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은 하나님의 섭리의 가장 큰 축복/ 존 플라벨
회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가 제공하는 가장 큰 축복이다.
이 세상에서 섭리가 그 영광스러운 빛을 가장 찬란하게 드러내는 때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심을 돕는 기회와 수단과 도구로서 작용할 때이다. 야곱은 벧엘에서의 하룻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창48:3). 야곱처럼 다른 성도들에게도 각자의 벧엘이 존재한다.
회심은 두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젊었을 때는 악하고 불경스러운 삶을 일삼다가 나이가 들어 회심을 경험하게 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경건한 신앙 교육을 통해 비교적 심령이 부드러운 어린 시절부터 뚜렷한 징후 없이 알게 모르게 신앙을 갖게 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조명, 책망, 자복, 그리스도의 영접, 보증과 같은 성령님의 뚜렷한 사역이 동반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런 징후가 불투명하거나 얼른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구원 사역의 실재와 증거가 명백한 이상, 회심 당시의 상황이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가 회심을 유도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면서도 은혜로우며 매혹적이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순간 빌립이 나타나, 그의 병거에 함께 올라탄 뒤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섭리는 그런 상황을 마련해 내시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행8:26-30).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왕하5:1-4).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침입해서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아 왔다. 나아만의 아내는 그 아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한 것이 틀림없다.
멜키어 애덤스의 <유니우스의 생애>를 보면, 젊은 시절의 유니우스는 악명 높은 무신론자였다.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대중 폭동 때 그는 목숨을 부지하는 사건을 겪었다. 그 일은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 그후 집으로 돌아간 유니우스에게 그의 아버지는 성경을 읽어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요한일서를 읽기 시작한 그는 성경을 읽는 동안 초자연적인 권세와 능력이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그는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기에 이르렀다.
라바터는 독일과 전쟁을 치렀던 스페인 군사들 중 많은 수가 독일 도시와 마을의 경건한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전한다.
로버트 볼턴(1527-1631, 영국 청교도 설교자이자 고전학자)은 휼륭한 학자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경건한 신자들을 비웃던 불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경건한 피콕(Peacock)과 어울리면서 죄를 뉘우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유능한 일꾼이 되었다.
때로는 우연히 눈에 띈 종이 한 장도 회심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웨일스에 살던 한 목회자의 경우가 그랬다. 시장의 노점상이 싸 준 포장지가 퍼킨스의 <요리문답>의 한 장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 한 두 줄의 글귀를 읽고 결국에는 회심을 경험했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루터의 책을 읽고 회심을 경험한 독일 목회자가 많다. 가장 놀라운 것은 목회자의 망각이나 실수조차도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회심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어거스틴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던 도중에 본래 준비했던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처음 의도와는 달리 마니교의 잘못을 논박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청중 가운데 피르무스라는 사람을 회심시켰다. 그는 어거스틴의 발 앞에 엎드려 오랫동안 마니교를 섬겨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경건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간수의 영혼이 구원받게 된 경우도 있다. 경건한 목회자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덕분에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종종 일어나곤 한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 덕분에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있다. 장난삼아 설교를 들으러 갔다가 진정한 회심을 경험한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사탄의 악의와 인간의 사악함을 통해 영혼을 회심시키기도 한다.
나는 그 일을 직접 목격하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했다.
1673년, 다트머스 항구에 버지니아로부터 ‘폴’이라는 이름의 배 한 척이 입항했다. 배에는 스물셋의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그 배의 외과의사였다. 그는 항해 도중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마귀는 우울증을 이용해 그 가엾은 청년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자살 충동을 억제하셨다.
그러나 주일 새벽에 형제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준비했던 칼을 꺼내 자기의 목을 그었다. 목의 상처만 해도 깊고 컸는데 비참한 삶을 확실하게 끝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또 다시 칼을 뱃속에 쑤셔 넣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나뒹굴었고, 잠에서 깨어난 그의 형제는 황급히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했다.
급히 달려온 의사들은 목의 상처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목의 상처를 꿰맨 뒤 깁스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날 아침,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나는 그가 몇 분 안에 숨을 거둘 줄 알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볼 요량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다른 무엇을 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당신의 현재 심정을 간단히 말해주세요.”
그는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성경이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그런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자살은 모든 살인 중에서도 가장 중한 범죄에 해당했다.
그는 자신의 헛된 희망을 포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심령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와 불행을 한탄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살은 큰 죄이지만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을 주시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회개와 믿음이 본질과 그 필요성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내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더니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부르짖으며, 나에게도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와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그의 마음을 녹여주셨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다시금 간단히 요약해주고 방문을 나섰다.
나는 이제 세상에서는 그를 두 번 다시 못 볼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하루 종일 죽지 않고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했다. 그리스도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아무 것도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믿음에 관한 가르침을 요구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주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죄와 다른 모든 죄를 뉘우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어요.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죄가 얼마나 악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혐오스럽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저는 너무나도 더러운 죄인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주님, 저의 불신앙을 용서해 주소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자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한 저를 과연 용서해 주실까요?”
“그리스도의 보혈은 심지어 그분을 죽인 사람들의 죄도 덮어 줍니다. 그들의 죄는 당신의 죄보다 훨씬 큰 죄였습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뜻대로 처리해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와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의 상처가 크게 벌어졌다. 의사들의 소건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의 그의 요청에 따라 다시 그를 방문했다. 그의 상태는 몹시 심각했다. 나는 그와 함께 기도했다. 그때 복부에 난 상처가 벌어졌다. 상처 구멍으로 위장이 검푸르게 변색되어 불거져 나온 데다 그 마저 칼에 베인 상태였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사는 위장의 상처를 꿰매고 온습포로 처치한 뒤 다시 몸 안으로 밀어 넣고 피부를 봉합했다. 그러고는 그의 운명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다.
놀랍게도 목에 난 상처와 복부에 난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 그리고 육체의 상처보다 더 위험했던 영혼의 죄까지 온전히 치유되었다. 나는 그가 회복되는 동안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고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지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뜻하지 않은 기회를 통해 죄인들의 영혼을 각성시켜 영적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을 물론, 그러한 깨달음을 완전한 상태로 이끄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롬11:33)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레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욥26:14)
회심의 날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막중한 은혜가 주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는 건강과 부귀와 명예와 즐거움을 허락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구원을 허락한다. 세상에는 섭리를 통한 온갖 축복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원의 축복은 말할 수 없이 귀하다. 구원의 은혜는 가장 크고 힘든 어려움을 뚫고 주어지는 은혜 중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엡1:19,20).
구원의 은혜는 황금이 발 밑의 흙보다 귀한 것처럼 다른 모든 은혜에 비해 질적으로 탁월하다(계3:18).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서 비롯된다. 구원의 은혜는 구원을 확실히 보장한다. 회심했다는 것은 돌이켜 보면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이고, 앞을 바라보면 구원을 얻게 되리라는 확실한 표징이다(히6:9).
구원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이다. 이 은혜는 부모, 남편과 아내, 자녀, 재산, 명예, 건강, 심지어는 생명이 사라져도 영원히 머물러 있다(요4:14).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일을 특별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구원의 섭리는 세상의 모든 목회자들과 하늘의 모든 천사들조차도 행할 수 없는 사역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구원의 섭리와 관련된 것이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마땅하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3장, pp 6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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