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6 주일설교
본문: 딤후 4:3-5
제목: 네 직무를 다하라
1.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리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
“때가 이르리니”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반드시 이른다.
때가 차매 여자의 몸에서 주님은 태어나셨고, 40년이 차매 모세에게 천사가 나타나셨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도 반드시 이른다.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온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오신다는 비유이다.
영원할 것 같은 이 세상도 그 날에는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가고
땅의 물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그리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된다.
심판을 받기 위해서이다.
고난 받은 때가 있었다면 축복과 영광의 때도 반드시 온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자는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한다.
때가 되어 이루시기까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나의 기업으로 받아야 한다.
때가 이르면 바른 교훈을 받기 싫어하는 것이 두드러진다고 말씀하신다.
정치가들과 종교인들은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세상은 날로 악해질 뿐 더 나아지지 않아 왔다.
구악은 신악의 악독함에 비하면 항상 순진하고 어리고 미숙하다.
과학과 교육이 더 좋은 사람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알수록 배울수록 더 잔인하고 무책임하고 탐욕스러워진다.
왜 때가 이를수록 더 악해지는가?
그 악의 원천이 인간의 타고난 죄에 있음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인 죄를 인정하지 않고 무수한 좋은 처방을 내린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기독교 교회들마저도 현대인들을 끌어들여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해 죄를 말하지 않고 있다.
죄 대신 상처요 회개 대신 치유를 말하며 상담학으로 설교와 가르침을 채운다.
죄가 없는 곳에서,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허상이고 우상일 뿐이다.
죄를 그대로 두면,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어도, 아무리 정의와 개혁을 외쳐도,
정욕과 탐심으로 인간과 세상은 날로 악해질 뿐이다.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만 사람은 새로워지고 세상은 진리로 개혁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될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자신부터 새로워지고 개혁되어진다.
내가 새로워져야 비로소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새로워질 수 있다.
이 간단한 이치와 진리가 교회에서도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교회에서도 바른 교훈을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상담학과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이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잘도 용납되고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사도들이 전파하고 가르친 바른 예수, 사도들이 받게 한 바른 영 바른 복음은
초대교회를 이어받은 발도인들, 알비인들, 위그노들, 그리고 청교도들을 통해서 어어져 왔고
13세기에는 참 종교개혁이 유럽 전체를 뒤흔들고 새롭게 개혁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16세기의 종교개혁만 알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고,
거기서부터 개신교가 나온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13세기 종교개혁의 열매만 따먹은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다.
13세가 종교개혁에 비하면 16세기 종교개혁은 책과 인쇄술의 보급일 뿐이었다.
루터의 용맹은 13세기 개혁자들의 순교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것에 지나지 않고,
칼빈의 교리의 지식화도 바리새인의 율법화와 다를 것이 없다.
지성은 필수적이지만, 행함 없는 지식화 율법화는 위선과 이기주의만 낳는다.
우리는 루터와 칼빈 이전에는 어거스틴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로마 교회의 연속성만 알고 있다.
로마 교회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운 것 아니다.
로마 교회는 황제가 세운 것이고 처음부터 잘못 되었다.
사람들은 현대 교회 안에서도 정욕과 탐심으로 인하여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들을 채워줄 스승들만을 많이 두고 따르고 있다.
진리의 기준, 스승의 기준은 내 욕심, 내 욕망을 얼마나 잘 채워주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일만 스승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이면서 겉은 양의 옷을 입은 거짓 목사들이 일만 스승들이다.
그들은 참 교회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참 교회의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남긴 경건서적은 읽어본 적도 없고, 멸시하면서,
오직 유명 신학교와 유명 교회에서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배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만 알고 가르치고 있다.
2.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4)
자기 사리사욕을 채워줄 일만 스승들만을 많이 두고 있으니
참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수 밖에 없다.
책을 봐도 그런 류의 책들만을 보고 베스트 셀러에만 귀를 기울인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는 책이나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알고 학자와 책들만을 뒤쫓아 간다.
필요와 만족을 위해 배우고서는 절대 그 진리대로도 살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만 산다.
공자왈 맹자왈 공부해서 과거 급제하여 벼슬을 따고 나서는 탐관오리가 되고
자기들 당파를 위한 싸움에만 전념타가 나라는 망하게 한다. 현대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세상은 허탄한 이야기들로 가득찬 책과 스승들만을 따르며
정의와 공정과 자유를 주장하고 외치지만,
실상은 오직 당파의 이익이요 자기의 치부와 권력장악에만 몰두하며
세상과 나라를 날로 악하고 망하게 만들어 간다.
