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청교도 그 기원과 계승자들

강대식 2010. 11. 11. 13:02

Ⅴ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생명의 말씀사

 

1966년  헨리 제이콥과 제일 회중교회

                                                                         

1. 청교도의 정의

청교도란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대단한 혼란이 있었다. 그러한 혼란에는 많은 요인이 있었다. 다니엘 닐의 <청교도의 역사>는 혼란을 일으킨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 회중교회와 침례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20세기에 상당한 위치를 자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랑하면서, 그들의 분리주의 기원을 과소 평가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출세한” 개인들의 경우에서 자주 보듯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합께 작용하여 청교도라는 말의 정의 문제를 큰 혼돈으로 빠트렸던 것이다.

 

개략적인 정의를 한다면 약 1570년까지 청교도들이란, 교회 치리와 예배를 어느 정도 수정하기 원하는 영국 국교회 내의 늘 비판적이고 가끔씩 반역적인 사람들을 의미했다. 그들은 국교회 회원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가 로마와 제네바 중간에서 멈췄다고 생각하면서, 의식과 규율 등등의 일에 있어서 보다 더 철저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헨리 제이콥과 “제이콥 신봉자들”은 사실상 참된 독립교회나 회중주의를 시작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은 분리주의자들과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독립파들은 영국 국교회가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예배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1640년까지는 본질적으로 국교회였던 청교도의 원조를 보게 된다 그들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 다음에 장로주의 청교도들을 보게 되는데 그들도 역시 분리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회중주의는 헨리 제이콥에 의해 1605년쯤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이 마음 문을 열어 놓고 경직되지 않았으며 항상 귀를 기울여 성경으로부터 새로운 증거나 주장 그리고 예증 들을 들을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1640년 이후로는 상황이 아주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청교도와 같은 보편적이고 복합적인 어휘 대신 장로파, 독립파, 침례파 같은 어휘들이 쓰여지게 된다.

 

2. 제이콥의 책을 통해 본 그의 견해

1604년 제이콥은 <영국 국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증언에서 발췌한 이유들>이라는 책을 썼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믿음과 규율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인간의 어떤 전통 없이도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2) 영국 국교회의 사역과 예배 의식들은 개혁이 필요하다. 3) 그리스도 이후 200년 동안의 그리스도 교회들은 교구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회중 중심의 교회들이었다. 4) 신약은 특별한 교회 정치 형태를 보여준다. 5) 이 교회 정치 형태는 사람에 의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므로 다른 어떤 형태도 합법적이 될 수 없다.

 

그는 1605년에 제임스 1세에게 올린 “세 번째 겸허한 상소문”에 참여한다. 그들은 회중 가운데서 “목회자와 장로와 집사들”이 나오기를 원했다. 그리고 인간의 전통을 강요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정부에 대핸 충성서약을 기꺼이 하고, 나머지 영국 국교회와 형제애의 친교를 유지하며 모든 의무들을 감당할 용의가 있었다.

 

이때쯤 제이콥은 <기독교의 원리와 기초>라는 글에서 참된 가시적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리스도의 참된 가시적 교회 또는 대리자적 교회는 특별한 회중으로서 신자들의 완전한 영적 연합이며, 그 지체(구성원)들에게 믿음의 모든 수단들을 행사할 권한을 직접 그리스도께 부여받는다.” 그는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후에도 분리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 내의 각각의 회중들은 주교나 감독, 또는 시찰이나 노회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체의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1605년경의 그의 입장이었다. 1611년 다른 책에서 “교회의 통치는 언제나 사람들의 승낙을 얻어야 합니다.” “복음 아래 있는 참된 교회는 여러 회중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 한 회중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교회의 신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로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들을 선택할 권한과 능력이 있다. 이것은 교황이라는 오염된 통로를 통해 전달되는 영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3. 제이콥의 항변서 요약

제이콥과 몇몇 사람들은 1616년 런던의 사우스워크에서 회중교회를 설립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이 강연을 하고 있는 1966년으로부터 정확히 350년 전이었다. 제이콥은 같은 해에 교회의 충고와 승낙을 받고 설교자들 중 몇 사람의 지원을 받아 <영국 국교회의 교리에 동의하지만 약 28개 항목에 대해 성령의 증거 안에서 반대하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으로 된 고백 및 항변>이라는 책을 썼다. 몇 대목을 인용한다. “우리는,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가시적이고 진정한 교회의 본질과 핵심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자원하여 모인 것임을 믿는다. 또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시적 교회란 보통의 여러 회중들이 아니라, 한 독립된 회중들의 모임인 참으로 영적인 통치기구이다.” “설교 목회자를 두지 않고 설교문을 읽는 것으로 대치하는 것은 잘못이다. 목회자가 부지런히, 바르고, 분별력 있고,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적용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미리 정해진 공기도서를 모일 때마다 부단히 암송하고 고백하여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주며, 거룩한 열심이나 참된 경건이나 진지한 거룩함을 도모하거나 하나님의 다른 은사들을 그리워하지 못하게 한다.”

 

4. 제이콥과 제일 회중교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

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이해되는 것을 행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한 것을 보여주었다. 2) 완고함에 대해서 경계하게 해 준다. 우리는 서로 인내해야 하며 정직한 사람들도 서로 다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견해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 냉정한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1971년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 신학에 젖어든 과정;

그는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교회에서 자랐다.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청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책을 대단히 열심히 탐독했다. 그들은 청교도들의 책을 인용했고, 때로는 그들의 설교를 뽑아 도용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정한 관심은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청교도와 그들의 저작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생생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이런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그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내러냈다고 주장한다. 내픈의 <튜더왕조 시대의 청교도주의>에 동조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이다.

청교도주의는 태도요 정신이다. 틴데일은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는 또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났다. 이것 역시 비상한 행동이었고 당국자들의 눈에는 지극히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다.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싶은 열망에서 한 일이었다. 그는 독일로 가 루터 등의 도움을 얻어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다.

 

이 두 행동들은 당국의 태도에 대한 청교도의 전형적인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틴데일 시대로부터 이 정신, 이 자세, 이 사조가 계속 드러났다. 헨리 8세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쏟았는데, 그 일이란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할 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황과 그 권위를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다. 헨리 8세의 카톨릭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변덕스런 여러 가지 조치들은 전형적인 청교도적 자세를 다시 한번 자극하여 드러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신앙 진리를 확신했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었다. 크랜머 등은 잉글랜드에 머물면서 그 모든 조치에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조치에 불복하여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건너가야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일스 커버데일(성경 번역으로 유명한 사람)과 존 후퍼, 힐스 등이었다. 이 사람들은 대륙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들은 불링거의 영향을 받았고, 취리히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츠빙글리와 제네바의 존 칼빈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자였다. 그는 의식 문제나 성직자의 복장 문제에 있어서 아주 결연한 자세를 보여 그것을 다 바꾸어 버렸다. 이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을 크게 받아 로마 카톨릭 교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훈의 오류에 눈을 떴고 그것을 반대하고 배격했다. 그러나  이제 이 대륙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종교적인 의식주의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며, 단순히 교리를 바꾸고 거짓된 로마 카톨릭 교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실제 차원에서도 이행되어야 하며,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청교도주의의 핵심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요점이다.

그들은 누가복음 9:62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쟁기를 손에 잡은 자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일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잠시 후 영국에 돌아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헨리8세가 즉위하고 있는 동안 내내 큰 핍박을 받았으므로 대륙으로 오고가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들의 영향력과 그 가르침이 보다 더 개방적으로 나타난 것은 에드워드 시대였다.

에드워드 통치 시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교회 정치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주의의 관점은 진보적인 관점이요 발전적인 관점이요 전형적인 “카톨릭적” 관점이다. 반면에 청교도의 관점은 이러한 것들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정적 관점이다. 국교회에서는 언제나 이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 즉 교회는 그 체험과 지혜로 계속 발전해 나가고 성경의 교훈을 새롭게 인식해 나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개념은 교회 정치와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발전과 첨가를 가져온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아닙니다.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충돌은 필연적으로 특히 감독에 대한 관점에 차이를 가져왔다.

감독은 지금까지 행해 온 방식대로 계속 통치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청교도는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륙의 교회 통치 형태를 선호했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람들이 대륙에 갔었느냐 가지 않았었느냐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크렌머도 리들리도 래티머도 잉글랜드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메리 여왕 시대로 오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녀는 1553년부터 1558년까지 통치했는데, 참된 프로테스탄트들은 대륙으로 도망쳤고, 잉글랜드에 남아 있던 래티머 리들리 크랜머 같은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윌리엄 휘팅엄(William Whittingham)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잉글랜드 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을 작성했다. 그는 연도(Litany, 일련의 탄원기도로 사제 성가대 등이 선창하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형태임)를 빼고, 예배시에 중백의를 입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이 교회에 입교하려면 먼저 믿음을 고백하도록 한 하나의 훈련 체계를 도입했다. 그는 목회자나 감독, 설교자, 장로, 집사들을 임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추방자의 교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집되었고 출석하는 거의 모든 예배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리처드 콕스였다. 휘팅엄은 이 계획서를 작성하였고 존 녹스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 지명되었다. 문제는 콕스와 녹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콕스는 강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반대하면서 “저들은 영국에서 행한 것같이 행한다. 저들은 영국 교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존 녹스는 “주께서 그 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얼굴을 가지도록 허락했다.”고 했다. 여기서 영국 교회 대 그리스도의 교회, 여기서 국교도와 청교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한다.

결국 존 녹스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어 제네바로 갔는데, 칼빈이 그를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스코트랜드 교회에서 꽃을 피우게 된 많은 교훈을 배웠다.

 

영국에서는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성직자 계층 밖에 있는 사람들이 런던에서 작은 교회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런던은 특히 16-17세기에 매우 큰 도시였으며, 메리 여왕 때는 독립파 교회들이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에 의해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하던 일은 메리 여왕 시대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의 연속이라고 지적했다.

