의 웨일즈 설교자들도 부흥에 대해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1859-1860년에 있었던 대부흥기에 존스 목사는 1860년 2월 29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평상시와는 다른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전혀 예기치 못하던 때에 ’몰아치는 돌풍‘과 같이 갑자기 찾아오셨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 자신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전능하신 분께서 은혜의 문을 여시고 교파를 초월한 모든 교회 위에 은혜의 강물을 쏟아 부으시고 있다.”
이안 머리, 「성경적 부흥관 바로 세우기」, PP 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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