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4 주일설교
본문: 고전 9:24-27
제목;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
1.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9:24)
모든 경기에서 1등 상은 한 사람만 받는다.
물론 2 등상, 3등 상도 있다.
그러나 초점과 포인트는 1등 상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다.
은메달, 동메달은 1등을 아깝게 놓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의 성격이 크다.
그들도 금메달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놓친 것이다.
1등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야 2등, 3등도 할 수 있다.
중국 속담에 상을 목표로 해야 중에 이르고, 중을 목표로 하면 하에 이른다고 한다.
신앙도 달음질하는 경주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12:1)
허다한 증인들은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한 증인들이다.
그들을 본받아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할려면,
우리도 모든 무거운 것, 그리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
무거운 것을 지고, 얽매이는 것이 있으면, 달릴 수 없다.
달리는 선수들이 입은 의상과 신발을 보라.
신앙의 경주에서는 평생을 달리니까 필수 요소는 인내이다. ‘인내로서’.
그와 함께 중요한 요소가 ‘동일한 부지런함’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히6:11-12)
약속을 자기 기업으로 받는 것은, 상 받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변함 없이, 굴곡 없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것을 첫째 덕목으로 들고 있다.
이를 위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게으르지 아니할 수 있다.
중도에 소망을 놓치고 잃고 포기하니까 게을러지고 동일한 부지런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또한 믿음과 오래 참음이 없으면 끝까지 소망을 품을 수 없다.
동일한 부지런함, 소망의 풍성함, 믿음과 오래 참음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중요 덕목이고,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는 사람의 중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달음질을 할 때 우리가 바라볼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받을 상은 우리가 경주하며 향해야 할 푯대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2.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오직 한 사람만 받는 승리의 관일지라도 그들이 받는 것은 썩어질 관이다.
그때 뿐이요 곧 잊혀지고 말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들이 몸 바쳐 수고한 것에 비하면 일장춘몽이다.
중요한 것은 이길려면, 이기기를 다툴려면, 다른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을 향한 달음질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숙을 하고 훈련소에 들어가고 하는 것이 절제를 위한 방편이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목표로 하는 상 외에 다른 것들은 다 절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얻을 수 없다.
떡으로만 살면서 말씀으로 살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큰 문 넓은 길, 멸망의 길 가면서,
찾는 이도 적은 좁은 문, 협착한 길, 생명의 길로 갈 수는 없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큰 용, 사탄)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믿음의 선진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였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절제함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절제의 다른 표현은 다른 모든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썩어질 승리의 관이 아니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절제가 없이는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고 그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 없이는 그리스도를 모실 수 없다.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하심으로, 이러한 획기적 변화가,
우리 믿음의 경주에서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3. 향방 없는 것 같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26절)
그리스도를 얻고 상을 받기 위한 절제와 변화가 없다면,
우리의 달음질은 결국 향방 없는 것이 될 것이고,
우리의 싸움은 허공을 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열심도, 달음질도, 방향이 분명하지 않으면, 푯대가 분명하지 않으면,
세상을 향한 정욕의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는 싸움일 뿐이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상은! 원한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달음질 잘한다고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열심이 있어도,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힘써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된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멸망을 당했고, 현대교회 이스라엘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 주님 마지막 분부의 말씀은 ‘가르쳐 기키게 하라’ 였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은,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가르치는, 묵은 포도주가 아니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성경의 계명이다.
‘너희가 들었으나’는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이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해석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주님이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해석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되느니라”(마9:17)
새 포도주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주님의 가르침이요,
사도와 선지자들이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말씀들이다.
새 부대는 주님의 피로 세운 교회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들이다.
성경을 읽더라도,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전통을 따라,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오직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가르침과 해석에 지나지 않고,
낡은 부대에, 묵은 포도주일 뿐이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을려면,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주님의 피로 세운 참 교회에서, 성령의 지혜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참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남긴 경건서적을 통해 검증하며, 성경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쓴 『산상설교』(상,하)를 읽어보시면,
성령의 지혜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성경 해석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로마서 강해』(14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분부대로 ‘가르쳐 지키게’ 하지 않는 교회는, 명목상의 교회일 뿐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고, 성령의 지혜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곳이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이다.
개혁주의임을 표방하는 교회일지라도, 참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경건서적을 통하여,
검증하지 않고,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 된 것이다.
참 개혁자들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다.
그 문은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은 문이다.
로마 교회가 천년 동안 핍박하고 불태워 죽인 사람들이, 들어간 구원의 문이고,
현대 교회도 5백년 동안 외면하고 찾는 이도 적은, 구원의 문이다.
4.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것은, 그 가르침에 자신도 행함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아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국경을 넘어 들어갈 수 없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았으면, 지켜 행하는 것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 행함이 따랐고,
하나님 경외함을 그제서야 인정 받았다.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올바른 믿음은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공하기까지, 천년 동안, 많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당대의 로마교회로부터 고문과 화형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끝까지 지킨 것은,
그들의 믿음이 참 믿음이었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가르침 받아 지켜 행하는 것.
그것은 오직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은, 참된 믿음의 결실이다.
로마 교회가 수시로 유럽 각 지역에서 이단으로 몰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데도,
그들은 로마 교회가 이단으로 모는, 참된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고, 화형을 감내하였다.
그 화형을 보면서 사람들은, 로마교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잔인성을 보았고,
반면에, 참 믿음의 표상을 보았고, 그들의 심금이 울렸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결실을 낳은 것이다.
유명 개혁자들의 거사가 이룬 것이 아니라, 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가, 불태운 몸들이,
그들의 믿음의 행함이, 가르쳐 지키게 하는 행함이, 종교개혁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착한 행실이고, 비추는 빛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들이 흘린 피와 불탄 몸들이, 종교개혁을 통하여, 사람들의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였다.
그들은 평소에도 말씀대로 살아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선한 행실로 사람들을 섬겼다고 한다.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셨다.
이 의인들에게는 영생에 들어가게 하셨고,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라 하셨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셨다.
그리고 옆에 있는 형제 하나에게 안한 것도 내게 안한 것이라 하셨다.
그들에게는 영벌에 들어가게 하셨고,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셨다.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의 차이는 영생과 영벌의 차이이다.
참 믿음이었는지, 입술 믿음이었는지는 행함의 결과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믿음의 행함으로, 착한 행실로 되어지는 것임을 명심하자.
남은 생애 동안 참된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은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 받고, 지켜 행함으로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를 쳐서 복종케 하자.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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