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9 주일설교
본문: 창 1:1-5
제목: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하나님이 천지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어떤 의문도 끼여들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언하고 공포하는 하나님 주권의 우주적 대장전이다.
재발 창조론이라 하지 말라. 진화론과 같은 반열에 두고서 변증이라고 하는가?
창조 없이 통치 없고 심판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시작과 진행과 종말이다.
세 가지는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음을 성경을 통해서 배운다.
창조하신 분만이 통치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다. 이신론 범신론은 인간의 사탄의 조작이다.
창조주의 통치 없는 인간의 자의적인 통치가 불행과 비극의 심판을 불러왔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헛된 것의 반복이고
최후 심판의 정점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하게 되면 인간은 유물론과 진화론에 희생되고 만다.
오직 보이는 물질과 권력의 장악만이 전부이고, 진화된 동물의 본성만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왕권신수설이 무너지고 의회 주권 국민 주권이 선언되고 있지만(명예혁명),
얼마나 잔인한 피의 학살이 자행되어 왔는가?
자유혁명의 시초라는 불란서 혁명은 1세대가 성공한 것 같았지만,
2세대는 1세대 혁명가를 참수하고,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를 죽이는 것의 반복이고 연속이었다.
공산혁명도 레닌과 스탈린의 잔인한 대학살과 숙청 속에 세워졌다.
중공도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혁명의 동지들을 다 죽이고 자기만의 절대 왕정을 수립하였다.
인류의 과학과 문명이 발달했다는 대명천지에 군사 구테타와 절대 왕권의 통치가 자행되고 있다.
세상은 왜 날로 악해져만 가는 것인가?
법과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것은 못 가졌을 때의 주의 주장이고,
그들이 갖게 되면 거의 똑같은 현상과 결과만을 양산하고 더 악한 세상을 만들 뿐이다.
하나님과 창조를 부인하게 되면, 유물론과 진화론이 그 답이 되어 악한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
자연은 그대로 있는 것이고, 생물은 미생물로부터 진화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된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가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이 진화론에서는 원숭이가 되어 버린다.
원숭이에게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처음부터 논의할 수 없고
그저 동물과 다름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인간을 동물과 같이 여길 때, 인간의 가치는 동물 그 이상일 수가 없다.
함부로 대하고 미워하고 학대하고 살인하고 개 취급 소 취급해도 할 말이 없다.
약육강식이요 살벌한 전쟁상태의 연속이 되고 만다. 그것이 인류 역사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때 피조물을 섬기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죄악을 양산하게 된다.
로마서 1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하는 짓이 무엇인가?
썩어질 사람을 하나님처럼 받들고, 새와 짐승 기어다니는 동물을 하나님처럼 받들고 있다.
일월성신을 신으로 섬기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어 왔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고,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근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29-31)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하나님과 그 창조를 부인하는 댓가가 무엇인지를 인류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뱀의 유혹과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죄를 낳고 사망을 낳고 심판을 낳고 멸망을 낳고 있다.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하나님이 살리시기 전에는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롬1:18)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90:7-9)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아들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 이전의 땅의 모습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었다.
그 땅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전의 실상을 알게 해주고 있다.
내가 신학대학 3년 다니다가 결핵에 걸려 요양원에서 철학 스승을 만났고,
휴메니즘 실존주의 철학에 빠졌고, 25년만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뒤에
성경 처음 이 부분을 읽으며, 깜짝 놀라고, 깊은 감동에 빠졌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을 떠난 25년 동안의 내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흑암이 깊었고, 혼란 혼돈 무질서의 소용돌이였고, 참으로 공허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실존주의 철학적 진리를 달고 살았지만, 그 어둠과 혼돈과 공허는 내 삶을 짓이겨 놓았다.
그래서 구원은 어둠에서 빛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이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인생, 하나님 없는 정치, 하나님 없는 정의와 진리, 입술뿐인 종교생활,
철학과 헛된 속임수,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
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몰고가고 이끌고 가는 열매들이고 결과물들이다.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세력과 주의 주장과 화려한 양의 옷만을 보고,
속에 든 노력질하는 이리들은 보지 못하고, 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부터 변화되지 못한 자가 누구를? 무엇을? 더구나 교회를, 정치 경제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공부를 많이 했다고, 투쟁 경력을 쌓았다고,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고, 부와 재물이 많다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부터 흑암과 혼돈과 공허에서 변화 받지 못하면, 입술만의, 큰 목소리만의 잔치일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었다.
우리 육신과 인생의 흑암과 혼돈과 공허를, 해결 못하고, 털어내지 못하면,
그 인생은 결국 사망과 멸망으로 끝나고, 영원히 살 곳은 어디냐?
바로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지배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사탄의 권세가 바로 흑암의 권세이고, 혼돈과 공허를, 사람의 마음과 인생에 뿌려 놓는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람을 사로잡아서,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줄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서 가르치고 예배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 공중의 권세잡은 미혹의 영에 빠져,
어둠을 빛으로, 거짓을 진리로, 지옥을 천국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그것을 잘 아느냐? 내가 그렇게 살았고 그것을 실제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빛을 만나고서야, 내 어둠과 혼돈과 공허를 보았고, 깨달았다.
3 “빛이 있으라”(창1:3)
“하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3-5)
우주의 역사는 사람을 살리고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살 때, 자연도 우주도 살아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0-21)
흑암이 깊고 혼돈과 공허의 땅에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살아나듯이,
사람도 그 영혼의 흑암과 혼돈과 공허에, 빛이 비췸으로, 살아날 수 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창세 첫 날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빛이 있으라! 하셔야 한다.
그 빛이 비추이고 밝아져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빛이 있으라 서로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러나 믿지 아니한 자들의 마음은, 사탄의 권세가 혼미케 하여, 그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한다.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
하나님이 주시는 빛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게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빛을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신적이고 초자연적인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춰져야 비로소 어둠이 걷히고 빛을 영접하게 된다.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영역이 옮겨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의 회심을 하게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아무런 변화도 없고 옛 사람 그대로인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들 한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한다.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알아야 하고,
교회를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부패케 함을 알아야 한다.
옛 사람 그대로, 묵은 포도주 그대로, 헌 부대 그대로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뿐이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될 뿐이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야 둘이 다 보존될 수 있다고 하셨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던 땅에, 정말로 ‘빛이 있으라!’의 역사가 있었다면,
‘저녁이 되고’, 곧 흑암과 혼돈과 공허로 살았던 저녁을 인정하고
‘아침이 되니’, 곧 빛으로 새 생명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첫째 날이 있어야 한다.
빛이 비취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첫째 날을 맞이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를 것이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릴 것이다.
내 자신과 인생과 하나님께 대한 이제까지의 모든 관점 곧 패러다임이,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내가 예수 믿고서 죄 사함 받아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이 진리를 살았고 본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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