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로이드 존스, 「내 구주 예수」, 제 1 장 처음 내 영혼에 구원 복음이 들리던 날에 – 영혼 깊은 데서 터지는 찬양 -(김영희)
강대식2022. 2. 16. 15:43
마틴 로이드 존스, 「내 구주 예수」, 제 1 장 처음 내 영혼에 구원 복음이 들리던 날에 – 영혼 깊은 데서 터지는 찬양 -(김영희)
제 1 장 처음 내 영혼에 구원 복음이 들리던 날에 – 영혼 깊은 데서 터지는 찬양 -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눅1:46-55)
- 성탄절 시즌을 맞이하여 이 시기에 우리가 생각하고 기념하는 모든 것은 성육신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마리아는 이 짧은 분량에서 대단히 비범한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핵심 문제 몇 가지를 똑바로 보게 해 준다.
1. 복음에 반응하는 단계들 마리아가 이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어떤 단계들을 거쳤는가? 1)첫째 단계,마리아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그녀는 항의를 했다. 천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1:37)고, 인간적인 수준에서 가능과 불가능의 범주에 갇혀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켰다. 마리아는 자기 앞에 있는 존재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2)둘째 단계,“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이는 복음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주 전형적이고도 특징적인 방식이다. 처음에 복음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에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굴복하고 따라갈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3)셋째 단계,하나님은 사촌 엘리사벳을 통해 천사장의 선포가 사실임을 확증해 주셨다.마리아는 진정으로 이해했고, 마리아에게서 이 위대한 찬양이 터져 나왔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고백한다.
2. 복음이 영혼을 뚫고 들어왔을 때 마리아의 찬양에 담긴 몇 가지 특징 1)마리아가 느낀 감정의 깊이.“내 혼이 주를 드높이며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도다”(눅1:46-47, KJV)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혼soul”과 “영sprit”을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혼은 이성적인 능력을 가리킨다. 영과 구분해서 쓸 때는 지성과 감정, 교제하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리키려는 것이다. 반면에 영은 지각을 담당한다. 할 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지식과 지각은 다르다. 영은 우리가 소유한 능력의 더 고차원의 기능이며 더 고등한 측면이다. 여기에는 예배의 능력도 포함된다. 혹 인간은 세 부분이 아니라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혼의 한 영역으로 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영은 인간 안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리아가 “내 혼”과 “내 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존재의 심연과 중심에서 감동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원의 좋은 소식이 혼에 미치는 영향이다. 사람들이 복음의 본질을 참으로 이해할 때 바로 이런 영향을 받는다. 단순히 ‘노래하는 것’과 마음에서 ‘선율을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르다.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한 모든 사람은 이와 비슷한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103:1)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궁전을 떠나 이런 식으로 세상에 오신 일의 의미를 우리가 참으로 이해했다면, 그 사건의 영원한 중요성과 심오함과 놀라운 성격을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면 어떻게 우리의 혼과 영이 감동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교회에서조차 얼마나 이 성탄 시즌을 잘못 맞이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저 자신에 관해 말하거나 서로에 관해 말하는 시간에 그치고 마는지! 안 된다! 성탄의 본질은 단순히 선의와 친절과 행복의 감정이 아니다.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다면 성탄은 우리의 혼과 영이 감동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2)감정이 드러난 모양.① 흠모의 요소이다. “내 혼이 주를 드높이며”(KjV) “드높이다”는 크고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에 불과한데, 그런 존재가 어떻게 전능하신 주 하나님을 더 크게 위대하게 하고 높일 수 있는가?”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엄에 아무것도 보탤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도록 도울 수는 있다는 것이다. “드높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보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장대하게 드러나고 어마어마한 캔버스에 그려져서 온 세상이 그것을 발견하고 응시하고 그 앞에 절하며 흠모하고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는 깊은 갈망을 심오하게 드러낸 표현이다. 우리의 혼은 주님을 드높이고 있는가? 이 일이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인가?
② “기뻐하다” 이 말의 실제 의미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 어쩔 줄 모르고 그분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내가 크게 기뻐하는 대상이라는 말이다. 세상은 다른 것들을 크게 기뻐하지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내 기쁨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 내 구주이십니다!”
