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7 주일설교
본문: 살전 1:2-5
제목: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
1. 복음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고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하나님의 복음은 말로만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은 그렇게 전하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 받고, 복된 생애와,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교인들은 다른 것들에만 관심을 쏟고 아편과 악세사리의 믿음에 머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열심히 드리고 율법을 줄줄 외면서도
자기 만족과 방탕과 빠른 축복을 위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긴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애굽과 홍해에서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그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다 멸망시킨 것을 왜 생각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왜 멸망시키셨는가?
한마디로,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 자신의 내주하심과, 그로 인한 큰 확신이 없다면,
형식적인 종교 생활과 열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샤머니즘을 믿음 때나, 불교와 유교를 믿을 때나, 열심을 떨고 지성을 드리며 비는 것은
항상 나와 내 자식들 잘 되는 것, 내 직장 사업 잘 되는 것, 내가 속한 교회와 집단 잘 되는 것,
기타 내 기도 제목대로 잘 되는 것, 그 내용은 항상 같은 것이다.
이를 위해 새벽 기도하고, 열심히 주일에 교회 출석하고, 성경 줄줄이 외우고,
멋있는 그림과 구절들로 나를 장식하고 종교활동 열심히 한다.
사도 바울이 약하고 심히 떨고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런 종교 생활로 만족하는 것 때문이었다.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만 가르침을 받으면 사람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머물고 만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가르쳐야,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된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에 있게 된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고 가르치는 복음에 눈을 떠야 하고 사로잡혀야 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히면 그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에 취하여,
사람의 계명과 철학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겼기 때문에 멸망 당했다.
성령으로 하지 않는 믿음은 항상 사람의 지혜와 종교 행위와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우리 믿음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에 이르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수 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면 떡으로만 살게 되고 하나님을 헛되이 섬길 뿐이다.
여러분에게 이른 복음이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있는가?
정말 내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가?
정말 내 믿음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종교 행위와 종교 생활에 열심을 내고만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할 때도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이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수 있는 것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도,
부모 처자 형제 자매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주를 위해 미워할 수 있는 것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도,
그래서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속사람이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가르치는 말씀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우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에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청교도 신앙을 공부한다면, 청교도들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산 최고의 모범이고
우리에게 그 큰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최고의 스승들인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2.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1:3-4)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믿으면, 믿음의 역사를 낳고 사랑의 수고를 하고 소망의 인내를 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실천하고 있었다.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하고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아무 행함도 능력으로 역사도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 구원 받는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한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믿음은 아무 능력도 행함도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믿음,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있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믿음 자체의 역사가 아니라 믿음을 통로로 수단으로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렇지만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이 믿음을 통로로 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내 믿음이 그러한 믿음인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인지, 형식적인 관념적으로 입술로 하는 믿음인지,
시험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서 버림 받고 지옥 자식으로 영벌을 받아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는 것은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다.
그냥 계시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분에게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도록 견고해져야 한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공염불이고 공허하다.
수고하는 땀이 따르고 희생하는 정신과 몸이 따라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고 그 사랑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사랑의 수고는 맹목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진리도 또한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
인자와 진리는 함께 가고 조화를 이루는 곳에 평화가 깃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의 정의와 내용들을 항상 음미하며 새김질할 필요가 있다.
사랑한다면 오래 참아야 하고 온유해야 한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한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견디며 믿으며 바란다.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으면, 열심도 사랑도 하나님의 의는 못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자기 의만 이루다가 멸망하고 만다.
올바른 지식 곧 진리는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배워야 한다.
소망은 인내가 따른다.
오래 참는 인내가 없이는 소망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자기 기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받는다.
이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하신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약5:11)
욥은 그 부유한 생활에서 하루 아침에 십 남매의 죽음과 부의 몰락을 겪고도 인내하였다.
또한 그의 몸까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아파서 괴로워하면서도 인내하였다.
그 결말은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복을 받았고,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25년을, 모세는 40년을 요셉은 13년을 기다렸다. 다윗도 요셉과 비슷.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루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한다.
소망을 이룰려면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셋째도 인내이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하신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고 하신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물론 우리가 장차 받을 복과 영광에 대한 소망도 있기에
우리는 여러 환난과 수고를 오래 참고 인내한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고 하신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
야고보 사도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신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5:7)
번개불에 콩 볶아 먹을려고 하고 빨리빨리 문화를 자랑하는 세태에서
참음으로 오래 기다리라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의 빠른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면
강하고 담대하게 인내하며 기다리라 하신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진리와 복음을 가르침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나의 생애와 운명을 좌우하는 것임을 알기를 바란다.
가르침 받은 진리로 말미암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갖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살 수 있다.
주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도,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다짐한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2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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