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

확신은 참된 거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존 라일

강대식 2012. 2. 6. 19:54

확신은 참된 거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존 라일

 

(딤후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래로는 무덤을, 뒤로는 자신의 지나온 사역을, 그리고 앞으로는 장차 다가올 위대한 심판 날을, 삼중적 관점으로 조망하고 있다!

 

1) 아래로 무덤을 보고 있지만,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마지막 제례를 포함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죽음의 일격만 맞이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사람은 가장 숙연해진다. 무덤은 탄식을 지아내는 싸늘한 곳이다. 두렵지 않은 척해도 소용없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2) 뒤로 자신의 지나온 사역을 돌아보고 있지만,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지금 그는 용사로서 말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하여 움츠리고 뒤로 물러나는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항하는 싸움을 다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상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사람으로 말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경주를 다 달렸다. 아무리 거칠고 가팔라도 나에게 주어진 경주를 다 마쳤다. 아무리 어려워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 길이 지루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결승점이 보인다.’

 

“믿음을 지켰으니”. 한 사람의 청지기로 하는 말이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영광의 복음을 굳게 지켰다. 사람의 전통과 혼합하지도 않았다. 내가 스스로 고안한 무엇을 더해서 복음의 단순성을 해치지도 않았다.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용납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한 명의 용사로서, 경주자로서, 청지기로서 나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선한 양심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 선한 양심으로 죄가 씻어지는 것도 아니다.

 

3) 앞으로 올 심판의 위대한 날을 바라보되, 전혀 의심이 없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지금 머뭇거림이나 의심 없이 말한다. 이미 면류관을 받은 사람처럼 전혀 주저함이 없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그 면류관을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확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강한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심판 날에 자기가 맞게 될 일을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확신은 너무나 중요한 주제임에도 오늘날 쉽게 간과되고 있다. 너무나 어려운 주제여서 성경과 상관없이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진리와 오류 사이에 난 길은 특히 더 좁은 통로이다. 참된 거룩과 확신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더 큰 확신을 누린다.

 

1. 확신에 찬 소망은 참되고 성경적이다.

 

확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적극적인 은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가 반드시 추구하고 구해야 한다. 회심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평안을 얻어 자기 죄가 용서받았고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의심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두려움에 미혹되거나, 걱정스러운 질문들로 고민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요컨대,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와의 허다한 싸움으로 힘들기는 해도, 두려움 없이 죽음을 대망하게 된다. 당당하게 심판을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진리로 여기지 않고 거부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전혀 터무니없는 말로 확신을 부인한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노골적으로 말한다. “죄 용서에 대한 신자의 확신은, 허구이고 불경건한 확신이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단의 주요한 오류”라고 한다.

 

우리 가운데에도 대다수의 세속적이고 생각없는 그리스도인이 확신의 교리를 반대한다. 참된 신자 가운데에서도 확신을 위험한 교리로 여겨 거부하고 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확신을 추정 정도로 여긴다. 확신하지 않고 자기 영혼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과 긴장을 가지고 사는 것을 겸손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회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아주 해로운 생각이다.

 

물론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확신을 고백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진리는 항상 오용된다. 모조품이 없었던 적이 없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항상 광신자와 열광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은 분명하고 참된 실재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단지 진리가 오용될까 두려워 진리를 적용하는 데 소극적이어서는 안된다.

 

욥은 말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다윗은 말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이사야의 말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17).

 

사도 바울의 말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고후5:6).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골2:2). “온전한 믿음”과 “소망을 끝까지 확신하는 것”(히10:22,6:11).

 

베드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요한, “우리는 --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이상의 본문에서 단순한 “희망 사항”이나 “신념” 이상의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설득과 확증과 지식의 말에서 비롯된 확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 명확한 의미를 통해서 이 말씀을 본다면, 확신의 교리가 진리로 다가온다. 섣부른 추정으로는 베드로와 바울, 욥, 요한의 삶의 자취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낮은 마음을 가진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기 상태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깊은 겸손과 강한 확신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본다. 영적 확신과 교만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본문이 말하는 확신에 찬 희망 가운데 사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많다. 사도 시대로만 이런 특권을 제한시킬 수는 없다. 이 땅에서도 성부, 성자와의 깊은 교제 가운데 살다 간 신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자신과 화해한 하나님의 얼굴빛을 거의 항상 누리며 살았다. 이런 삶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을 분명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결연한 약속을 주저없이 믿으며, 식언치 않으시는 그분의 말씀과 맹세를 의지하여 용서와 평화를 확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아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되었다. 새 언약의 중보자와 진리의 성경을 의지하여 확신하는 것이다. 신자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 때문에 그분을 붙드는 것이다. 결국 확신은 다름 아닌 장성한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을 두 손으로 꼭 붙잡는 대장부의 믿음을 가리킨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한 백부장이 가진 믿음이다(마8:8).