3)왜 흠모하고 찬양하게 될까?마리아는 본인에게 벌어진 일이 주된 이유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하시는 일 때문이다. 교회 특정 분파에서는 마리아를 완전히 떠받들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말한다. 마리아처럼 자신을 잊게 만드는 자기 망각은 하나님이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이래에”(갈4:4) 있게 하셨을 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는 궁극의 시금석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이 역사적 사건 하나님의 행하심의 절정에 감동한다. 그녀는 이 일의 내적 의미를 알아보았다. 구원의 전체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녀의 태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루고자 하시는 큰일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엿보는 수준에서나마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이 노래에 담긴 비밀이다. 기독교의 입장 전체의 비밀이기도 하다. 경배와 찬양, 큰 기쁨과 흠모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이해’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치 있는 찬양은 진리의 이해에 근거한 찬양이다. 우리는 감정을 곧바로 공략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의를 곧바로 공략해서도 안 된다. 감정과 의지는 지성이 어떤 것을 알아보고 난 뒤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마리아의 관심은 자신이 특권을 받았으니 이제 위대하게 될 거라는 데 있지 않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분이 벌이시는 일의 위대함에 있었다.
4)그리스도인의 예배의 핵심.마리아는 하나님이 지니신 속성과 성품 때문에 그분을 흠모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찬양의 본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고, 선물을 주시는 분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두 가지 위험이 있다. 첫째 로마 가톨릭의 흉물스러운 거짓 가르침과 과장이다. 다른 한 가지는 거기에 거세게 반발하다가 마리아가 본 것과 마리아 찬가에서 표현한 내용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드려야 할 찬양과 예배와 흠모의 핵심과 정수를 표현한다. ① 하나님의 위대함과 영광, “내 혼이 주를 드높입니다” 주님을 드높이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없다.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3:14) 이 말씀의 주된 의미는 하나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극진히 찬양받으시리로다”(시4:1) 여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성탄절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마구간과 구유에서 보는 것은 이 위대하신 하나님, 주님이다. 그분을 보는 순간 우리는 올바른 시각을 갖추고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② “구주”는 구해 내시는 분, 지키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도다”(47)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이스라엘을 만나셨다. 구약은 하나님이 백성을 계속 구해 내시는 역사이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이스라엘이 반역하고 죄를 지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원수들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정복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들을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시며, 양 떼의 목자이시다. “하나님 내 구주”.
③ 하나님의 능력,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49),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51) 하나님이 구주이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분의 능력 때문이다. 하나님이 능하신 분이 아니라면 구원하실 수 없다. 마귀의 수중에 있는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는 그 능력이 특별히 필요하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37) 여기에 구원의 보장이 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라고 말한다. 능력! 이것 때문에 마리아의 영혼이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에게는 능하신 분이 계신다.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은 “엘”이다. 강한 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그 이름을 쓰셨다. 하나님이 거기 베들레헴에서 행하신 일은 그분의 능력,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 ④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49) 마리아는 “내가 주님을 높이는 것은 그분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심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이 왜 존재하고, 왜 독생자가 이 세상에 보내졌으며, 왜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가 있었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1:5) 그분은 “소멸하는 불”(히12:2)이시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구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되 완전하게 만드셨다. 그런데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세상이 죄로 가득 찼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악이 펴져 나가는 것을 참으실 수 없다. 이 세상의 신이 다스리는 상태로 내버려 두실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거룩하다. 강력할 뿐 아니라 거룩하다. 구원과 관련한 모든 것이 거룩하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이것을 마리아에게 어떻게 표현했는가?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35) 그분은 아기로 태어나셨지만, 죄와 분리되고 죄인들과 분리되고 죄가 전혀 없는 분이었다. 십자가에서 동일한 거룩함의 요소를 본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벌하시며, 죄를 없애신다는 것이다.
⑤ 긍휼, “그리고(kjv)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50)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기만 하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다. 이 “그리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 긍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와 긍휼은 함께 가고, 은혜가 긍휼에 앞선다. 은혜는 죄인이기 때문에 사랑과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호의이다. 긍휼은 죄가 있을 뿐 아니라 죄 때문에 비참한 상황에 처한 이들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은혜는 보다 일반적이고, 긍휼은 구체적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이 비참하고 곤고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인류를 굽어살피신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구약성경의 역사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3:7) 이 말씀에 우리 마음이 녹고 꺾이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긍휼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영광의 징표들을 다 내려놓은 채 자신을 낮추시고 기꺼이 오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책만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불행, 비참함도 보셨다.
⑥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54-55) 하나님은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곧 오소서 임마누엘”이라고 부르짖으며 이 일을 기다렸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는 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실”(68)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찬가를 부른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도 이렇게 다가갔는가? 깊이 묵상해 보라. 영광과 위엄 가운데서 우리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가라. 그 은혜가 여러분을 이끌어 하나님께 쉼 없이 나아가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