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주일예배
본문: 딤전 1:12-17
제목: 직분을 맡기심
1. 충성되이 여겨 주께서 직분을 맡기셨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충성’은 신실과 같은 의미이다.
믿음도 충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의미에 따라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충성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충성 되어 여겼다는 것은 신실하고 믿을만 하였다는 것이다.
충성은 참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에게 그렇게 충성을 다하느냐 이다.
인간이 왕이나 나라를 위해 하는 충성도 역사적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하나님께 충성은 이러한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선진들의 열전은 충성자들의 열전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은 충성을 다하였기에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명하는 가나안으로 갔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도, 억울한 감옥생활 중에서도, 충성을 다하다가
대애굽 제국 총리로 세움 받고 이스라엘을 구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충성을 다하였다.
주님이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을 택하신 것도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충성스런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충성되이 여기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마음에 합했기 때문이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3:15)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셔서 능하게 하신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하시지만 내가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은 하나님 100% 나 100%인 것이다.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 했다.
질그릇인 내 속에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시고 능력자로 하나님은 세우신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고
풍부에도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는 고백이 마음 중심으로부터 나오게 하신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2.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시고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하면서도
바울은 자기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 변화 되기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아야 한다.
죄책감 속에 죄의식으로 내내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를 잊지 않음으로 현재의 변화를 감사하게 되고
충성되이 여겨 맡기신 직분으로 무엇을 이루었더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부분 바울 같이 극심하진 않았을지라도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고 못할 짓을 많이 하였다.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용서하여 주셨다.
죄는 반드시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
순서를 잊지 않아야 한다.
회개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믿는 이 위대한 변화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
이 놀랍고도 위대하며 획기적이고 전인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께로부 난 것이다.
회개와 회심은 반드시 획기적이고 전인적인 변화여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변화여야 한다.
슬렁슬렁 회개 없는 믿음, 구원 없는 천국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한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시 않겠느냐”(눅11:13)
그들이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는
그 많은 무리 중에서 나와야 한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지 못하면, 평생 예수 믿고서 지옥 가는 원통한 일을 겪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
죄인 중에 괴수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모르고 행한 것들이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4-15)
우리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이다.
주님의 미쁘심은 최고도로 신실하고 믿을만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지 행위의 선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행위의 선함은 은혜로 구원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들이다.
그 변화의 열매, 선한 행실의 열매가 없다면, 그 회개와 믿음은 가짜이다.
우리 주님의 은혜는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게 하시는 은혜이다.
믿음도 은혜로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사랑이다.
첫째가 없으면 둘째가 없듯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 없으면, 둘째 이웃 사랑도 없다.
휴메니스트들이 노래하는 만인 사랑이 외식으로 끝나고 마는 원인이고 이유이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사랑도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이 없으면,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할 수가 없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주님 대답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의 이웃은 정성을 다해 돌봐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 곤경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친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다.
이웃 사랑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지만,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찬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죄 가운데 살며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주의 은혜로 구원 받아,
‘그 은혜가 왕 노릇하는 믿음과 사랑의 사람이 되었도다’,
찬양하는 우리가 되자.
3. 직분을 맡기심은 후에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6)
내가 전에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 였을 때에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불 속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을 텐데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시고 구원해 주셨다.
그 죄가 무엇이든 일체이다. 모든 죄이다.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내가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일체 참으심을 보여주신 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게 된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먼저 구원 받은 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신성한 의무이다.
후에 영생을 얻게 된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갖난 아이에서 자라가야 한다.
주의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직분을 맡은 자가 본이 되면 사람들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자라게 하는 주역이 될 것이다.
믿음의 열전에 기록되는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상과 영광을 받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또 하나 귀한 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7)
그가 쓴 편지 열 셋이 신약 성경이 되었고,
그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선교 업적을 세웠는데,
그 모든 영광을 오직 주의 은혜와 영원하신 왕께 돌리고 있다.
우리 믿는 자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업적이 많으면 교만으로 패망을 불러오기 쉽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다.
그분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죄 사함도 축복도 영광도 이룰 수 없다.
내가 받은 축복과 영광에 대해서,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야 한다.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던 바울을, 아니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직분을 맡기셨다.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인 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주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으로 넘치도록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자.
후에 믿게 된 자들의 본이 되고 길잡이가 되고 선생이 되자.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아버지 스승들이 되자.
오늘 본문은 내가 25년 만에 주님 은혜로 돌아 와서 사명을 확인하고자 금식하고 있을 때
성경 중에서 위로 튀어올라 오는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기도 하다.
사명에 대한 응답으로 알고, 모든 것 다 정리하고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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