 

바울만큼 확신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한 바울은 자신의 타락과 죄책을 깊이 절감했다(딤전1:15). 하지만 자신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넓이와 길이를 더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휘장 안에 있는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을 기억했다(히6:19). 자신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신 분의 쉼 없는 중보와 공로와 말씀을 기억했다. 바로 이런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토록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고 주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주께서 나를 지켜주시니 나는 결코 파선하지 않을 것이다.”

 

2. 확신에 찬 소망에 이르지 못한 신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저는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슬픔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기진한 하나님의 자녀를 낙담시키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할 일은 확신을 느끼는 것뿐이라는 인상을 남기도 싶지도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도 바울이 누렸던 확신의 희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믿고 용납받을 것에 대한 어렴풋한 희망을 가지는 것과,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넘치도록 풍성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는 믿음, 즉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그분을 진실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많은 염려와 의심과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예전에 써 넣고 붙이지 못한 편지가 있듯이, 마음에 은혜가 기록되었지만 아직 성령이 확신으로 봉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부의 상속자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로 살다가 어린아이로 죽으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구원을 받았지만, 결코 산 희망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그의 기업을 통해 얻는 참된 특권조차 알지 못한다.

 

영광스러운 복음이 주는 자유로움을 박탈해서도 안되고, 합당한 몫을 삭감해서도 안된다. 사람에게 있는 교만, 그리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진 구원의 문을 더 좁고 협착하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주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질을 보신다. 상한 갈대로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씨도 꺼뜨리지 않으신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비록 믿음이 겨자씨보다도 크지 않다 해도,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고 그분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성화에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받으셨다는 사실을 평생 온전히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더해 가는 두려움과 의심으로 힘겨워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단순하고 하찮은 믿음이라 해도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통해 강력하고 풍성한 위로를 받으며 천국에 이르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안전하게 포구까지 데려가기는 하겠지만, 돛을 전부 올리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 힘차게 항해할지는 의문이다.

 

믿음과 확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면 도움이 된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그 위에 피어난 꽃이다. 뿌리가 없으면 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뿌리는 있지만 꽃이 없는 경우는 있다.

 

믿음은, 떠미는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 뒤로 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의 옷깃을 만진 불쌍한 여인이다(막5:27). 확신은, 자신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는 살인자 앞에서도 잠잠히 서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치는 스데반이다(행7:56). 믿음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는 회개하는 강도이다. 확신은, 온몸이 종기로 얼룩진 채 재 가운데 않았으면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욥19:25), “비록 그분이 날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믿고”(욥13:15)라고 말한 욥이다.

 

믿음은,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하는 외침이다(막9:24). 확신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 누가 정죄하리요”하고 외치는 자신만만한 도전이다(롬8:33-34).

 

믿음은 생명이다.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사망과 생명 사이의 간극을 묘사하거나 헤아릴 자가 누구인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전9:4). 하지만 생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약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괴롭고, 웃음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확신은 생명을 능가한다. 확신은 건강과 강력과 권세와 생기와 역동과 에너지와 장부다움과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특권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의 문제이다. 평화냐 평화가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큰 평화냐 아니면 작은 평화냐의 문제이다. 처음의 모습 그대로냐 아니면 장성한 분량에 이른 모습이냐의 문제이다.

 

믿음을 가졌는가? 정말 잘하셨다. 믿는 자는 복을 받되, 삼중의 복을 받는다! 깨끗함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지옥의 권세가 넘보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을 가졌다 하면 훨씬 더 좋다. 더 볼 수 있고, 더 느낄 수 있고, 더 알 수 있고, 더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신11:21).

 

3. 확신에 찬 소망을 간절히 추구해야 이유가 있다.