 

1558년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했다. 새 여왕은 이복 자매인 메리 여왕과는 달리 참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곧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자기 주장을 하며, 자기는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감독 지명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초기에 반대했던 의식들을 그대로 보존시킬 것을 주장했다.

 

대륙에 함께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전형적인 국교도인 파커 대주교 리처드 콕스. 에드먼드 린달, 존 주웰 등은 그들이 만일 공직을 거부한다면 엘리자베스는 그들 대신 로마 카톨릭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복음을 전파할 자유가 있고 교리도 바르므로 만일 이러한 의식들에 대한 태도 때문에 교회 내에 있는 공직들을 거부한다면, 자기들의 영역을 카톨릭교도들에게 넘겨주는 격이 되고 교회 전체는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견해는 달랐다.  토머스 샘슨, 마일스 커버데일, 존 폭스, 로렌드 험프리, 레버 등은 여왕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이겨내자”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수동적인 저항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했다. 의식들과 다른 문제들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계속 투쟁해 나갔다.

 

1563년에 유명하고 중차대한 “성직자 회의”가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장은, 교회 예배 의식에서 제네바식 가운을 사용하고, 대신 중백의를 벗자는 것이었다. 중백의는 카톨릭의 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반대한 것이다.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성자의 날”도 폐지하고 세례받을 때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 표 차이로 이 견해는 지고 말았다. 58:59로. 청교도들은 이 회의에서 정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싸움을 하였다. 예복에 대해서 계속 투쟁했다. 그래서 1563년부터 1567년 사이에 예복 분쟁이 있었다. 이때부터 청교도(퓨리탄)이란 이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s)이라고 불렀었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청교들은 “이러한 문제와 영역에 대해 세속 권세가 권위를 갖는 것이 옳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의 두 번째 논리적 단계였다. 교회의 일들은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중립적인 일의 영역에 대한 공권력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제 대원리와 논쟁의 골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563년부터 1570년까지 이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패트릭 콜슨은 아주 재미있는 말로 국교회주의는 일종의 “개혁 카톨릭교로서 온건과 중용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그들은 가능한 최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히 청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륙의 제세례파로부터 들어온 영향들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일부 청교도들로 하여금 극단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 어려운 메리 여왕과 핍박의 시대에 그처럼 우정을 나누고 친구 사이가 되어 함께 동조했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분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직책을 맡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거절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투쟁했다. 여왕은 감독들에게 이 사람들을 제어하라고 했다. 직책은 이들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직책을 맡는 것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마음의 첫 자리에 오기 쉽다. 그들은 점점 안주하기 시작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부자가 되었다. 감독들은 그때 부유했고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망명자로서 함께 대륙에 있을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의견일치를 망각하고 말았다. 규율이 최고가 되었다. 규율을 지키고 질서를 지켜야 했다.

 

1570년에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케임브리지의 토머스 카트라이트와 관련된 일이다. 그는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전체를 제기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시작한 셈이다.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국가 교회 개념 자체를 완전히 불식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왕과 정부 관련자들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위해서도 지체하지 않는 개혁”을 말하고 또 글을 썼다. 보다 근본적이고 참된 청교도주의가 장로회주의와 분리주의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여전히 영국 국교회는 장로교회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고, 후자는 영국 국교회를 포기했다.

 

1570년대말과 1580년에 들어와서 그러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1590년대에는 더욱더 명백해졌다. 1593년에 존 페리와 헨리 바로우 등의 사람들이 분리주의적인 가르침과 행위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다.

 

드디어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이 된다. “일천 명의 탄원서”라는 대단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올렸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빴다. 가련한 청교도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네델란드로 갔고, 1620년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가 되었다.

 

영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속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훈과 설교를 해나갔는데, 이는 리처드 십스, 존 프레스턴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저작집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왕인 찰스 1세는 순전히 영적인 싸움과 열정에 정치적인 요소를 개입시켜 청교도들로 하여금 다시 어떤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 싸움은 1640년까지 계속 되었다. 왕과 청교도들 사이에 공공연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공화정치와 크롬웰의 통치 시기를 불러왔고, 이때 국교회 제도는 폐지되었고, 잠시 동안 장로교회가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주춤하던 회중교회가 다시 서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1662년에 대추방이 일어난다. 이것으로 인해 국교도적 청교도주의는 종식을 고하게 된다. 존 오웬은 독립파가 옳다고 확신하고 그 전해인 1661년에 떠났다. 1640년대에 코머스 굿윈은 독립파를 지지하고 나섰다.

 

대추방으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생활 터전에서 추방되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제 공식적인 비국교도가 생겨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영국 국교회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 속에 청교도주의를 심으려는 시도는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실제적으로 결론 지어진 것은 1663년이었다.

 

그동안 필그림 파더들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회중교회를 형성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방식을 세우는데 합의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언제나 장로교회나 독립교회로 발전되어 나갔다.

 

요약하면, 청교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다 프로테스탄트였으며 16세기 말엽까지는 사실상 모두 칼빈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고 칼빈주의자였으며 국가 교회를 믿었다. 이것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인가? 참된 차이는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국교도들은 언제나 “카톨릭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포괄적인 교회, 하나의 국가적인 연관을 가진 교회를 믿었다.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의 핵심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의식들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갔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청교도와 국교도 사이의 차이는 국제적인 시각과 한 국가적인 시각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녹스와 청교도들은 국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국교도들은 국내에만 있어서 국내적인 사고방식만 갖고 있었다. 리처드 콕스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국 교회의 얼굴”이었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국교도는 역시 전통과 관습과 계속성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계속성을 강조했다. 영국 국교회는 “중간 교회”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들은 개혁교회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라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계속성과 전통!

청교도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반면, 국교도는 이성을 끌어들였다.

청교도들은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하는 반면에, 국교도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강조점을 선포할 자유만 얻는다면, 포괄적인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차이이다.

 

실제 영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교도는 예배의 신령성을 강조한다. 국교도는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배의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청교도는 교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모인 교회라는 개념은 청교도 사상에 있어서 핵심과도 같다. 그러나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청교도는 죄를 색출해 내어버리는 것이나 엄격한 교회 훈육을 믿었다. 국교도는 외면적 일치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1662년 이후 300년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에 복종하는 일보다 차라리 추방당하는 것을 택했던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회주의 안에서 발견된다고 저는 주장한다. 특히 존 녹스에게서 말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분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비국교도와 독립파, 침례교도들 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토머스 굿윈이나 존 오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와 교회론을 중심적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에게서도 같은 방법의 본질적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청교도적 사고 방식의 완벽한 실례이다.

 

오늘날 국교회적 사고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침례교 연맹, 영국 회중교회, 메소디즘과 청교도주의를 기원으로 하는 기타 교회들이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라 국교도로서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다. 은혜의 교리를 크게 강조하고 목회 신학에 강조점을 두며 청교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존경할지라도, 첫 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우리는 청교도주의의 다른 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그들이 교훈의 위대한 자료들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1972년 존 녹스- 청교도의 창시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타락하고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성경적인 기독교로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은 불완전하고 충분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일어선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들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종교개혁을 부인하고 극단적으로 간 사람들이 제세례파들이다.
그들은 결국 이단의 그룹이 되고 말았다.

**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1) 청교도주의는 믿음의 태도요 정신이다.
그는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불타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청교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만난 장애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그는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 당시에는 감독들의 승인과 허락을 받지 않고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청교도주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행동은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난 것이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싶은 열망에서 그는 그렇게 했다.
독일로 가서 루터 등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두 행동들은 당국에 대한 전형적인 청교도의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2) 미국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끌어가는 두 정신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청교도 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개척정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개척정신도 청교도에게서 나왔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미국을 이끌어가는 정신은 청교도정신이다.

3)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을 쓴 양낙홍 교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 시대는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나 체험이 없는 피상적 복음주의가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다. 무언가 좀더 강력하고 전반적이며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강한 역사를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교회사에서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던 민족들에게 나타났던 대각성 혹은 참된 부흥이 절실히 요청된다.

교회사상 가장 신앙 좋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성경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진지하게 구원을 추구했으며 헌신적이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청교도시대는, 과거 역사속에서 기독교가 가장 순수하고 깊었고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가장 능력있고 열매가 풍성했던 시대였다.

청교도들의 영적 각성의 결과, 19세기의 부흥과 세계 선교의 원동력이 마련되었고
그 덕에 유라시아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오늘 예수를 믿고 있다.
17-18세기 대영제국의 국력과 19-20세기 미국 문화의 원천이 바로 청교도신앙이다.
모든 문명의 근저에는 정신적 사상적 근거, 종교적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막스 웨버도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은 기독교정신이었다고 한다.
그 기독교정신의 원천이 바로 청교도 신앙이다.

4) 교회를 소생시키고 기독교를 새롭게 부흥시키려면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를 소생시키고 기독교를 부흥시키자면 이전 시대 그런 역사가 일어났던 시대로 돌아가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었는지를 우리는 연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역사를 통해 도전과 격려, 영감을 얻어야 한다.
기독교가 청교도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다.

5) 청교도들의 특징은 교회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개혁되기를 원하였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필그림 파더들이 된 것은 1620년이었다.
영국의 제임스 1세(1603년 즉위)의 핍박을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간 사람들이 필그림 파더들이다.
수많은 청교도들이 이민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네델란드로 갔다.
(제임스 1세는 킹제임스 버전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청교도 핍박자였다)

** 청교도의 창시자는 존 녹스이다.

1) 청교도의 창시자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서 청교도의 정신을 배우고자 한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가 되었다. 한때 그는 존 녹스 경으로 알려졌다.
존 녹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선조들 중에 귀족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또한 그를 추천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1503년, 1504년, 1513년, 1515년?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재능 때문이었고 특히 그의 회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해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했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경험했고, 로마 카톨릭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세인트 앤드류를 점령하고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갔을 때, 존 녹스도 붙잡혀가 거의 2년 동안 프랑스 군함에서 노예로 일을 했다. 이것은 가장 참기 힘든 체험이었는데, 그는 이 고통을 받으면서 그러한 삶의 가혹성과 지독한 잔인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전생애에 흔적을 남겼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건강을 해쳤고, 건강 때문에 끊임없이 고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할 때에 궁정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나이로 죽자 “피의 여왕” 메리 여왕이 영국 왕이 된다. 녹스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제네바의 존 칼빈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메리 여왕이 죽고 1558년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다음 해에 스코틀렌드에서 위대한 일을 시작했고 1572년 그곳에서 죽기까지 계속 거기서 사역했다.

