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2권, 4장 하나님 없는 삶 (김영희 요약)

강대식 2022. 10. 29. 13:23

제 4 장 하나님 없는 삶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 1장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인식해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위대한 능력을 측량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어떠한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셨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며,

둘째로 우리를 올려놓은 높이가 어떠한가를 숙고하는 것이다.

그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태와 조건, 즉 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기 전에 우리가 어떠하였는가?

두 번째, 어떻게 해서 그런 상태에 빠져 있었는가?를 살펴 보았다.

 

- 세 번째 원리,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는가?

우리의 일상생활과 삶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여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세상과 마귀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제 육체를 다루고 있다. “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체의 욕심”에 의하여 조종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원죄의 결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뿐 아니라

그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위대하심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지켜보고 계셨으며 전적으로 우리에 대해서 염려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1. 죄 가운데 빠져서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의 상태

1) “허물(들)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오늘날 모든 사람의 삶을 이 두 어휘로 요약할 수 있다.

“허물”은 외적인 범죄를 의미한다. 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어졌다.

두 어휘의 실제 근본 의미는 진실한 것과 정직한 것에서 실족되는 것이다.

“죄들”. 이 말은 매우 포괄적인 말로서 내적 원리로서 생각되는 죄의 모든 증상들을 내포하고 있다.

죄들은 죄(Sin)라는 내적 원리에 대한 외적인 표지들이다.

누구에게나 이 부패한 원리가 있어 그것은 죄들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참되고 의롭고 정직하고 올바른 것으로부터 실족되어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있는 사람의 삶은 그런 방식으로 행한다.

사실상 “그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니 그 사람이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는 것은 허물들과 죄들이다. 그 허물들과 죄들을 가져오는 것은 모두 이 부패한 근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에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 그 부패한 근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것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허물들과 죄들은 이 “육체의 욕심”의 결과이다. 육체의 욕심은 주로 노선을 따라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곧 “육체의 정욕”과 “마음의 원하는 것”이다.

 

4) “육체” - 주로 보편적 의미와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다.

보편적 의미)

① 성경에서는 때때로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말로 쓰여진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더니”

② 우리의 뼈를 덮고 있는 살(신체)을 묘사하기도 한다.

 

특별한 의미) 세부적이며 영적인 면을 함축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 성령에 대해 완전히 대칭되는 것을 “육체”라는 말로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육체는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본성,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몸뿐 아니라 영혼과 도덕과 지적 기능들을 다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 있는 죄 안에 있는 전체 사람을 의미한다.

내 몸과 마음, 감정, 모든 것을 포함한 전인을 내포한다.

② 보다 엄격한 영적 의미로 우리 본성의 감성적 부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본성의 동물적 지체의 작용들만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절에서 “육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대하게 된다. 영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처음에 말하는 육체의 욕심은 전체적인 것, 즉 전인(육체와 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말하는 것은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라는 말의 반대이다.

사람의 본성 가운데 있는 동물적인 지체만을 의미한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육체의 욕심에 의해서 지배를 받으며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에

허물과 죄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욕심은 강한 소원이다. 강한 욕구가 선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보편적으로 성경에서 쓰여지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향한 강하고 긴박한 탐욕을 가리킨다.

사도는 우리가 이 오염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알기 원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그것이 전인과 사람의 지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인식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 그의 마음과 정서와 의지가 다 타락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 본성의 감각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선택할 수 있고,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며 거룩해지기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그것을 두 가지 항목으로 그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인류 전체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

1) “육체의 원하는 것들” - 소원이란 하나의 명령이다.

소원은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일을 하도록 강권하고 충동시키는 긴박한 의지이다.

육체의 욕심은 육체의 원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여기서 육체란 우리 본성의 동물적인 지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성이요 본능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로서 그 자체로는 본질적으로 선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과 사람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다.

 

죄가 드러낼 때는 옳고 선한 것들이 갑자기 통제를 받고, 요구에 있어서 긴박하게 되고

그것들이 충동하여 우리로 하여금 가만있지 못하게 한다. 배고파지는 것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만일 먹고 싶은 욕망이 여러분을 통제하고 육체의 원하는 것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으면

그것은 육체의 욕심에 대한 하나의 표증이다. 즉 먹기 위해서 산다면 그것은 모두 잘못이다.

