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10/9 주일설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 5:18-21

강대식 2022. 10. 9. 13:47

2022-10-09 주일설교

본문: 엡 5:18-21

제목;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술에 취하면 방탕해진다.

여기서 술은 세상도 된다. 세상에 취해도 방탕해진다.

성령이 없으면 사탄에 취하고 종 노릇하게 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죄와 허물)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면 사탄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자유하고 독립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은 보이지 않으니 홀로 선 줄 착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 풍조를 그대로 따르는 것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서 사탄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을 받지 않고서는 영들을 분별할 수가 없다.

 

진리의 영이 있고 미혹의 영이 있다.

영을 그래서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우리의 말’은 사도의 가르침이다.

진리의 영, 곧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고 바알의 교회일 뿐이다.

 

사도의 가르침, 초대교회의 가르침,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말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으로 믿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만큼 높이게 되고, 순종하게 되고, 아닌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게 된다.

 

초대 교회로부터 그 전통을 이어받고, 로마 교회의 박해와 고문과 화형에도 굴하지 않으며,

13세기 참다운 종교 개혁을 이룬 발도인들 알비인들,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짓 교회, 거짓 목사들에게 그만 속고, 역사를 알고, 현재와 미래를 바로 살아야 한다.

 

성령에 취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말씀으로 충만해진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충만케 해주신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벧전1:2)

 

오늘 본문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은 성령 세례처럼 위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고,

앞 뒤 문맥을 볼 때, 어떤 조건으로 받은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라의 뜻으로 해석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충만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말씀과 멀어지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면, 그 성령의 역사는 가짜다.

오늘 받은 계시와 환상에 취해 성경을 멀리한 사람들이 퀘이커들이었다.

성경은 옛날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니까 현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주관적으로 받은 계시가 다 다르니, 질서가 없고, 기준이 없고, 어지럽고 자유분방하였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경건주의를 낳고, 경건주의는 자유주의를 낳는 것이다.

신비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참다운 경건이 아닌, 모양 위주의 경건주의를 강조하게 되고,

그 경건주의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어서 자유주의 사상을 낳게 된다.

 

자유로운 철학과 문학과 예술은 또 자유주의 신학은,

신비주의 경건주의가 그 주관성과 상대성으로 낳은 산물들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쓴 성경이 무시되고 경시될 때, 그 권위를 상실할 때,

절대가 무너지고, 모든 것은 상대화되고 주관성으로 자유주의가 되는 것이다.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실존주의를 거쳐 필수 코스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낳았다.

 

모든 것은 상대화 되고 내가 좋으면 다이다. 내가 경험한 것만이 진리이다.

탈중심적 다원적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그 특징이다.

절대를 부인하다 중심과 이성을 잃고 다원화되어,

목소리 큰 놈, 이데올로기가 쎈 놈이 왕 노릇한다.

재주가 좋은 놈, 유행을 잘 타는 놈이 스타가 된다.

그런데 그 수명들이 지극히 짧다. 다음 놈이 금새 올라오니까요.

 

오늘날 성령 운동한다는 사람들, 쓰러트리고 예언하고 병 고친다고 요란떠는 사람들,

성경 해석을 보면 제멋대로이고 가관이다.

여기에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들어간 것이다.

 

찰스 피니와 무디, 빌리 그레함의 부흥주의도 정통신학을 부인하며 주관신학으로 자유주의로 갔다.

교회 많이 세우고 숫자 많이 늘리고 강단초청 회심자가 많으면 부흥이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치장하고 선전한다.

 

능력 전도, 전도폭발, 은사 운동, 믿음신학, 셀 운동, 신사도 운동, 빈야드 운동, G-12가 그렇다.

그것이 가짜 성령 운동이요, 가짜 부흥 운동인 것이다.

미국에서 행크 헤네그라프가 그에 관한 책을 썼지만, 그들은 소송 한 번 못 내고 있다.

그들이 가짜고, 증거 부실함을, 너무 확실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게 하고,

말씀으로 살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만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말씀을 기록하여 새언약에 순종하게 하실 수 있다.

주님이 피로 세우신 새 언약으로 살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신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유지하여, 말씀의 사람, 영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 길만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고 만복을 받아 누릴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2. 찬송하며 감사하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5:19-20)

 

술 취하면 노래와 타령이 나온다.

세상 신, 바알 신을 섬기며 바알교 신도가 되어 성공과 번영을 노래하게 된다.

성공의 십자가 번영의 기독교가 되어, 복 자체에 눈이 멀어,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술에 세상에 취하면, 기독교는 현세의 성공과 안녕과 건강만을 갈구하는 무당의 종교가 되고 만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할 수 없다.

세상과 꼭 닮은 시와 찬송이 울려 퍼지고 신령과는 거리가 멀고 영의 찬송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인 생명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거룩함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성령에 취하면,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찬송이 나온다. 감사가 나온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게 되고,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게 된다.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리며 감사가 나오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찬송가는 각 교단이 협의하여 골고루 나눠 가진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 불렀던 찬송들은 거기에 없다.

주류 교단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만이 수록되어 있다.

 

말씀으로 영으로 지은 찬송들이 기름 부음 가운데 교회에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맞는 찬송을 찾을려면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세상의 성공과 번영과 건강에 맞춰진 가사들임을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 가운데서만, 말씀의 충만함 가운데서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다.

그러할 때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범사에 아버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 있다.

 

신령한 찬송과 범사에 감사가 없을 때에는,

염려와 원망과 불평, 낙심과 불안과 우울증과 사망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떠오르는 것은 말씀이 아니고 세상의 철학이요 지혜들이다. 세상 노래들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는 것도,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는 것도,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모든 불의 추악 배약 무자비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주님이 주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화답할 수 없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송과 노래를 주께 할 수 없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이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

 

3.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1)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경외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마음 보좌에 앉으셔야 피차 사랑하고 복종할 수 있다.

내 옛 사람이 보좌에 앉아 있으니 미워하고 싸우고 시기하고 원망하게 된다.

 

참 그리스도인은 회개하고 회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리스도인으로 출생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권능을 받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서로 사랑하라 만인을 사랑하라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영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변화되지 않고서는, 사랑하고 복종할 수 없다.

마음의 주인이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피차 복종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주로 하나님으로 경외하게 되고,

그 경외함 속에서 우리는 피차 복종하게 되는 것.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사랑이고 통일되고 하나 되는 곳이다.

피차 복종이 없으면, 사랑은 공염불로 끝이 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성령이 오셔야 하고, 충만해져야 하고, 그래서,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만이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계명, 하나님 사랑, 둘째 계명,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이웃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만인 사랑이 공염불로 끝나는 확실한 이유이고 설명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의 중개자이지 복의 끝이 아니다.

받은 복을 빛과 소금이 되어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공의이고 정의이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호위한다고 하셨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고,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고,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라 하셨다.

 

그리하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게 될 것이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할 것이다.

역사를 바꾸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에 있음을 말씀해 주신다.

 

여기 내 형제 중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고,

교회를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길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어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