존 녹스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품 속에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칼빈보다 더 있었던 것 같다. 교회가 카톨릭으로 하나가 되어 있던 당시 존 녹스와 같은 사람은 신랄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2)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키가 작은 사람들과 작은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현대의 표준으로 보면 외모적으로 특출한 데가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육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를 추천할 만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가지 뛰어난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눈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능력이었다. 칼빈은 학자였지만 그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놀라운 정력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데모스테네스가 웅변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행동, 행동, 행동”이라고 했다.

3) 녹스는 겁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러 번 스코틀렌드에서 도망쳐 잉글랜드나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핍박과 큰 위협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지혜와 주도 면밀함의 원리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자신이 스코트렌드에 있었으면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임을 그는 알았다. 조지 위샤트와 패트릭 해밀턴 등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는 그같이 사형에 처해져 희생당하는 것은 일을 진척시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때로는 머물러 있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도망치는 데 더 큰 용기를 필요할 수 있다.

4) 그는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이상은 결코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5) 그의 용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혼자 되는 것, 혼자 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의 영웅적인 성품을 녹스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6) 녹스는 매우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한 특징은 열열함이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녹스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많은 잉글렌드 군대보다도 녹스의 기도와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신하요 대사였던 랜돌프는 녹스와 그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 한사람이 한 시간 동안 하는 말은 500개의 트럼펫이 계속 귀에 불어대는 것보다
더 많은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녹스가 한 설교로 전체 상황이 변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영주들과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굴복할 준비가 되었을 때,
녹스는 설교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여 전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 칼 라일은 존 녹스를 “청교도주의의 대제사장이요 창시자”라고 했다.

1) 녹스는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독립성에 있어서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였다.
정의상 청교도란 독립적인 사람,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다.
청교도는 결코 “기성인”이 아니다.
“종교의 기성화”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모든 면의 기성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뜻한다.

“기성화된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떠한 삶의 영역에 대해서도 언제나 권위자들의 편에 서며,
이제까지 이루어진 일과 상태 편에 선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다.

청교도는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결코 “기성화된 사람”이 아니다.
독립성과 독창성, 스스로 성경을 읽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이다.

2) 녹스는 청교도주의의 주도원리들을 명백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 및 성경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우선한다.

청교도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 권위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녹스의 주도 원리이다. 만일 성경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고, 그것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3) 두 번째 주도원리는 “철저한”(뿌리와 가지) 개혁을 믿었다는 것이다.
교리의 개혁에만 멈추지 않고 개혁이 실제의 영역에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약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교회(“새로운 형성”)를 만드는 것이었다.

존 녹스는 말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특히 성례를 집행할 때 성경에 명시된 규율을 가감 없이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종교 의식들을 고안하거나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종교를 만들거나 고안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종교를 가감 없이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신약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사도들이 행했던 대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덧붙여서도 빼서도 안 됩니다. 또 미사는 가증한 우상숭배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주의 성찬을 사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4) 녹스는 이 원리들을 적용했다. 이론적 또는 학문적인 청교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다.
청교도주의를 하나의 사상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가르침들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청교도주의를 배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참된 청교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녹스가 존 후퍼보다 탁월했던 부분이 이것이다. 후퍼는 자기가 믿는 것에 등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후퍼는 감독으로 임명받아야 할 때, 자신은 관례적인 예복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게 갇히게 되자 굴복하고 예복을 입었다.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 녹스는 그 당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공기도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게시판에 발표하거나 자기는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5) 녹스는 신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 교회의 본질과 규례 및 의식을 양심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뛰어났다. 중요한 사항 한 가지는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지배하에서 해온 관행이었고 개혁된 국교도들도 지킨 관행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으라고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존 녹스였다. 이렇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실행에도 옮겼다.
이것이 실제의 청교도주의이다. 이것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존 녹스가 지도력을 발휘하여 행한 또 다른 혁신은 성찬 때 쓰는 면병 대신 빵을 사용한 것이다. 녹스는 그러한 일을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6) 잉글랜드 청교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되었다. 토머스 칼라힐은 녹스가 미국 청교도주의의 창시자라고 한다. 녹스는 1776년의 미국의 독립전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16세기의 스코틀렌드나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는 유순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한 사람, 엄격한 사람,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바로 존 녹스이다. 마르틴 루터도 같은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영웅적이고 거센 성격의 소유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일으키셨다.

7) 존 녹스의 마지막 임종을 그의 딸이 이렇게 기록했다.
정오쯤 되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린도전서 15장을 큰소리로 읽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세 손가락으로 영과 혼과 몸을 표시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내 처음 닻을 내렸던 곳을 찾아서 읽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었습니다. 10시쯤에 저녁 기도문을 읽었을 때 의사가 기도문을 들을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과 모든 사람이 내가 그 기도문을 듣는 것처럼 듣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겠습니다 저 하늘의 소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짧게 ‘이제 때가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용사가 들어가 그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을 때 하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음에 틀림없습니다.

 

 

 

 

 

 

 

 

 

 

 

 

 

 

 

 

 

 

 

 

 

 

 

 

 

 

 

 

 

1976년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열정적이며 능력있는 설교이다. 설교는 “뜨거워야”하고 “진지해야”한다. 때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원고를 다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때로 그는 설교 요점만 적어서 설교했다.

 

그는 설교할 때 복음주의 원리를 언제나 기초로 했으며, 영혼의 영원한 구속에 대한 강론을 다섯 차례나 했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여러 주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의 글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그 교리가 기술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크게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어떤 사람의 말대로 “마음의 신학자”였다. 거성, 이 능력있는 지성인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인간-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 모두- 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 심리학,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보면 유명하다는 사람들(윌리엄 제임스, 스타벅, 사잔트)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하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어휘를 쓸 수 없다. 그 정반대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 그래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에게 문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그의 지식,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심리학은 정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드워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부흥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 부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전도 운동과 부흥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서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부흥시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결신을 요청하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늘 사용하는 어휘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쇄신”(renewal)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은 부흥이라는 어휘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쇄신”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그들이 이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는 우리 모두 중생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졌음을 깨닫고 그것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흥이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부흥을 얻을 수는 없다.

 

부흥이란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할 따름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진정한 뜻을 상기시켜 준다.

 

여러분은 신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붙는 신학이어야 한다. 빛 뿐만 아니라 뜨거움과 열도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는 이런 것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위대한 교리들이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 있다.

 

“오늘날 이런 지식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논리의 힘과 침투력, 학식의 정도, 명확한 분별력, 바른 문체, 표현의 명확함 들이 이처럼 빼어난 세대가 언제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죄를 이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천국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삶의 거룩함이 이처럼 빈약했던 적이 언제 있었는가? 현재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많은 것을 축적시켜야 하는 필요보다는 마음이 감동받을 필요가 더 급하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훌륭한 성향을 가진 설교를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다.”(Works,1권,391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결심하십시오. 그의 설교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의 실천적 연구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 다음, 신학적 주제에 대한 위대한 강론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교자이든 청중이든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포착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어떤 유익을 얻었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또한 최고의 체험을 누렸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주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외경심과 경이감을 느낄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내에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언제나 전달해 주고 일으키는 인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사역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들이 그들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그 많은 집회에 다니는 것을 중단하시고, 오늘날 복음주의 집단에서 유행하는 여러 형태의 오락 즐기기를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읽는 법을 배우십시오. 현대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만 읽지 마십시오. 견고하고, 사실적인 것들로 돌아가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두 권과 같은 책을 읽은 결과로 부흥이 시작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대학 시절 친구에게서 소개 받은 책의 한 부분에서 에드워즈를 만났다고

한다. 더 깊이 그를 알고 싶었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약 2년후 아주 우연하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두 권을 만나게 되어 5실링을 주고 샀다.

“저는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제게 끼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페리 밀러는 “아직까지는 에드워즈가 미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철학자겸 신학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에드워즈는 교회가 생명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의 시대도 교회가 성령의 불이 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분명한 특징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서문을 당시 목회자였던 쿠퍼라는 분이 썼다. 거기에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추어졌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습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 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새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년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상태입니다. (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신실한 교역자들과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이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생명 없는 상태를 지속하던 교회들에 이제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가뭄 후에 소나기가 쏟아진 것이다. 생명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 100년 동안, 아니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에서 뛰어난 사실은 그의 노샘프턴 사역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이었다.

그것은 1734년말부터 1735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 후로는 1740년 초 조지 휘트필드 일행의 방문과 함께 일어난 대각성 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에 죽었다. 천연두 예방접종 후에 죽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제공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1727년 그는 메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보조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1년쯤후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에드워즈는 혼자 목회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1750년 교회에서 쫓겨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는 정말 빼어난 천재이며 능력있는 설교자로서 대부흥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1750년 투표 결과 230대 23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특정인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 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 기준을 주장했다. 학습 준비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주장이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은 어떤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다.

에드워즈를 통해서 청교도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청교도적인 정신과 삶이 그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만발했다.

 

노샘프턴 교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당시 변경 지역으로 인디언들이 사는 곳인 스톡브리지로 갔다. 그가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걸작들을 몇 권 썼다. 존 번연이 12년동안 베드포드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써 명저를 남기게 된 것과 같다.

 

그곳에 있다가 뉴저지 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었는데,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다.

