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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B. 워필드는 자유주의에 반격하는 데 우뚝 솟은 독보적 인물이었다/ 재스펠

강대식 2021. 4. 18. 16:11

워필드는 자유주의에 반격하는 데 우뚝 솟은 독보적 인물이었다/ 재스펠

 

시드니 암스트롱이 자유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른 시기에 워필드는 바로 훼방꾼이었다.

지적, 학문적 역량에서, 그리고 글을 써내는 데,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에 비견될 만한 워필드는 자유주의에 반격하는 데 우뚝 솟은 독보적 인물이었다. 위필드는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분석했기 때문에 흔히 프린스턴의 변증가라고 불렸다.

 

개신교의 주된 풍경이 새 옷을 입은 불신앙의 낌새를 보이는 가운데, 워필드는 진리는 자기 편이며, 아니 자신이 진리 편이며 그 어떤 비평적 학문이나 반초자연주의적 편견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전복시키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제임스 맥클라한, “워필드는 테르툴리아누스를 연구하는 중에도 하르낙에 눈을 떼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대해 기술하는 중에도 브릭스와 맥기퍼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영어권 세계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의 워필드가 가진 방대한 학식, 명료한 문체, 그리고 터무니 없을 만큼 대단한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이는 없다.”

 

언제라도 역사적 신앙의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던, 그리고 자기 교단 안팍에 있는 불신앙을 다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위필드는 자신의 경력 내내 열정, 예리한 통찰, 그리고 방대한 학식을 발휘했다.

 

워필드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가 되기 이전, 거의 반세기 동안 프린스턴 신학교는 역사적 개혁 신앙의 학문적 보루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구프린스턴의 두드러진 영향력 덕분에, 교회 안에 자유주의화 추세가 상당히 억제되어 왔다. 워필드도 2,700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끝없이 글을 써냄으로써 엄청난 몫을 감당했다. 그러나 암류(暗流)란 항상 존재하는 법 아닌가?

워필드가 죽고 10년이 채 못되어, 자유주의 사상이 워필드가 속한 장로교회와 지극히 사랑했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위필드가 길에서 총장 부인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했다. “워필드 박사님, 총회에 어려움이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화평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위필드는 이렇게 답했다. “총회가 옳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큰 분쟁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워필드의 제자였고 이후 동료가 된 그레셤 메이첸은 워필드가 죽기 몇 주 전 그와 나눈 대화를 전해 준다.

더는 견딜 수 없는 현 상태를 끝내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반기독교 선전가들과 분리시키는 대분열이 교회 안에 일어나야 하리라는 바람을 나타냈다. 그러자 위필드 박사는 아니요, 썩은 나무를 쪼갠다고 능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워필드 박사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는 기존의 조직 교회가 완전히 싸늘하게 식고 죽어, 그리스도인들이 이 죽은 교회 바깥에서만 영적 생명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기를 기대하시는 것 같았다.”

 

교회는 자연주의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빠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메이첸은 위필드의 장례식을 마치고 사람들이 위필드를 들고 나갈 때, 구프린스턴도 함께 사라진 듯하다고 말한 바 있다.

 

프레드 재스펠, 한권으로 읽는 위필드 신학, pp 7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