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9 주일설교
본문: 고후 4:7-11
제목: 예수의 생명
1.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이 보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복음의 광채로 빛나고 있다.
이 세상 신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셔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게 하신다. 거듭나게 하신다.
빛이 있으라 하시며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인간은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배로운 그리스도를 질그릇에 갖게 하심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고 질그릇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버린 것이고 사탄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와 같은 능력을 입혀 주셨어도, 나는 여전히 질그릇일 뿐이다.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이 자기 뜻에 따라 교회 유익을 위해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자기가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까부는 부흥사들,
교회 숫자를 늘렸다고, 큰 교회 다닌다고, 큰 교단을 이루었다고, 그 교단에 속했다고,
목에다 힘주는 사람들은 자기가 질그릇임을 잊고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지금도 그들이 큰 문 넓은 길로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멸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들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을 주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로 쳐 죽일려고 해도 스스로는 능력을 쓰지 않았다.
그 성난 백성들에게 엎드렸을 뿐이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거나 모세를 통해 쓰셨다.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지 모세에게 있지 아니하였다.
모세에게 40년 광야 훈련을 하게 한 것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질그릇이 할 일은 하나님이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고난 가운데서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고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다 망한다.
있고 없고에 흔들리고 거지 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입혀 쓸 수가 없다.
그릇을 만들려고 고난을 주시는 데 사람과 세상에 도움을 청해 고난을 해결할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냉탕 온탕에도 자족하며 초연할 줄 아는 질그릇을 만들려고 하신다.
자기 출세욕과 소유욕에 사로 잡힌 자들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고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하신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52:7)
바울은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다.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이것이 고통스러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했는데,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기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약대 2년, 멱우리 15년, 화서 4년을 통해
이 진리를 터득하게 하시고 경험하고 낮아지게 하셨다.
주시는 것으로만 살게 하셨고, 스스로 고난을 해결할려고 하지 않게 하셨다.
그 빈 집, 빈 손으로 사는 동안 하나님은 청교도들을 만나게 하셨고 본받게 하셨다.
2. 욱여쌈,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질그릇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쓰시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으로 연단하신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게도 하신다.
사방에서 한 가운데로 모아들여 싸서 옴짤달싹을 못하는 지경이 되는 궁한 형국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싸이지 않게 하신다.
답답한 일을 당하게도 하신다. 우리가 잘 견디면 하나님은 낙심하지 않게 하신다.
박해를 받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린 바 되지 않게 하신다.
거꾸러뜨림을 당하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망하지 않게 하신다.
이런 욱여쌈과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은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 능력으로 곧게 할 수 없다.
믿음과 인내의 훈련임을 알고 오래참음으로 견딜 때
우리는 쓰임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하나님은 고난을 면하게 해주신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난이 올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대적하고 돌을 들어 지도자를 칠려고 한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의 방법은 오로지 믿음과 오래참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고난의 연단들을 벗어날려고 피할려고 발버둥치고 도움을 청하고 사정하노라면,
그 질그릇은 점점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가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결핍은 더 심해지고, 평판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믿음과 인내로 고난을 잘 견디는 질그릇이 되면,
기록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한 번 참으면 두 번 참을 수 있고 계속 참으며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손 벌리면 두 번 손 벌리게 되고 계속 손 벌리게 되고,
채워지지는 않으면서 더 결핍에 시달리고 사람 꼴만 더욱 우습게 되어갈 뿐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만 구하고 사람에겐 구하지 않은 조지 뮬러와 허드슨 테일러에게 배워야 한다.
사도와 선지자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그렇게 살았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져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큰 사망을 당해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질그릇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람도 될 수 없고, 하나님이 능력 주셔서 쓰는 질그릇도 될 수 없다.
어떤 처지에도 자족하며 풍부와 궁핍에도 믿음으로 의연함을 배워야 한다.
억울한 감옥살이에도 권력자를 의지하지 않는 요셉을 만들고서야 총리로 세우셨다.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를 만드시고서 하나님은 모세를 위대한 능력자로 쓰셨다.
스스로 원수 갚지 않는 것을 아비가일에게서 배우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람들이 다 잡혀가고 부하들이 돌로 쳐 죽이려는 시글락 위기를 겪은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헤브론에 오르게 하시고 왕으로 기름부으셨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고,
압살롬 반란으로 쫓겨가면서도 시므이의 돌 던지는 저주를 그냥 감내하는 다윗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게 하는 길은 내가 약하여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는 질그릇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진리를 체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언약이고 약속이다.
그것을 굳게 믿고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만 구하고 사람에게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을 확신해야 한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강하고 담대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극히 잘못된 믿음 신학, 형통 신학, 긍정 신학, 4차원 영성은 사탄의 신학이다.
성경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부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보배를 안에 가졌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질그릇이고 질그릇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데 내가 방해물이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쓰임 받는 도구로, 통로로, 종으로 족하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
3. 예수의 죽음을 짊어져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사방으로 욱여쌈 담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 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이다.
그것들이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임을 알고 믿음으로 견디면,
우리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예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역설이면서 복음이다.
이 비밀과 능력을 알지 못하면 구원의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다.
사방으로 욱여쌈,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이 없이는 우리의 자아는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심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냄이 되어야 한다.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졌다면 질그릇이 죽은 듯 될 때 예수의 생명이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생활에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을 말씀하고 있다.
내가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거나, 내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거나,
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날 수가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우리의 죽음을 표현함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에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그 생명으로 살 수 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겪으면서 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고 나는 죽음에 넘겨져야만 한다.
그러할 때만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고 예수의 향기가 피어난다.
그런데 믿음 신학 형통 신학 긍정 신학 4차원 영성으로 그 고난을 다 해결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가?
기독교를 얼마나 미신으로 만들고 우상단지로 만드는 일인가?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고 생명을 잃고자 하면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기독교의 참 생명이고 핵심이고 진리이고 복음이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살았어도 죽은 목숨이다.
내가 어떻게든 나를 붙들고 나를 살고 또 살아서 그 생명은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은 죽었어도 그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영원히 복과 영광을 누리며 산다.
기독교가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의 대속으로 영혼들을 구원한 목적이 이 영생이고
이 영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와 선지자들과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죽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져 본 적도 없고,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져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목사 하고 전도 하고 교회 모여서 미신처럼 복을 구하거나 빌고
문제 해결사 심령 위로사 상담 치료사 노릇하고 천국행 티켓이나 팔고 있으니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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