거기서 얼마 후에 그는 천연두 접종을 받고 그 부작용으로 죽었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의 영적인 산소는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룩이 더욱 찬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한 그의 강조도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은 이 큰 봉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왜소한 등산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그의 전집을 사서 읽도록 설득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뿐입니다.

 

에드워즈는 한마디로 거성이었다. 그는 미개발된 나라에서 자라났다.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놀라운 지성을 발휘했고 명석한 상상력과 놀라운 독창성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뛰어난 점은 그의 모든 빛나는 재능들과 함께 겸손과 온유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았다. 그는 마음을 크게 강조했다. 그를 볼 때 두드러진 사실은 완벽성과 균형이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다.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도 하면서 전도자였다.

그는 위대한 목사였으며,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회심에 대한 대단한 옹호자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이 단독으로 모이는 집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는 진정 모든 것을 갖추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사람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이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오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다. 그는 자신의 빼어난 지성과 독창성과 철학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한 종으로 여겼다. 그 어떤 지식도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은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살아 있는 만남이 신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체험의 글이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 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 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 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며, 달콤하고 탁월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뒤따랐습니다.

 

 진정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에 좌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지식을 심어주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고양된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한 신앙과 거룩이, 영혼 속에서 큰 역사를 하도록 허용을 해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주로 마음의 일이다. 머리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뜨거움과 감정을 강조했다.

 

“설교를 통해서 얻은 주요한 유익은, 설교 당시 마음속에 생긴 인상이지,

 전달받은 것을 후에 기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한 부흥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마음의 신학자”였다.

에드워즈만큼 인간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놀라운 회심에 대한 진술”이라는 그의 책은 가장 흥미롭고 가장 감격적인 책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이라고 존스는 말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비평가도 아니었다. 1740년대의 부흥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하고 비상한 현상들을 변호하면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지도 말고, 육체를 통해 사탄에게 기만당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는 휘트필드에게 경고하기 까지 했다. 휘트필드는 “충동”에 복종하고 순응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휘트필드를 감히 비평했고 가능한 위험들을 경고해 주었다.

 

 

 

 

 

 

 

 

 

 

 

 

 

 

 

 

 

 

 

 

 

 

 

 

 

 

1968년 윌리엄 윌리엄스와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

 

메소디즘의 잉글랜드에서의 진정한 기원과 시작은 찰스 웨슬리가 주창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설립한 홀리 클럽에서 찾아야 한다. 메소디즘의 진정한 시작은, 1736년 휘트필드가 겪은 강력한 체험과 1738년에 웨슬리 형제가 겪었던 체험 속에서 찾아야 한다. 웨일즈에서는 메소디즘이 아주 독립적이고 자생적이었다. 잉글랜드보다 앞선 1735년에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의 회심으로 출발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칼빈주의 메소디즘과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으로 갈라졌다.  

 

메소디즘이란 본질적으로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이요 생활방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확신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새생명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공통점이었다. 휘트필드는 부단히 중생에 대해서 설교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 “감정”을 강조했다. 그들은 정통 교리, 바른 믿음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느끼기” 원했다. 윌리암스의 찬송시를 보면 위대한 시성과 완벽한 신학이 놀랍게 어우려져 있다.

 

윌리암스는 <간증 집회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증거의 명확성을 시험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그들이 처음 증거를 받았는지, 그 증거를 지금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상실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 자신의 영이 가진 이 증거가 성령의 증거로 인해 두 배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말씀에 대한 윌리엄스의 관점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었고 그들 자신의 체험이었다. 다니엘 로랜드의 경우에도 예배 중에 기도문을 읽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여 “두 배의” 확신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놀라운 방법과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하웰 해리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것을 가르쳤고 이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소그룹이나 작은 단위로 모였는데 그들이 행한 주요한 일은 서로 자기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시험하며, 체험들을 서로 논의하는 것이었다. 메소디즘을 특징짓는 것은 이 영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믿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권능을 느끼고 체험하기를 열망했다.  또한 전도에 열심인 것이 메소디스트들의 공통점이었다.

 

*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특징

 

무엇보다 위대한 설교가 있었다. 칼빈주의는 언제나 위대한 설교를 유발한다.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의 특징은 뜨거운 열정과 기쁨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찬송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이들은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치기도 했고, 흥분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기쁨과 즐거움과 찬송과 확신이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큰 특징이었다.

 

그들은 연속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도집회처럼 부흥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고 조직한 모임에 불과하다. 부흥은 “지존하신 분이 찾아오시는 것”이요 성령의 부으심이다. 18세기에 있었던 그 위대한 부흥 가운데 하나는 1763년에 윌리엄 윌리암스가 새로운 찬송시를 출판한 결과 발생했다. 사람들이 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부흥의 폭발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그 위대한 신학의 표현을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부흥이 터져 나왔다. 윌리암스의 찬송은 신학과 체험을 함께 묶은 것이다. 그는 찬송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신약의 여러 교리들을 익히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의 요소는 내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바이다. 이것이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독특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청교도들의 서적을 대단히 많이 읽었다. 그것들을 섭렵했다. 성경 다음 가는 양식이었다. 그들은 책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청교도들의 계승은 아니다.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감정, 부흥, 확신에 관한 것과 특징으로 묘사했던 것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감히 나는 제안한다.

 

* 메소디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메소디즘이란 용어에서 “경직화”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오늘날 메소디스트라 하면 알미니안 또는 존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메소디즘이다.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은 여러 면에서 일관성을 상실했다. 그들은 은혜를 크게 강조했다가 다시 자유 의지와 인간이 감당하는 역할과 행위를 끌어들였다. 중생을 강조하고서는 그 중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부정해 나간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메소디즘이 신비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들은 교리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강조점을 두어 “느껴진” 측면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잘못된 환각주의나 일종의 “몽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교리와 “느껴진” 요소 두 가지가 완전히 조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바른 자리를 지키게 보증해 줄 뿐 아니라 체험의 영역 자체 속에서도 많은 오류를 막아주어 일종의 신령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메소디즘이야말로 진정한 메소디즘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칼빈주의라고 나는 주장한다. 메소디스트가 아닌 칼빈주의는 세심히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는 지적이고 스콜라적인 데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진리”에 대해서보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위험은 신앙고백을 “부수적인 표준”으로 삼지 않고 최상 최고의 표준으로 삼아 신앙고백을 성경의 위치에 놓은 위험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칼빈주의가 메소디즘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경향의 위험은 기도할 마음을 막는 성향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회들은 기도가 특징이었다. 그 기도회는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 모임으로 때로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메소디즘이 없는 칼빈주의는, 거칠고 냉랭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쁨이 없고 딱딱한 신앙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옛 칼빈주의자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주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언제나 말하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물러가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강조하게 된다. 모든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에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체험으로 유도되고 체험을 크게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이 찾아오심과 물러가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칼빈주의라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참된 칼빈주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자극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칼빈주의가 강력해질수록 영적인 부흥과 재각성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은 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처럼 기도하게 하는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부흥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관심거리이다. 세상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 칼빈주의자들의 모든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며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대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일어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원수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주님의 전능하신 팔의 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1973년 하웰 해리스와 부흥

 

사 60:21b-22,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인류의 역사는 항상 창조적인 소수가 이끌어 왔다.
오늘의 미국은 약 400년전 성경위에 세워지는 “거룩한 사회”(언덕위의 도시)를 만들겠다고 결단한 소수의 청교도들에 의해서 세워졌다.

성경 위에 세워지는 인생이 위대한 가문의 참된 행복과 번영을 가져온다.
성경 위에 세워지는 사회가 위대한 민족의 번영을 가져온다.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영국 웨일즈 부흥을 이끌었던 청교도 중의 한 사람인 하웰 해리스는 1714년 1월에 태어나서 1773년 7월21일에 죽었다. 그는 웨일즈에 트레베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했다. 그는 교육을 아주 조금밖에 받지 못했으나 학교 선생이 되었다. 오늘날의 선생과는 다르다.

그는 1735년(22세)에 놀라운 회심을 하였다.
청교도들은 놀라운 회심을 하고 그 결과 위대한 생애를 살았다. 존 녹스도 그랬다.
75년 3월 30일 종려주일에 트레베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달카트 교회에 참석했다. 예배 도중 목사님이 다음 주일에 있을 성찬 예식을 광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면 기도하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고,
살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이며, 살기에도 합당치 못하다면 죽기에도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이 광고 한 마디가 그 선생을 큰 능력으로 쳤다. 그를 회개의 고뇌로 나아가게 했다.
그는 결코 방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태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의 광고를 통해서도 죄를 깨닫게 하실 수 있다.

다음 주일 하웰 해리스는 성찬식 예배에 참석했다. 그 예배는 그의 죄의식을 더 불러 일으켰다. 평안을 찾으려고 했지만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5월 25일의 성찬식때 죄사함을 받는 체험을 하고 평안을 찾았다. 성찬식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내 눈앞에 서 계신 것같았습니다. 능력이 내게 주어져 그 피로 인해 용서를 받았다는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짐을 벗었습니다. 나는 기뻐 뛰면서 집으로 가슬퍼하는 내 이웃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왜 슬퍼합니까?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나는 압니다.

오 복된 날이여! 언제나 그것을 기억하고 더욱더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3주일 후 즉 6월 18일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날 그는 또 다른 체험을 했다. 그때 그는 랭카스티 교회의 종탑 안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엄청난 체험을 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은 불타는 전도자가 되기 시작했다. 이 체험의 결과로 그는 영혼들을 향한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했고, 죄 가운데 빠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슬픔을 느꼈다.

