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2 주일설교
본문: 벧후 3:11-14
제목: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베드로후서 3장은 말세에 일어날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두 편의 편지를 쓴 것은,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다.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면서 조롱할 것이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한다.
1.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사람이 되어라.
4절에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하신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 그것이 거룩한 행실이다.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 그것은 경건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다.
거룩한 행실을 앞에 둔 것은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은 거룩함은 경건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서가 그러하다.
불경건에서 불의가 나오는 이치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28)
경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자들이 내거는 경건과 거룩은
바리새인의 누룩이요 사두개인의 누룩일 뿐이다.
사람의 지혜와 초등학문이 만들어낸, 헛되고 외식하는 경건과 거룩일 뿐이다.
참된 경건함으로 거룩한 행실이 나타나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역사와 학자들은 유명 몇몇의 정치인들과 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것처럼 말하지만,
아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나타나심을 목숨 걸고 사모한 소수의 사람들이
긴 역사를 통해 끈질기고 매몰찬 헌신으로 꾸준히 아래로부터 일으켜 성공한 것이다.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가 이끌어 왔다고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도 말했다.
성경적으로, ‘남은 자들’, 그루터기의 ‘거룩한 씨들’이 영과 생명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왔다.
하나님은 제도권의 다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항상 ‘남은 자들’을 통해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
참 교회, 참 기독교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고,
이를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참다운 개혁이고 부흥이다.
하나님과 회복한 관계, 경건함이 없이는, 빛이신 하나님의 빛의 자녀,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들의 거룩한 행실이 없이는,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다.
경건함으로, 세상의 어둠에, 빛이 되어 비추었다.
거룩한 행실로, 세상의 부패와 오염에, 소금되어 씻어냈다.
이 일을 참 교회와 참 성도들은, 제도권 종교와 권력의(쌍두마차), 핍박과 학대와 순교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꾸준히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참 교회는, 남은 자들의 교회는, 역사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초대교회의 그 신앙과 삶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역사 속에서 그 뒤를 이어 전통을 지켜온 이들의 수난과 희생의 기록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없으니 이 작업을 하여 펴낸 귀한 책들을 읽으며 본 받아야 한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경건함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행실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이것으로 만이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2. 하나님의 날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그 날에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하늘은 불에 타 없어지고
지상의 모든 물질들은 뜨거운 불에 녹아져 없어진다.
홍수로 멸망시켰던 세상은 그 날에는 불로 멸망하게 된다.
그것이 구약 예언자들과 주님이 사도들을 통해 예언하신 계시이다.
땅만 보고 살다가 하늘을 잊어버린다.
당장의 현실 문제 해결에 골몰하다가 죽음이 찾아오고 만다.
땅에다 쌓은 보물들, 업적들은, 다 불에 타 풀어지고 없어질 것들이다.
이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에 쌓은 것들만이, 영원하고, 우리의 상이 되고, 영광이 된다.
영이 되고 생명이 되는 진리의 말씀만이, 영원히 살고, 우리를 살게 해준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청교도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눈에 넣고 살았다.
그 천국으로 이 땅의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때, 현실의 감옥에도 갇히지 않는다.
땅의 것만을 생각하고 거기에 몰입하는 자들은 결국 땅의 감옥(지옥)에 갇히고 말 것이다.
하늘을 봐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땅의 것도 얻고,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기업을 얻었다가도, 하늘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다 잃고 멸망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축복과 영광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서는, 하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의 지혜로 해석하는 성경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뒤집어쓴 하늘만, 보게 된다.
그 하늘은, 성경의 하늘이 아니고, 예배도, 헛된 예배만을 드릴 뿐이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5:19)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세상의 모든 것을 얻고 싶은가?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늘의 계산법’, 또는 ‘하늘의 됫박법’으로 사는 사람들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사람들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땅의 계산법’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말씀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서 일어날 일을 사모하는 사람들만이,
성경을 통해, ‘하늘의 계산법’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서, 그 복을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만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믿고 나아가서, 가나안을 얻고,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후손들을 낳았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특권)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이는 그가 하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하늘의 계산법’으로 산 사람들이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골3:1-2,9-10)
‘땅의 계산법’에 너무 익숙해 있는 옛 사람과 그 행위는, 헌 옷 벗듯 벗어 버려야 한다.
‘하늘의 계산법’으로 사는 새 사람을 입고, 그 놀라운 복과 상을 받으시기 바란다.
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새 하늘 새 땅은 새 예루살렘 성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다.
계시록 21장, 22장은 새 예루살렘 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백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더라 ---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21:10-14)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2:21-27)
이곳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나라이고, 새 예루살렘 성이다.
이 성이 내려오기 직전에 일어나는 것이 최후 심판이다.
계시록 20장은 이를 자세히 묘사한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20:11-15)
천국은 의가 있는 곳이라 했다.
의는 하나님의 거룩이 표현된 것이다.
거룩 없는 의는, 거룩에서 나오지 않은 의는, 인간의 조작이다.
힘이 정의이고, 세력이 정의가 된다. 가진 자들의 옳음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가 사람들이 만든 의이다.
가나안을 암흑의 땅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정의사회 구현, 실현! 이렇게 말하며 각종 정치인들은 정권을 잡지만,
그들이 물러갈 때 보면, 남는 것은 모든 불의와 불경건의 오물들 뿐이다.
그에 대해 하늘로부터 심판이 내리는 것이다.
슬프게도 교회 역사는 이들과 한 편이 되어 쌍두마차의 한 말에 속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분별력이 없고 똥 오줌을 못 가리는 교회 무리들은 그 헛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을 줄 모르면, 유대 교회, 로마 교회의 실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복 받기를 구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과 말씀에 불순종하여 저주와 멸망만을 받았다.
새 예루살렘 성에 가 보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세상과 역사가 그렇게 높이 받들던 정치 영웅들, 개혁자들의 얼굴은 도무지 보이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이단시하고 핍박하고 학대하고 불로 태워죽인 사람들이 빛날 얼굴로 보이며,
역사에서는 듣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았던 사람들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난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 성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큰 문, 넓은 길로 가기를 힘쓰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찾는 이도 적은 좁은 문, 협착한 길로 가기를 힘쓰던 사람들로만 채워져 있을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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