마시는 것도 갈증을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만 마시는 것은 육체의 원하는 것이 된다.

쾌락은 모두 옳다. 즐거우면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즐거움이 지배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너무 중요하게 되어서 그것에 관해서 사람들과 다투게 될 때,

그것은 육체의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복종적이도록 되어 있었고 제자리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2) “마음의 원하는 것” - 육체의 욕심은 몸의 원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원하는 것”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찰스 피니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육체의 욕심이 마음에도 해당되고 지성과 이해에도 해당된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음”이란 생각하는 모든 말을 대표하는 말이다. 그것은 감정적이고 애정적일 뿐 아니라 이지적인 부분까지를 포함한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생각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 생각한다.

마음에 원하는 것은 그러므로 몸의 원하는 것들과 방불하게 육체의 욕심에 대한 표현이다.

여러분의 관심과 행동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지시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마음의 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나서 무엇을 위해 살든지 그것은 마음의 원하는 것이요 일종의 마음의 욕심이다.

 

① 질투, 시기, 악의, 교만, 혐오, 분노, 성냄은 마음의 욕심의 낮은 수준의 나타냄이다.

육체의 원하는 것들에 표증이 없더라도 흔히 이러한 죄를 짓고 있다.

 

 보다 높은 수준으로 야망은 우리의 본능만큼 강한 힘이다. 권세를 가지고 싶은 욕심, 성공하고 싶은 욕심,

부요하고 싶은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세상이 알았던 사람들 가운데 훌륭한 사람들의 삶이

이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야망은 사람을 충동질하고 지배한다.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행복을 내어버린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 마음의 원하는 것, 현대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욕구,

언제나 그들은 새로운 스릴과 흥분을 찾는다. 대개 특히 잡담에 나타나 있다.

“너 들었니?”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이미 원하는 것에 충동을 받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뽐내고 있다.

중요한 위치에 서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저는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와 논쟁으로 허비했던 시간들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논증과 논쟁과 서로 다툼과 영리에 명석해지는 것을 즐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하나의 욕심이요 마음의 원하는 것이다.

취미나 게임도 옳은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 산다면 그것이 하나의 마음의 원하는 것이 된 것이다.

 

 가장 높은 수준으로 지식에 대한 욕심, 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다. 문학과 예술과 음악 등도 그것에 해당된다.

이러한 것들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또한 그것들이 여러분을 주관하지 않는다는 범위 내에서

또한 그것들이 여러분이 통제할 수 없는 삶을 충동하지 않는다는 한에서 그러하다.

욕심이 마음에 있든, 지식에 있든, 동물적인 지체에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같은 것이며 동등하게 하나님께 대해서 원수가 되는 것이다.

육체의 이러한 욕심을 범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러하다.

죄는 그만큼 깊고 침투적이고 근본적이다.

 

정치가들은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절제하라고 부르짖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간단히 반응을 나타낼 수 없다. 예를 들어 담배 값을 올린다.

안을 발표된 지 한두 주간은 담배 피는 것을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그러나 몇 주간이 지난 뒤 통계자료는 그것이 원래의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사람이 욕심과 원하는 것에 충동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절제할 수 없다.

죄의 교리를 이해할 때에만 여러분은 정치적 행동만을 의지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리석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3. 이와 같은 상황을 다룰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요건이 있다.

그것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다.

토마스 찰머스가 “새로운 애정의 폭발적 능력”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단순히 이 나라와 어떤 특수한 위기를 생각하고 있다면

해답을 얻는 지름길은 이 성경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여러분의 인생의 종말과 전 세계의 종말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또한 하나님과 심판과 영혼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여전히 이 점에 관해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욕심의 상태 가운데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몸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이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그것은 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고 계시며 하실 것이다.

죄! 깊음과 어리석음과 추함과 그 모든 것의 능력이여! 안전한 것은 한 곳뿐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를 앙망하는 것이며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