처음에 그는 병든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만 했다. 자기에게 도움을 주었던 책들을 읽어 주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어찌나 능력있게 읽었던지 사람들이 아주 크게 감동을 받았다. 얼마 후, 병든 사람의 방에서든 아니면 어디에서든 그가 책을 읽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책 읽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이러한 일이 갈수록 더 많아지게 되자 몰려오는 군중들이 더 많아져 그는 노천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각성하며,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의 경건주의자 어거스트 프랑케가 할레에서 조직했던 공동체에 대해서 읽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고아원이면서 종교적인 공동체였다. 해리스는 그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트레베카에서 한 “가족”을 시작할 결심을 했다. 거의 100명에 가까운 사람을 모았다.
목수, 대장장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그들을 가르쳤고 교훈했다.

후에 그는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의용군의 중대장으로 일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설교했고 때때로 특이한 일들이 발생했다.

그는 1768년 헌팅던 백작 부인과 함께 다른 이들을 도움을 얻어 설교자들들 훈련심키는 대학을 건설하였다. 트레베카에 그 대학이 세워졌는데 큰 건물이 건축되었다. 휘트필드가 개교예배때 설교하였다. 69년에는 존 웨슬리도, 로랜드도 와서 설교하였다.

해리스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몇 가지 특징을 살펴 본다.

1. 하나님의 부흥은 성바울 대성당도 아니고 뉴욕이나 서울도 아니고
트레베카와 같은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초라한 학교 선생을 들어쓰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와 인물이시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 부흥의 방법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부흥이 무엇인가? 로이든 존스는 말한다.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오순절의 반복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중생할 때 성령 세례를 받으며, 중생한 뒤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이미 자기가 가진 것에 복종하는 일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부흥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가 가진 것에 복종한 결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사람에게 부어지고 강림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1735년 6월 18일 해리스는 랭가스티에 있는 교회의 종탑 안에 있었다. 그는 3주 전에 이미 회심했고 죄 사함을 받았으며 기쁨으로 춤을 추었다. 그런데 3주후 종탑 안에 앉아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고 있을 때 그에게 “불”의 세례 또는 “능력의 세례”가 임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갑자기 내 마음이 불 앞에 초같이 녹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 구주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사랑과 평안을 느꼈을 뿐 아니라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 속에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아바 아버지’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내 마음은 만족하여 울부짖었습니다. 제게 능력을 주십시오. 그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를 따라가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리차드 베네트는 이렇게 말한다.
“달카트 교회에서의 죄사함의 체험은 달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이상의 필요에 대한 느낌이 그의 영혼 속에 있었습니다. 그가 랭가스티 교회에서 은밀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그에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그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깨끗해졌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흘러넘치도록 부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 오셨지만 이제 그를 사로잡기 시작하셨습니다.”

3. 그후 해리스는 이러한 체험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리챠드 베내트의 말이다.
“그는 거듭해서 그륀 페칸 산에서 누렸던 영적인 체험을 말한다. 그가 쿰 야우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그 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미소짓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져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거의 터질 것만 같았다. 그후 그곳은 언제나 그에게 있어서 거룩한 산이 되었다.”

해리스의 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나는 새벽 2시까지 취한 사람처럼 혼자 기도했습니다. 오랫동안 영광, 영광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은 누가 다 쓸 수 있겠습니까?

1747년의 일기이다.
웨일즈에서 늘상 하시던 대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속에서 불타 올랐습니다.

1749년 일기이다.
주께서 오셔서 내가 도저히 반항하거나 의심할 수 없는 강력한 급류처럼

나를 압도하셨습니다.

그가 자주 언급한 말이다.
“주께서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나는 대단한 자유를 누렸고,

 구원의 위대성에 대해서 밝혀 나갈 때 강한 질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내가 우리 구주의 무한하신 죽음에 대해 밝혀 주었을 때 강한 질풍이 휘몰아쳤습니다.”

해리스는 언제나 수년 전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할 뿐 그 후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을

질책했다. 그는 “죽은 간증”에 대해 말을 하면서
“주님께로부터 예전에 받았던 것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지금 주님께로부터 새롭게 받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4. 해리스는 또한 성령의 세계 속에서 산 사람이었다.
그는 직접적인 인도를 믿었으며 또한 직접적인 인도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 했다.
비판자들은 그를 광신자라고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과 긴밀한 연합 가운데 살았던 것이며
성령의 감화에 민감한 것이었다.

“아무 준비없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한 능력과 복을 받았지만 어디서

그 같은 말씀이 그처럼 분명하고 적절하게, 그러면서 유익하게 나오는지 나도 몰랐습니다. 거의 아홉 시간이 지났고 결국 환한 대낮이 되었습니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동안에는 모든 것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겠습니다.”

5. 해리스가 그의 생애를 마치는 모습에서 우리는 또 은혜를 받는다.
이 사람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을 어떻게 맞이했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글을 본다.
“내 영은 불러들이기를 기다리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나는 본향에 가는 것 외에 어느 것도 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주께서 지체하지 않고 서두르셨으면 좋겠습니다. 피 흘려 죽으신 주님, 살아 계시는 주님, 나를 어서 본향으로 데려가소서. 나는 여기서 나그네이니이다. 내 사랑하는 구주께서 오늘 오후 어찌나 달콤하게 빛을 비춰주시는지 모르겠나이다. 오, 썩을 떡을 더 이상 먹지 말게 하시고 이후로 영원토록 주께서 나의 떡과 음식이 되소서. 나는 내 영이 모든 장소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와 내 집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아니 내 본향으로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서 큰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그 안에서 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헌팅던 백작 부인이 쓴 그의 장례식에 대한 기록을 인용한다.
“해리스씨의 유해가 장사되는 그날, 회심한 사람들과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모두에게 미치는 신적 감화를 체험하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결코 잊지 못할 날일 것입니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경외심과 감사함으로 그것을 기억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2만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이 엄숙한 순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 중 수백 명의 사람들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 전에 우리가 모였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임재를 많이 누렸지만, 그날처럼 은혜로운 임재를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성찬식이 거행될 때,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방법으로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나이 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말하기를, 자신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전에 본 적이 없고, 그의 은혜의 부요함이나 복음의 영광을 그처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흐느끼는 긴 행렬이 달가트의 교구 교회에 이르렀을 때, 영국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예배가 진행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을 진동시키고 있었던 회중들의 슬픔과 눈물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자기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자, 기도서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사회를 맡은 목사도 자제력을 잃고 그 기도서를 세 번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다시 세 번째 사람도 같은 이유로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침묵 속에서 이 위대한 사람의 유해는 달가트의 교구 교회의 안치소에 내려졌고, 몇 년 전 아내가 묻힌 무덤에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6. 로이드 존스는 해리스의 사역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교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허락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질풍”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임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소멸하는 죄”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속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죄가 아닙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이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을 초대교회나 사도시대에만 해당된다고 말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전체적인 의미에서 교회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 18세기 초엽의 그 어둠과 죽어 있는 상태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행하신 일을,
교회사 가운데 위대한 부흥의 시대에 반복적으로 행하셨던 일을,
적어도 1735년 6월 18일 하웰 해리스에게 행하셨던 것과 같은
그러한 성령의 부으심을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1960년  지식 - 참 지식과 거짓 지식

(고린도전서 8:1-3 연구)

1. 지성과 지식의 자랑의 위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강한 형제들은 약한 형제들의 지성과 이해력과 지식이 연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멸시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과 약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원리- 그릇된 지식관의 위험.

 

2. 지식의 중요성

 

지식은 필수적이며 교리는 생명이 걸린 것.

성경은 교리로 가득차 있다. 서신서들은 교리와 진리에 대한 능하고 영광스러운 해석서이다. 사도들은 진리를 설교했을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지식의 절대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대부분은 궁극적을 지식이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진리가 먼저이고, 그 다음은 경건, 그 다음은 예배이다.

지식과 이해의 은사는 고귀하지만 덫이 되어 영적 생활에 실질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3. 그릇된 지식관의 원인- 일반적인 원인

 

마귀는 무지와 마음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게 한다.-실패하면

마귀는 분주한 행동주의자가 되게 한다.- 실패하면

마귀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지식의 문제의 극단에 빠지게 한다.

 

1) 어느 하나를 바로 잡기 위해 그와 똑같이 극단까지 간다는 것.

2) 어설프게 배우는 것은 위험하다.

3) 설교를 방해하는 독서

독서가 설교를 듣는 것보다 위험하다.

설교는 독서의 위험에서 지켜 준다. 설교가 참된 설교라는 조건에서.

필립스 부륵스, “설교는 인격을 매개로 하는 진리”

설교는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

독서는 적용에 대한 강제성이 없다.

이 시대는 설교를 듣지 않으려하며 그래서 설교는 더욱더 짧아지고

이에 상응하여 독서를 의뢰하는 경향이 더 증대되고 있다.

설교의 우위성과 탁월성, 우월성을 역설.

진리의 권세 아래 들어올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결론과 적용을 해야 한다.

말씀 설교보다 독서에 더 중요성을 부여하는 시대는 이미 위험한 상태에 있다.

 

4. 그릇된 지식관의 원인- 특별한 원인

 

1) 진리와 지식에 대해 순전히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을 갖는 것.

지식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

성경도 시험을 보는 것은 이론적인 관심만을 발전시키는 경향이 있다.

종교는 화학, 역사, 미술, 신학 등과 같은 하나의 과목으로 부르며

그 분야의 지식쯤으로 생각한다.

종교사 연구에 내재하는 위험.

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그리고 교회의 위대한 인물들과 운동들의 역사에 능통한 세 사람.

그 분야에 온 삶을 바쳤으면서도 그들의 삶과는 전혀 무관.

신학연구도 순전히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관심만을 가질 수 있다.

그릇된 지식이 되고 만다.

 

2) 지적 차원에서만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지성만을 따로 떼어놓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마음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전히 지적인 차원에서만 진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진리의 능력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또 감정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상태처럼

‘그릇된 지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없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순종하여”는 의지를, “마음으로”는 마음을, “너희에게 전하여준”은 머리에 전해주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포함된다. 지만 택하고 정과 의를 버린다면 그릇된 지식관에 이른다.