 

모든 신자가 최고의 은사를 사모하고, 무엇이 되었든 그보다 못한 것에는 만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주는 복을 받을 만한 만조의 때를 놓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낮고 비천한 상태로 스스로의 영혼을 방치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5:1).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1) 지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평화를 위해서라도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의심과 두려움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가 누리는 행복을 빼앗아 간다. 불확실함과 걱정은 건강, 소유, 가족, 애정, 직업 등 우리 삶 전반에 아주 나쁜 영향을 가져온다. 영혼에 끼치는 영향은 더더욱 나쁘다. 하지만 확신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일종의 힘겨운 매임에서 벗어나, 큰 위로로 나아가게 된다. 삶에서 가장 큰 일이 이미 해결되었다. 완성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외에 다른 일, 질병이나 빚 같은 일은 상대적으로 소소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확신에 힘입어, 신자는 고통 중에서도 인내한다. 상실감 속에서도 잠잠하다. 슬픔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악한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 만족하게 된다. 확신을 통해 그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확신 한 방울이 쓴잔을 달콤하게 해준다.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해준다. 거친 순례의 길을 평탄하게 해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비취 준다. 항상 발아래 든든한 반석이 있는 것과, 두 손으로 붙잡을 확실한 것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동행하는 든든한 벗이 있고, 마지막에 다다를 확실한 본향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확신을 통해 가난과 실패도 견딘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4).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함3:17-18). 하나님의 자녀는 확신을 통해 자기에게 닥친 극심한 상실도 견뎌 낸다. “평안하다”고 느낀다(왕하4:26). “비록 내 처지가 내 육신이 바라는 것과 같지는 않지만, 내게는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는 영원한 언약이 있다”(롬6:9,삼하23:5).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확신에 찬 사람은 감옥에서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다. 가장 극심한 어둠에서조차 노래한다. 모든 일이 자기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기뻐한다(욥35:10,시42:8). 헤롯의 감옥에 있던 베드로처럼, 확신에 찬 사람은 내일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잠을 잔다. “내가 평안이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4:8). 천국에는 자기가 당한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있음을 항상 기억한다(고후4:17).

 

확신은 고통과 병중에 있는 사람을 붙들어 준다. 잠자리를 편하게 해주고, 임종의 머리맡을 지켜 주어 임종을 맞는 신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 집이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73:26).

 

죽음의 순간에 확신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위로는 너무나 중요하다. 임종의 순간만큼 확신이 소중한 때도 없다. 죽음이 엄몰해 오는 순간에 “나는 안다”, “나는 느낀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영혼이 이 땅을 떠나야 할 때, 확신만큼 우리를 강건하게 해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공동기도서에 있는 병자의 심방을 위한 아름다운 글이다.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강한 성루가 되시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이제와 또 영원토록 당신의 요새가 되십니다. 하늘 아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당신이 건강하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기를 바랍니다.”

 

2) 확신은 능동적으로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여 은혜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분명한 확신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확신의 희망이 결여된 신자는 자신의 상태를 의심하고 살피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과민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불안, 의심, 의문, 갈등, 타락에 휩싸여 지낸다. 하나님을 위해 일할 시간은 없다. 분산되지 않은 관심과 집중만이 항상 가장 큰 성공을 가져 온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누구도 사도들만큼 수고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수고하려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리스도의 일이 그들의 양식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삶을 드렸고, 자기 자신을 드렸다. 편안한 삶과 건강과 세상적인 위로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확신에 찬 소망 때문이었다.

 

3) 확신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확신이 그리스도인을 더 확고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일관성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불만족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세상과 절연하기를 주저한다. 새사람을 입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옛 사람의 모든 길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한다.

 

4) 확신이 가장 거룩한 그리스도인을 낳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확신은 부주의함과 나태함을 낳는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말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말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용서를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힘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하나님의 화해의 얼굴빛을 가장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이 복된 위로를 잃을까 떨며 조심한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지 않는다.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네 가지 물음이 있다.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영원하신 팔을 느끼고, 날마다 여러분의 영혼을 가까이 이끄시며 “나는 네 구원이라”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싶은가? 사는 날 동안 포도원에서 힘써 일하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고 싶은가? 모든 사람 중에서 담대하고, 심지가 곧고, 한결같고,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나고 싶은가? 탁월한 영적 마음을 가진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확신을 소홀히 여기고 낮은 수준의 믿음으로 만족한 것이, 여러분의 모든 실패와 평강이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모든 은혜의 토양과 뿌리가 되는 믿음은 빈약하고 궁핍하게 내버려 두면서, 여러분에게 있는 은혜가 쇠약해져 가고 아련해진다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믿음에 자라기를 힘쓰라. 구원의 확신이 넘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을 구하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라. 여러분은 많은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을 것이다. 계획을 바꾸라. 다른 길을 택하라. 주님의 팔을 더 온전히 의뢰하라. 은혜로우신 구주께 와서 여러분의 영혼과 죄악을 그분께 맡기라. 그러면 곧 다른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더해질 것이다

 

4. 확신에 찬 의망을 얻기가 어려운 몇 가지 원인이 있다.

