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4 주일설교
본문: 약 1:27
제목; 정결한 경건
1. 정결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을 경건하다고 한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그와 같이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다.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능력은 부인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은 경건의 능력이 있다.
경건의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이기 때문에 이웃 사랑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그 능력을 부인한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웃 사랑으로 연결되고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위선이고 외식의 경건일 뿐이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 책망의 말씀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의 대표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유대교의 대표들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도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대표가 그러하면 그에 속한 자들도 다 그러할 뿐이다.
대표들의 행실을 보면 그가 속하고 대표하고 있는 교회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책망을 모든 유형의 교회, 모든 시대의 교회에 적용해야만 한다.
현재의 우리 시대의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유대교와 로마교회를 그대로 닮아 있다.
이 대표들과 그것을 좋게 여기는 주의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 무슨 짓을 했느냐?
“화 있을진저”. 축복을 노래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왜 저주를 받게 되었느냐?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어도,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이 맹인된 인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래내고 낙타는 삼키고 있었다.
작고 보잘 것 없고 표나는 것은 지키고, 더 중요한 핵심은 꿀꺽 삼켜 버린 것이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다.
“눈먼 바리새인들이여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회칠한 무덤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서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것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고 조상의 분량을 채우는 자들이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모든 율법의 완성은 이웃 사랑에 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크고 하나되는 계명의 첫째와 둘째로 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 사랑과 둘째 이웃 사랑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따로 할 수 없는 계명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보이는 이웃 사랑으로 증거되고 귀결되어야 한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교회 경력이 많다고, 직분이 높다고,
정결한 경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이 없다면, 그 경건은 겉으로만 꾸민 외식과 위선의 더러운 경건일 뿐이다.
이웃 사랑도 자기 부모와 형제자매와 자기 자녀에게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도 다 하는 것이다.
나와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오직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이다.
물론 자기 가족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악한 자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저주를 받고 지옥의 판결을 받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더러운 경건이다.
겉만 정결해 보일 뿐 외식이고 위선이고 더러운 경건인 것이다.
정결하고 더럽지 않은 경건은 그 시대의 가장 환난 당하는 사람의 대표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고아들과 과부들을 그 환난 중에 돌보라는 것은 모세 율법에서부터 하나님이 강조하는 바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24:9)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진정으로 여호와께 복 받는 길이 나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 일을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하시는 것이다.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인 것이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고 이르실 것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신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교회 생활에 충성을 다하고 열심을 내었어도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한 것이 없다면
저주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고 저주 받은 염소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 25장과 이사야 58장은 우리 믿음의 행동강령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6-7)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8)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를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는 자라 하리라”(10-12)
자손들까지 복을 받고, 역사를 새로 쓰며 황폐된 곳, 파괴된 기초를 다시 세우는 축복이
오직 구제에 있음을 교훈 받아야 한다.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의 설교를 친히 듣게 하며
그의 모든 친족들이 구원을 받게 한 것이 기도와 무엇이었는가?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 보좌에 상달 되었던 것이다. 하늘 보좌를 움직였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
우리에게 경건의 기도와 교회 생활은 있어도, 없는 것이 어려운 이웃사랑의 구제이다.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교회 생활에 없는 것이다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없는 것이다.
2. 정결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자기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세속에 물들고 만다.
세속에 물든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물에 젖어 산다는 것이다.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세속에 물든다는 것은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고 영적 예배를 드릴려면
필수적으로 믿는 우리가 행해야 할 일이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물들어 있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변화가 없다는 것은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회심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행할려는 의식이 없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사랑하느라
온 맘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가져와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온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곧 육신의 생각은
말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곧 영의 생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가 없다면 출발부터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어도 하루 아침에 전적인 변화가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끊임없이 싸우고 갈등하는 가운데
점점 영의 생각으로 사는 부분이 많아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일생동안 이루어가야 할 성화이다.
그래서 경건은 연단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연단의 산물이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가 무엇인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받아 하나님을 헛되어 섬기는 것이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사로잡혀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는 것이다.
율법의 초등교사에게서 제자훈련 받고 그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가르침 받으며 만족하고 안심하다가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 되는 것이
바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인 것이다. 그것을 버려야 한다.
경건은 범사에 우리를 유익하게 하고,
신구약 성경은 금생과 내생에 이루어질 약속으로 가득차 있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때의 축복과 영광이다.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면서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생활로
연단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인 것이다.
성경을 즐거워하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말씀대로 지켜 행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경 없이 성령 없고, 성령 없이 성경 없다.
성경 없이 영의 생각 없고, 성경 없으면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일생을 허비하게 된다.
기도와 구제, 경건과 이웃 사랑은 한 몸이고 한 계명인 것을 명심하자.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임을 잊지 말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임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남은 생애,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 되고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자가 되자.
내 빛이 새벽 같이 비치고 치유가 급속한 자가 되고, 기도 응답 속히 받는 자가 되고,
내 공의가 내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내 뒤에 호위하는 자가 되자.
물 댄 동산 같고, 오래 황폐된 곳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자손들과 함께 쌓는 자가 되자.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5/28 주일설교,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요일 3:23-24 (0) | 2023.05.28 |
---|---|
5/21 주일설교, '권능의 하나님', 벧전 5:10-11 (0) | 2023.05.21 |
5/7 가정주일설교, '경외함, 피차 복종', 엡 5:18, 21 (0) | 2023.05.07 |
4/30 주일설교, '좌우에 날선 검', 히 4:12-13 (1) | 2023.04.30 |
4/23 주일설교, '의의 면류관', 딤후 4:6-8 (0) | 202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