복음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과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다르다.

 

청교도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사고의 대체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 스스로 연구하고 생각의 과정과 훈련을 통해서 스스로 문제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분석과 사상들을 그저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정직한 생각과 영혼의 고뇌대신 “청교도들을 설교하고”,그 사람들의 저작들을 사용하는 위험에서 건져주시기를.

 

5. 그릇된 지식관을 드러내는 표시

 

균형이 깨져 있다.

다른 것을 알지 못하고 지엽적인 것만 붙들고 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자기야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무게를 잡고 오만한 청교도 특유의 걸음걸이로 걷는다.

어떠한 제약과 교정을 참아내지 못한다.

반대 입장을 용납하지 못한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선생들만 있는 교회는 얼마 무서운가!

그들은 선한 행실보다 지시과 이해력을 떠벌리고 자랑한다.

배우에 더딘 사람들은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자기 “지식”만을 즐기고, 잃어버린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류의 난제와 죄의 파괴적 성격을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시간을 책을 읽어 지식을 더하고 이해력을 높이는 데 쓰면서, 살고 있는 죄악된 세상은 망각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6. 가상적 지식의 무용성과 참 지식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있을 뿐이다.

 

조지 휘트필드, 성경에 대해서, “이는 내 반석이요, 터전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기 시작한 지 35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이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이 책은 약속의 기록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인 섭리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연합시키고 신자로 하여금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성령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이것으로만 스스로 만족한다면 마귀는 교리만 말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에서 칼빈주의로 넘어가고, 충분히 정통적이면서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는 성령을 모시는 것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을 경고하고 있다.

 

“성령의 모시게 되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광대함과 끝없음을 깨닫는 순간 자기는 난쟁이요 초심자에 불과하며, 큰 대양의 해변에서 물놀이 하는 어린아이에 불과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 깊은 곳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깊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순전히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한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19)

 

스펄전, “진리를 알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 자신의 경험에 의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것을 한마디도 하지 않도록 성령께서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말할 수 있고, ‘아바,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칭호로 인사드립니다. 우리는 그를 발견하였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의 발 앞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뢰었고 여러 가지 논증을 아뢰었습니다. 우리편에서 말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의 사랑을 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느꼈을 때 그분은 우리에게 자애로우신 아버지의 인애를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천사가 나타나 증거한 일도 없었지만, 우리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 것을 알았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안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다.

 

아이작 왓츠는 청교도였던 존 하우가 죽었을 때 그의 성경 여백에는 다음의 말이 써 있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나 1704년 10월 22일, 내가 하나님의 풍부하심과 성령의 가장 즐겁고 위로를 주는 역사를 통해 분명하게 느낀 것을 내 생각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흘러 넘치도록 부어 주셨다는 기쁨으로 마음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유쾌하게 녹아들었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도 그의 복되신 성령을 그처럼 뚜렷이 모시게 되었고, 성령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되었다는 기쁨으로 감격했습니다”

 

조나단 웨드워즈도 참된 지식에 대해서 말했다.

 “1737년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속으로 가 늘 하던 대로 한적한 곳에 내려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그때 나는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과 온유와 자비하신 겸손의 특이함을 보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은혜는 너무 고요하고 달콤해서 하늘보다도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상과 사고를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위대한 탁월함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이 나타나셔서, 내 생각으로는 약 한 시간 동안 계속 계셨습니다. 그동안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통곡하고 눈물을 쏟으며 보냈습니다. 나의 영혼은 달리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비워지고 죽어져 오직 그리스도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며, 의지하고 살며, 거룩하게 되어 하늘의 신성한 순결로 순결해지고 싶었습니다.”

 

청교도였던 로버트 볼턴이 1635년에 발간한 책으로 존 홀랜드라는 사람의 체험을 썼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성도가 그의 생을 마감하는 모습이다. 그는 죽기 전날 로마서 8장을 묵상하고 강해하기 위해 두 시간 이상을 소요했다. 갑자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읽는 것을 멈추시오! 내가 보는 광채는 무엇입니까? 내 촛불을 밝게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아니오. 그것은 햇빛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청명한 여름날 오후 다섯 시였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햇빛이라니요? 아니, 내 구주의 광채십니다.’ ‘세상이여, 안녕, 하늘이여 어서 오라! 하늘에서 낮의 별이 내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 이것을  말하고 장례식에서 이것을 설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친밀하게 대하십니다.’

 

‘나는 그의 자비를 느끼며 그의 위엄을 봅니다. 내가 몸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영혼이 활홀해져 소망에 찬 눈으로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 나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해가 뜰 때 그는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일어섰던 것처럼 일어서서, ‘오, 내가 맞이할 행복한 변화여, 밤에서 낮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슬픔에서 위안으로, 분열의 세상에서 하늘 존재로 변화되는구나. 사랑하는 내 형제 자매 친구들이여, 여러분을 위에 두고 가는 것이 애석하지만, 나의 죽음과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자 불병거여, 엘리야를 태우러 왔던 불병거여, 나를 행복한 본향으로 데려다 주오. 나사로의 영혼을 받들어 하늘로 데려간 너희 모든 복된 천사들아, 나를 데려 가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기게 하라.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말했다. 그리고서 그는 잠들었다.“

 

이것이 참된 지식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지식이 이것임을 알고 신학의 목적과 모든 가르침의 의도가 이것임을 알게 될 때 지식을 가졌다고 “교만하게 뽐내고”또한 “우리의 학식”을 자랑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참된 지식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

 

1 하나님의 사랑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것이 바로 지식이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참된 지식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2 그 지식이 낳는 성품을 보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참 지식은 반드시 겸손하게 하며 또 거룩하고 경건하게 한다.

휘트필드처럼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머리보다 더 낫다고 말합시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머리,즉 사고가 잘못되어 있다 해도 참고 그를 도와주도록 애를쓰자.

 

참된 지식의 결과

 

1 주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2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거룩한 열심을 가져야 하고

그 결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한다.

1790년대에 선교 사업에 관계한 사람들은 모두 칼빈주의자였다.

그런데 오늘날 은혜의 교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가장 활동적인 설교자와 복음전도자가 될 것이다.

 

그 위대한 조지 휘트필드만큼 활동적이고 그처럼 아는 힘을 다해서 수고한 사람이 18세기에는 없었다. 참된 지식을 가진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긍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 충만할 것이다.

 

참된 지식을 얻는 방법

 

1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반드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읽은 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하나님을 진실로 알았던 사람들의 일기를 읽어보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련의 질문 목록을 뽑아 놓았다.

 

2 균형있는 독서를 하라.

내게 가장 도움을 주었던 방법은 신학서적과 전기를 균형있게 읽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했다. 특히 휴일 아침에는 신학책을 읽고 밤에는 전기를 읽으려고 노력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를 알게 된 것은 1928년이었다.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저는 매우 작은 존재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거짓된 지식의 독소를 해독시키는 가장 좋은 길은 조나단 에드워즈나 휘트필드나 메들리의 플레처 같은 사람의 전기를 읽는 것이다.

진정으로 설교한 적이 있는가? 얼마나 많이 했는가? 우리는 얼마나 휘트필드의 체험을 했는가? 한번은 그가 설교하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회중들에게 “오, 네가 느끼고 있는 것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십시오”

스펄전처럼 주님께 “안기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느낍니까?“

 

 

 

 

 

 

 

 

 

 

 

 

 

 

 

 

 

 

 

 

 

 

 

1961년  요약-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 청교도들의 설교 방식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들의 설교에는 반드시 “적용”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적용이 없으면,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입장, 다른 사상, 다른 운동들이 우리의 입장, 사상, 운동 등을 결정짓게 내버려 두게 된다.

 

우리가 통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적극적이어야 한다. 영혼들에 대해 능동적이고 긴박한 관심을 기울이는 면이나, 활동하고 행동하는 면에서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떤 것을 아는 것만으로 끝내버리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열심이 있는가?

이론이나 말만이 아니라 실제 행실에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가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은, 로버트 맥셰인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이 성자같은 사람이 주일 아침 강단에 올라서면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산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냈던 모세처럼, 그가 오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낸 것을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에게는 광채가 났다.

서신서들은 목회적인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적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오늘날 고린도전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영적 삶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자제하여 지나치지 않도록 하라는 당부를 해야 할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는 한 교회도 그러한 교회를 보지 못했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이 생명과 활력을 가졌다면 언제나 지나칠 위험성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에는 주님을 “진실로” 기뻐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나타나는 것,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체험들을 아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체험이 너무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영적 인물을 비난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성령의 임하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경이와 놀라움에 빠져 정신을 잃는 것을 알고 있는가? 기도 모임 중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무엇임을 아는가?

초대교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 뒤의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가 비평을 하면서 “이것은 단순한 젊음의 흥분이요, 사람의 과도함이다”고 말할 권리가 있는가?

 

“성령의 소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쉽게 이러한 죄를 지을 수 있다.

어떤 일을 두려워한 나머지 너무나 조심하고 주의하며 염려함으로 인해 결국은 아무것도 얼어나지 않게 하고, 우리 교회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입장을 계속 고수하면 좌절감이 더욱더 악화될 수 있다.

 

교리는 결국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에 불과하며 수단이다. 우리는 교리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교리는 항상 믿음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며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힘을 의식하는 그러한 지식, 그러한 친밀감, 그러한 깊은 체험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감사하자.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자. 이사야의 말을 붙들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자. 하나님을 굳게 잡기 위해 분발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리에는 성령과 말씀, 말씀 위의 성령,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이라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제 하나님께 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간구하자.

죽은 것처럼 들리고 단순한 문자로 들리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불꽃이 되게 하는 능력과 기름 부음을 하나님께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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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필드를 통해서 얻는 교훈”(PP 181-185)

 

1. 상황은 절대로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736-37년 기간만큼 사태가 악화되었던 적도 없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글로스터의 벨 여관에서 태어난 이 무명의 소년 조지 휘트필드에게

손을 얹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기독교의 장래를 걱정하느라고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내지 마십시오.