 

1) 가장 흔한 이유는, 칭의 교리에 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알게 모르게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의롭다 함과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듯하다. 므두셀라처럼 오래 산다고 해도 결코 더 나아질 수 없다. 우리는 구속받은 죄인, 의롭게 된 죄인, 새롭게 된 죄인이다. 구속받고 의롭게 되고 새롭게 되었지만, 항상 죄인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죄인일 뿐이다. 칭의는 완전하게 성취된 사역으로 정도나 단계가 없다. 성화는 완전하지 않고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완전하지 못하다.

 

2) 확신이 결여된 또 다른 주된 이유로, 은혜안에 자라가는 데 게으른 것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회심만 하면 그 이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구원받은 상태를, 몸을 뒤로 제치고 앉아 마냥 행복해 할 수 있는 안락의자처럼 생각한다. 달란트처럼 사용하고 계발하여 진보를 나타내도록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다. 이런 사람은 “성장하고, 더욱더 풍성해지고, 믿음을 더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살전3:12,4:1, 벧후1:5,3:18,빌1:9).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 항상 우리의 목적이고 갈망이 되어야 한다. 매년 생일을 맞이할 때나 새해가 시작할 때마다 “더욱 많이 힘쓰라”는 말씀을 우리의 표어로 삼자(살전4:1). 지식과 믿음, 순종, 사랑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삼십 배를 남겼다면 육십 배를 남기기 위해 힘써야 하고, 육십배를 남겼다면 백배를 남기기 위해 힘써야 한다(마13:2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다. 이는 또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부지런함과 확신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6:11).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 청교도의 금언, “믿음은 들음을 통해서 더 견고해져 간다. 하지만 행함이 없이는 믿음의 확신에 이를 수 없다.”

 

3) 신자에게 확신이 부족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는 삶은 양심의 평화를 현저하게 저해한다. 양심의 평화와 일관성 없는 삶은 함께 할 수 없다. 담대하고 단호한 태도로 세상을 거부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따라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주저하고, 거룩하고 영적인 삶으로부터 뒷걸음질하는 등의 결단성 없는 삶은, 영혼의 정원을 병해충으로 들끓게 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진에 들여놓은 한 명의 아간이 여러분의 손을 무력하게 할 것이다. 성령의 증거를 얻고 싶으면, 날마다 성령을 좇아 파종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지 않는다면, 기쁨으로 하나님의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삶의 방식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선한 삶을 부지런히 추구하기만 하면, 확신의 여명이 밝아 와 여러분의 마음을 비춰준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119:165).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1:7).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3:18-19).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바울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게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키려고 힘썼다(행24:16).

신앙의 기초에만 머물지 말고 완전으로 나아가라. 확신은 신자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진보가 있도록 날마다 기도하라. 여러분이 누리는 평강은 믿음에 비례한다. 이 복된 근원을 경작하라. 물론, 단번에 확신에 이르지는 못한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다. 우리는 힘들게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얻은 후에 의심이 가끔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 지금 우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다. 우리 안에는 죄가 남아 있다. 육체는 끝까지 성령을 거스릴 것이다. 우리의 육체 외에도, 예수님을 시험했고 베드로를 무너뜨렸던 강력한 마귀가 있다. 그러나 낙망하지 말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아무리 총명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잠시 동안 확신을 잃어버릴 수 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확신은 가장 예민한 식물이다. 날마다 매시간 깨어 잘 지켜보고, 물을 주고,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확신이 있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라. “확신을 소중히 여기라”.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라. 말을 타고 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닥쳤다가, 걸어서 가는 것처럼 천천히 떠나는 것이 영적 어둠이다. 온 줄도 모르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영적 어둠이다. 떠나갈 때는 느릿느릿 천천히,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떠나간다.

 

무엇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괴롭히지 말라. 사소한 나쁜 습관이나 작은 죄악을 경솔히 다룸으로써 성령을 힘들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동행하는 사람이 가장 큰 평화를 누린다. 주님을 가장 온전히 따르고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을 추구하는 신자가, 가장 확신에 찬 소망을 누리고 자신의 구원을 가장 분명히 확신한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다. 확신은 때때로 강건하고, 강력하고, 영웅적인 믿음에 대한 상급과 면류관으로 주어진다. 확신은 하나님의 성령이 말할 수 없이 분명한 빛을 영혼에 비추셔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이전에 드리워져 있던 의심과 두려움을 흩어 버리시는 것이다”(홉킨스주교).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왜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결론 내리는지 알 수 없다. 튼튼하고 굵은 가지뿐 아니라 포도나무의 어린 눈도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받는다. 이처럼, 강건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연약한 믿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신자는 감사함이 마땅하다. 은혜안에 자라가기를 힘쓰는 동안에도 이미 자신이 받은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헨리 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