왜 인간 세상에 억울한 참사들이 일어나는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자리에 앉아 할 일은 안하고 안할 일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똑 같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뽑아놓고 희생 당하고 함께 망하는 길로 간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모든 이론과 사상을 사로잡아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진리를 살 수 있다.
진리를 사람들의 사상과 주의 주장으로 알고 있는 한
그 사람은 배운 것으로 당파싸움과 극단적인 횡포를 주고 받을 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1)
진리는 그리스도의 존재요, 그 존재를, 내가 살아야 할 생명으로,
내가 걸어야 할 길로 붙들기 전에는,
진리는 알 수도 없고 더더군다나 진리는 살 수가 없다.
신학을 하다가 치우고, 철학을 하다가 돌이켜서,
성령으로 거듭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깨달은 것이,
“진리는 이론이 아니고 존재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과 아버지 스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일만 스승은 가려운 귀를 시원하게 해주면서 자기 사욕을 계속 따르게 한다.
“미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로마 교회의 금언이다.
아버지 스승은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는다.
아버지 스승은 제자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다.
사도들이 가르친 전통을 따르며, 참 교회와 개혁의 역사를 바로 알고,
참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남긴 경건서적들에 귀를 기울이며,
참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거짓과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고 세상 교훈을 따르는 자신과 따르는 스승들을 정리해야 한다.
돌이키고 돌아서라고, 인사도 하지 말고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런데 참과 거짓이 분별이 되고 알아야 결단을 하지요.
세상 일에만 바쁘지 말고 믿음의 선조들이 남긴 경건서적에 눈을 뜨기 바란다.
자기 육체를 위해 심다가 썩어질 것만을 거두지 말고,
성령을 위해 심어 영생을 거두는 일에 시간을 내고 헌신하시라.
3.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
신중하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잠을 자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적극적으로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계속해서 깨어 있으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일에 신중할 때 고난은 피할 수 없이 함께 한다.
디모데는 전도자로 일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직무였다.
전문 사역자가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인은 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직무이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5:12)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도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직무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도 잘 몰라서 또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된다.
예수 믿고 때가 오래 되었으면 마땅히 말씀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로 계속 머물게 된다.
어린 아이에게 줄 것은 젖 밖에 없다. 말씀의 초보가 그것이다.
갖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과는 다르다.
젖을 사모하되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단단한 음식을 사모해야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다.
내 직무를 다하는 것은 직임을 지키는 것과 같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9:22-23)
내가 멱우리 빈집에서 15년 동안 살 때 꼭 붙들었던 말씀이고 순종한 말씀이었다.
모세와 같이,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과 같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유진하고 행진하면서
우리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가 주신 직임을 지키고 직무를 다해야 한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여호와의 구름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뭘 이루겠다고 인간적인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애쓰는 것,
그것이 직무를 다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구름이 머물고 있는 동안은 주신 진영에서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도 교회 개척하고 5년 동안은 빛을 내가며 전도하며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시골 멱우리 빈집으로 인도하셨을 때는 깊이 깨닫고 15년이 되도록 유진하였고 머물렀다.
여호와의 구름 아래 유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청교도들을 만나게 하셨고,
그들의 경건서적들을 읽으며 요약하며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느새 단단한 음식을 먹이는 선생이 되게 하셨다.
모든 일에 신중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내 직무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진영에 머물러야 한다.
머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서둘러 일하는 것부터 배워봐야 허당으로 끝이 난다.
빚내어 교회 개척하고 2년에서 5년이면 문을 닫게 된다.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가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바로 구름 아래 머무는 것이다.
구름이 떠오를 때까지는 일 년이든지 몇 년이든지 머물며 단단한 음식 먹기를 배우고 자라야 한다.
구름이 떠오를 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여도 결코 늦지 않다.
구름 아래 머물 때나 행진할 때나 중요한 것은 내 직무를 다하고 직임을 지키는 것이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20 주일설교, '마지막 추수', 고후 5:10 (2) | 2022.11.20 |
---|---|
11/13 주일설교,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 히 6:11-12 (0) | 2022.11.13 |
10/30 주일설교, '자족하는 마음(경건의 능력)', 딤전 6:6-8 (0) | 2022.10.30 |
10/23 주일설교,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 5:16-18 (2) | 2022.10.23 |
10/16 주일설교, '예수를 주로 받았는가?", 골 2:6-8 (0) | 2022.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