 

2. 칼빈주의와 전도의 관심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거짓말에 영원한 종식을 고합시다.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바로 이 사람인데 그는 칼빈주의자였다.

지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조지 휘트필드를 본으로 삼았다고 고백한다. 그도 역시 칼빈주의자였다.

 

3. 정통 신학의 절대적인 필요성이다.

조지 휘트필드는 사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들이 전했던 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청교도들과 그들의 저작들을 연구하면서 살았다.

그는 때로 어쩔 수 없을 때는 청교도들의 설교를 전하기까지 했다.

 

정통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통만 가지고는 부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죽은 정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존 칼빈은 언제나 조지 휘트필드를 필요로 한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진 위험은 너무 이지적이 되거나 아니면 “경화된 정통”으로 빠지는 성향이다.

이것 위에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진리를 진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그 진리가 진술되어야 한다.

 

이 능한 사람 위트필드가 바로 이 점을 놀랍게 예증한다. 그는 정통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놀라운 일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것- 성령이 물결치듯 임하는 것- 을 의식했다.

이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안 사람은 일찍 없었다. 이것이 때로는 그를 압박했고, 육체적으로 그를 거의 부숴버릴 것같았다. 그는 이것 때문에 눈물로 목욕을 하곤 했다.

 

이 성령의 능력은 필수이다. 우리는 정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통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금물이다.

우리는 조지 휘트필드가 받았던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모든 계층과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능력과 확신으로 설교할 수 있도록 만든다.

 

설교를 독서로 대치할 수는 없다. 성령의 자유케 하심이 필요하다.

“빛과 우레와 무지개”를 필요로 한다. 책들을 통해서는 그것들을 얻을 수 없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프로그램이 잊혀진다. 시간도 잊어버린다.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과 내 영혼과 복되신 구세주 외에는 모든 것을 잊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조지 휘트필드와 같은 설교자가 될 수는 없다 해도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설교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고 우리의 사역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고,

강한 신앙 부흥을 통해 하나님의 오른 손이 나타나는 것을

이 나라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소원하는 마음을 우리 속에 창조하소서!

 

 

1962년 청교도의 난제들-

1640년부터 1662년이 주는 교훈들

 

“청교도의 양심!” 그들에게 이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진리를 이행하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청교도들은 항상 적용을 크게 강조하였다.

 

우리 모두는 참된 신앙의 부흥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 “마른 뼈”들이 움직이고 서로 상합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흥보다 어떤 유의 개혁이 앞선다. 부흥에는 어떤 조건들이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먼저 그 사람들이나 개인을 준비시키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이 타락하거나 배도한 교회가 회개라는 선결 조건의 수행 없이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662년의 이 큰 사건은 영국 종교사에 있어서 중차대한 사건이라는 데 모든 사람들이 찬동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사건은 300여년간 영국의 종교사와 신앙의 패턴을 결정하다시피한 전환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1640년부터 1662년의 기간은 종교 개혁과 거의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영국 국교회의 본질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영국의 종교개혁 시기부터 1662년까지 청교도들이 영국 교회의 상태에 만족했던 시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1662년의 결정은 반동적 종교개혁의 특징을 띠고 있다. 청교도들의 소망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의 완전한 실패였고 모든 갈망하는 것이 무산되어 버린 사건이었다.

 

청교도들의 실패 원인

 

로드의 분명한 패배가 승리로 바뀌어 버린 이 엄청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로드는 고소당하여 사형 판결을 받았고 그 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었을 때는 특히 그랬다. 완전히 패퇴할 것같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2년에 그 사람들이 승리했다. 거의 완전히 멸절당한 것 같이 보이던 로드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고 대단한 승리를 축하했다. 이 기간 동안 내내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청교도들은 특별히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1) 종교와 정치의 혼합이다. 이것이야말로 청교도 역사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다. 공동의 적을 이기기 위해 서로 타협하게 되었다. 교회 내의 종교를 정치와 혼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1640년부터 1662년까지의 기간이 주는 교훈을 배워 그처럼 세상에 휘말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우리는 영적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2) 훨씬 더 비극적인데, 그것은 청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분쟁이다.

청교도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교회파, 제5왕정파, 퀘이커파, 개간파, 평등주의파, --. 영국 국교회의 정책은 이들을 “분열시켜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1662년의 재난이 도래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사분 오열되어 싸우고 있는 동안, 거의 대부분이 대륙으로 도피했던 로드파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모의했다.

 

3) 장로교도들도 국교회 사람들만큼 의회의 법령과 국가의 권세를 이용해 자기들의 특별한 교회관에 복종하도록 대중들을 억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644년에 그들은 국가의 권력과 의회의 입법 조치를 통해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점은, 궁극적으로 문제는 변덕스러운 대중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크롬웰을 내세웠던 런던의 대중들이 1660년에는 찰스 2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했다. 똑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법을 제정하는 권세와 교리를 강요하는 권세를 국가에게 주면 언제나 이러한 결과가 따라온다.

 

그들은 “엄격한 종교적 행동”을 의회의 법률 조항에 의해서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스포츠나 오락 및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법 조항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공화정 기간 동안 주어진 방법대로 살도록 강요받았던 런던 대중들은 그것들을 믿은 적도 없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지치고 진력이 나게 되었다. 이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어, 왕정제로 다시 바뀌어 왕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며, 삶을 망치는 청교도들을 제거해야겠다고 말하게 되었다. 도덕적, 영적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회의 법률 조항을 통하는 식으로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반작용을 낳게 되는 것 같다.

 

만일 이 모든 분파와 파당이 놀라운 기회를 맞았을 때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특히 찰스 2세의 복귀 때 그랬더라면- 그들이 보편적인 종교적 관용에 대해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도들은 그 일에 동조하지 않았다. 반드시 장로교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청교도들이 어떤 한 체제보다는 보편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위해서 함께 연합했다면, 그 당시와 그후 300년 동안의 역사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존 오웬이나 토머스 굿윈 등 다른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입장이 진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해를 많이 받았고 영광스러운 가능성과 기회가 지나가 버린 때였다.

 

이 기간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

 

1) 개혁적이고 청교도적인 관점에 따르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기도 한 구원의 복음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장하고 선포하며 변증해야 하는 것은 이 순전한 복음, 이 순전한 복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2) 믿음의 핵심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되는 사람들이 같은 교회에 함께 있는 것을 관용해야 옳은가? 우리가 고수하는 거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며 한 부류 속에 있는 것이 옳은가?

 

3) 영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육신적인 무기를 통해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半)정치적이고 반교회적인 자세를 가지고 싸우는 순간 우리는 파당 정신을 발전시켜 파당 이익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핵심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리와 진실로 일치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며, 반대로 대의는 이미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그 좁은 파당 정신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순결 및 번영보다 자기 편의 관점이 승리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자세를 취하지 않게 지켜 주소서!

 

이 기간을 통하여 배워야 할 실제적인 교훈

 

사람들의 교활함과 간교함과 악의에 속아 덫에 걸리는 위험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행동하는 양심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 너머까지 내다 본다. 청교도 지도자들에게 어떤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청교도들을 분열시키려는 수작들을 부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격하고 단호하며 양심적으로 거절되었고 거부되었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양심을 팔 수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광야로 나가 무섭게 따라오는 고난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의 행동하는 양심이다. 면밀함, 주의 깊음, 특히 바른 관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껼과가 어떻게 되든지 바른 견해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면밀함,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청교도의 양심이다.

 

이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궁극적인 교훈은 이것이다. “육체의 병기는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린다. 여러분은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와 그 힘의 능력”을 미덩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하고 그 힘의 권능으로 강해져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4)는 것을 진실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싸우며 모든 타협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유혹, 모든 제안, 모든 아첨, 명예를 주겠다는 속임수를 모두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여 사용되는 간계들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주겠다든지, 어떤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든지, 승진을 시켜 주겠다든지, 우리 교단의 어떤 자리를 주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믿음과 교회의 순결성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입장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이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이들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1977년  설 교

 

1. 설교에 대한 국교도와 청교도의 관점의 차이

 

오늘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낮게 평가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춤을 추거나 다른 유형의 외적 예배행위로 설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설교는 그 사람의 신학과 관점의 표현이며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청교도들 그리고 설교의 대가들이 늘 주장한 것은 설교는 주님께서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주님은 설교자이셨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일어나서 설교했다. 사도 바울도 탁워하고 위대한 설교자였다.

 

설교에 대한 국교도의 관점은 아침과 저녁 기도회 때 설교를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감독들도 “예언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예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설교였기 때문이다. 국교도의 풍조는 설교에 대한 청교도의 개념을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에게는 설교가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청교도이며 잉글랜드 장로교회의 실질적인 원조였던 토머스 카트라이트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와 책망의 방법을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될 때만이 살아 움직인다. 불을 휘저으면 더 많은 열이 나듯이, 말씀도 설교를 통해서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냥 읽는 것보다 듣는 자들 속에서 더 많은 불꽃을 일으키게 된다.” 설교자는 단순히 지시고가 정보를 주기 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고취시키고, 열심을 내게 하며, 소생시키고, 성령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선 것이다.

 

2. 청교도들이 설교를 강조한 방법과 이유

 

교회와 교회의 본질의 정의에 있어서 청교도들은 언제나 첫 번째 말씀에 대한 참된 설교 그 다음에는 정규적인 성례집행 세 번째가 권징의 행사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 아래서는 설교가 경시되어 그 당시 영국에 남아있는 설교자는 아주 극소수였다. 청교도들은 설교자가 필요함을 인식했고 설교자를 훈련하는 방법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토론하게 하고 문제를 제기한 다음에 같은 본문을 설교하는 방법을 채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576년에 설교가 금지되었고 다른 대책으로 경건한 설교자들이 주관하는 강좌였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강단을 중앙에 놓는 것으로 설교를 강조했었고 끊임없고 조직적인 설교가 있었고 사람들은 멀리서도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청교도들이 설교를 중심적인 위치에 둔 이유는,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예식과 의식과 예배를 강조하고 사람이 행하고 섬기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는 설교된 말씀을 인치는 것이며 성례는 설교에 부속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청교도들은 설교는 성결을 촉진시키는 성경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그 가르침의 영향이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하게 미치기 때문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설교의 임무는 “교회를 모으고 선택된 자를 세우기 위한 것이고 주님의 양무리들 가운데서 이리를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3. 국교도와 청교도의 설교 방법과 스타일의 차이

 

국교도의 방법은 하나의 주제를 택하여 주제에 대한 연구논문을 설교하는 식이다. 반면 청교도의 개념은 본문 속에서 교리를 찾아내고 같은 교리를 가르치는 다른 성경 본문을 참고하여 본문 속의 교리를 확증한다. 교리를 입증한 다음에는 언제나 적용이 있었다. 윌리암 퍼킨스는 설교의 기술에서 설교자를 지도 안내해야 할 네 가지 원칙을 말했다.

 

1) 권위있는 성경의 본문을 분명하게 읽어야 한다.

2) 성경 자체를 근거로 읽은 본문의 의미와 이해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3)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로부터 몇가지 유익한 교리를 수집해야 한다.

4) (은사가 있다면) 수집된 교리들을 단순하고 쉬운 말로 사람들의 삶과 자세에 적용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설교는 “단순하고 진지하며 신실해야” 하고 설교자는 인간의 메시지가 아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므로 인간의 지혜는 감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퍼킨스는 설교자는 학식이 많은 사람이어야 하나 그것을 감추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술의 진수는 기술을 감추는 데 있다. 지식을 풏성하게 하라 그러나 학식을 과시하지는 말라.  

 

토머스 풀러는 퍼킨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의 교회에 속해 있는 학자들은 이보다 해박한 설교를 들을 수 없었고 평민들은 이보다 쉬운 설교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청교도의 설교는 자유와 열기와 열정이 특징이었으며 리처드 백스터는 “나는 다시 설교할 수 없을 것처럼 설교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설교합니다.”

 

(고후2:14-1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것이 청교도의 설교 개념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냄새”가 되기 위함이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가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강단에 올라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아이작 왓츠의 말대로 ‘선한 옛 청교도들로부터“ 배우며,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필요는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1978 “존 번연 및 기타 청교도들로부터 얻는 빛”

 

 

1. 존 번연이 교회 연합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

 

존 번연은 학문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교육도 조금밖에 받지 못했다. 존 번연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대범하고 관대하며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17세기는 논란과 논쟁의 세기였다. 국교도, 청교도, 독립교회파, 침례교파, 그리고 각 파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분파들, 종파주의자들 등이 있었다.

 

1612년경에 침례교회가 출현했고 침수세례 문제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1641년 경이었다. 1616년 제일회중교회가 런던에 처음 설립되었고 그 교회에서 논쟁이 시작되어 그 교회에서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헨리 제시라는 사람이 그 교회 담임이었고 그는 침례교도가 되어야 겠다고 확신하고 재세례를 받았다. 그는 번연의 사상에 대단한 영향을 끼첬다. 번연의 관점을 결정하는 또다른 요인은 크롬웰이 호민관으로 있던 1649년부터 1660년까지 기간은 대단한 종교자유의 시대였다. 그 당시는 어떤 존경할만한 인물의 보증을 받으면 설교할 수 있었다. 또한 신앙조항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교회 규례 등 제반 문제들도 각 교회 스스로 정하도록 일임했다. 번연이 교회 질서와 세례에 대한 번연의 관점을 결정지은 요인은 그가 감옥에 갇힌 후 12년의 기간 동안이었다. 그는 2차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해야 겠다는 생각과 1차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을 강조하고 주장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2. 교회 연합을 추구한 존 번연의 입장

 

1684년 “거룩한 생활: 기독교의 아름다움”이라는 글을 썼다.

“장로교회 교도, 독립교회 교도, 침례교도 하며 자기 나름의 견해에 집착하면서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통해 명령받은 그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동의 조장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 번연의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분리주의자였지만 퀘이커 교도는 아니었다.

 

존 번연은 세례 문제에 있어서 그는 침수세례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재세례파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최우선적인 자리에 놓지는 않았다. “물세례가 교회의 평화를 깨고 경건한 자의 양심에 상처를 주고 분열을 야기하며 교제를 깨뜨린다면 그것은 비록 규례라 해도 당분간은 신중히 피해야 한다.”

 

그는 영국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독립교회에 등록했다. 번연은 청교도 중에서 일종의 급진파에 속하는 퀘이커 교도들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3. 물세례에 대한 존 번연의 견해

 

이러한 존 번연의 견해가 밝혀지자 엄격한 특수 침례파 소속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존 번연을 격렬하게 공격했다. 그들은 침수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들의 교회 지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물세례에 대한 판단상의 차이가 교제의 장애가 될 수 없음”이라는 책을 썼다. 그러나 엄격한 특수침례파에 대한 답변서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나도 물세례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결코 우상화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내가 말한 것은 오로지 세례 방법에는 형제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4. 화평과 연합을 위한 존 번연의 권면

 

존 번연의 경력을 알지 못한 채 천로역정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번연이 어느 교단에 속해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 번연은 “화평”과 “연합”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교회 내의 분쟁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믿는데 방해가 됨을 강조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교단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1967년  샌디먼파

 

이 운동은 1720년대에 존 글래스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신봉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같은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로버트 샌디먼은 그의 사위였다. 샌디먼은 존 글래스를 강력히 변호했으며 글레스보다 더 나아갔다.

 

* 샌디먼파의 신앙관

 

나는 이 신앙관이 알미니안주의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대단한 칼빈주의자이면서도 바로 이러한 특별한 오류나 이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구원얻는 믿음의 참된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해나갈 때 감정을 보이는 것을 배격하며 냉담하고 초연한 자세를 주장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앤드류 풀러도 비판하였다. “그것은 꾸밈없는 진리에 대한 앙상한 믿음이다. 그것은 의지와 정서에 속한 모든 것을 배격하고 다만 이지적 신념의 ‘열매들’로만 의지와 정서를 보려한다.” 의지와 정서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 믿음의 열매에 불과하며, 믿음의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도 마다하고 다만 관념적인 믿음만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성의 찬동이다.” 윌리엄 윌리엄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그것은 능력을 믿지 않으며 죄를 깨닫는 마음과 상한 심령을 과소 평가하고 오직 순수한 믿음을 주된 것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그들은 “관념적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은 반드시 순수한 믿음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노력, 기도, 종교적인 행위, 호소 들을 다 배제시켰다. 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자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메클레인은 어떤 감정의 요소를 도입하거나 거룩한 정서나 소원을 도입하게 되면 행위를 도입한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안전하게 지키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지성적인 차원에 속한 것으로만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성에 의해서만 갖게 되는 “순수한” 믿음을 그들은 주장한 것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위대한 본문은 로마서 4:5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또 요일 5:1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샌디먼파 신앙관이 미치는 결과

샌디먼파의 견해는 전도와 설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르침은 순수한 하늘의 바람도 무시할 정도로 감정을 차갑게 식혀 놓았다.” “이것은 냉담함을 낳고 사람의 감정을 싸늘하게 식혀 놓는다.”  에반스, “샌디먼파들은 죄인들의 회심을 위한 기도의 영까지 소멸할 정도로 내게 영향을 미쳤다.”

 

샌디먼파는 심령의 냉담함과 기도의 부족을 낳는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고, 특히 최고의 구원의 확신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람들은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의 가르침을 따른 후대의 많은 사람들도- 확신 문제에 있어서 감정을 이야기해서는 안 되며, 확신은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우리의 확신은 객관적인 방법으로 확증되며, 감정적인 요소를 믿음의 확신에 도입하는 것은 오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에 반대되는 가르침(저는 이 가르침을 옹호하며 존 오웬을 포함한 여러 청교도들의 글을 인용하여 뒷받침할 수 있다)은, 최고의 구원의 확신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즉각적인 확신이 있다. “성경말씀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가장 저급한 확신이요, 일차적인 것이다. 더 나은 이차적인 확신은 요한일서에 제시된 점검법들을 적용해 보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합니까? 그의 계명들을 즐거워하고 더 이상 그것을 무거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확신이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앞의 두 확신은 우리의 영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 이것은 가장 높고 가장 영광스러운 확신이다. 여기에는 “감정”의 영역이 있다. 즉각적이고 직관적이며 간접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샌디먼의 가르침은 이것을 배제했다.

 

또한 샌디먼의 가르침은 상한 심령, 겸손의 영을 없애버린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이것이 아닌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언제인가? 우리 가운데 상한 심령이나 겸손한 심령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가? 오늘날의 경건은 감정이 결여되고, 아니 감정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소위 냉담함을 동반한, 어떤 전제들에 대한 지적 수용같이 여겨진다. 믿음 뿐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도 전인격이 참여하지 않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눈물로” 설교했던 일을 상기시킨다. 휘트필드는 자주 눈물로 설교했다. 여러분이나 제가 눈물로 설교했던 적이 언제인가? 휘트필드의 말대로 “느껴진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오늘날의 문제가 이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냉담하고 차갑고 기계적인 예배와 삶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크리스마스 에반스는 5년 여 동안 샌디먼파라는 파멸적인 가르침 아래 있었다.

“내 마음으로부터 모든 차거움은 물러가고” 심령의 뜨거움, 마음의 뜨거움, 기도의 뜨거움, 뜨거운 설교,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 깊숙한 부분까지 움직이고 우리 속에 흘러넘쳐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샌디먼주의는 골동품 수집가들이나 역사가들이 관심 가져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오늘날 알미니안주의자들뿐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가?